서머싯 몸의 '인생의 베일'을 읽고...
서머싯 몸의 '인생의 베일'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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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는 정답이 없다. 어떤 유명인이 한 이야기가 아니다. 동네 노인정에서 술을 거나하게 드신 김 씨 아저씨가 한 손에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잔에 따르며 의미 없이 토해낼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인생에 정답이 없을지언정 확실한 오답이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누구도 그 오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내 삶은 오답 투성이었어'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도 말을 내뱉은 뒤에 어떤 삶을 살아갈지 예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책을 읽는다. 오답을 선택한 주인공의 삷을 통해 내가 가보지 않은 길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조차도 자신의 경험이 투영된 객관식의 탈을 쓴 주관식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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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오답을 알 수 있는 책들을 모아 한 줄로 세운다면 지구를 수 십 바퀴를 돌 수 도 있겠다. 수많은 소설 속 다양한 인물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좌절하고, 파멸하는 내용을 모두 열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을 파멸로 이끄는 선택이 상황이 아닌 인간의 기본적 욕구로 단순화시키다면 어떨까? 중세 기독교에서는 이미 인생의 파멸의 선택지를 7개로 정의했다.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색욕'. 어느 하나 우열을 가리기 힘든 인간의 본증적 욕망과 도덕적 타락을 상징하고 있다. 어떤 책이든 주인공은 늘 7대 죄악의 기로에서 고민하고, 어리석은 선택을 하며, 본능이라는 이름으로 자기를 변호하며 죽어간다(물론 깨닫는 주인공도 있다). 그리고 꼭 후회한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앞선 수많은 책 중, 서머싯 몸의 '인생의 베일'이 직관적으로 오답에 대한 결과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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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미싯 몸의 '인생의 베일(1925년)'은 출세길이 막힌 아버지를 대신해서 딸 둘을 좋은 집에 시집보내고 싶은 어머니가 그중 첫째 딸인 주인공 '키티'를 사교무대에 데뷔시키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인공 키티는 자신의 여동생 도리스보다 이쁘다. 그래서 어머니가 티티에 거는 기대는 자신의 무능한 남편에게 거는 기대와 비견할 정도였다. 그러나 몇 해가 바뀜에도 '키티'는 자신의 베필을 찾지 못한다. 반면, 자신의 언니보다 더 늦게 사교무대에 데뷔한 도리스는 첫 해에 부유한 의사와 결혼하는 결실을 맺는다. 키티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그의 동생 도리스의 젊음을 가지지는 못했다. 예전에는 20살 대의 청년들이 청혼했다면, 이제는 40대의 기혼남들이 청혼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녀의 어머니도 슬슬 키티가 평생 결혼도 못하고 자신들 밑에서 기거할 까봐 두려웠다. 어머니는 은근히 키티에게 압박을 넣으며 그녀가 결혼하도록 닦달했다. 그러다, 어느 모임에서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 세균학자 '월터 페인'을 만나고, 그가 청혼하자 떠밀리듯 결혼 후(동생 도리스보다 더 먼저 결혼하기 위해 급하게 결혼) 그가 근무하고 있는 중국으로 떠났다. 월터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래서 그녀의 분에 넘치는 사랑과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독이 됐을까? 그녀는 그런 그에게 빠르게 질리기 시작했다. 키티의 질림이 절정에 이를 때, 꿈과 야망이 있고 더없이 매력적인 남성 '찰스 타운센드'가 그녀의 눈에 들어온다. 찰스는 유능하며, 식민지의 차기 총독으로서 입지가 굳건했으며, 월터에 비해 모든 면에서 매력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그녀가 빠져들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물론, 그는 '도로시'라는 아내와 영국으로 유학을 준비 중인 아들이 두 명 있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찰스 역시 그녀의 젊음과 매력에 흠뻑 빠져 일주일에 한 번씩 그녀를 안았다. 그리고 그들의 부적절한 관계가 1년이 넘었을 때, 월터에게 들키고 만다. 월터는 그녀에게 선택지를 준다. 자신을 따라 콜레라가 창궐한 '메이탄 푸(중국의 외딴 마을)'에 가거나, 아니면 찰스에게 현재 아내와 헤어지고 1주일 안으로 키티와 결혼하겠다는 동의서를 가져오라고 말이다. 그녀는 찰스와 자신과의 관계에 자신 있었다. 월터의 말이 끝나자마자 찰스에게 달려갔으나, 찰스는 자신의 아내를 버릴 수 없으니 이혼할 수 없고, 콜레라 지역은 날 것만 먹지 않으면 되니까 죽을 일이 없다는 대답으로 이 사건을 회피했다. 찰스의 변심에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월터를 따라 메이탄푸로 향했다.
그곳의 생활은 단조로웠다. 월터는 매일 오전에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고, 집에서도 실험에 몰두하며 키티와는 거리를 뒀으며, 키티 역시 콜레라가 창궐한 동네를 마음 놓고 돌아다닐 수 없으니 집에서 책이나 볼 뿐이었다. 그때, 그곳의 관리인 워딩턴을 통해 키티는 수도원에서 병자를 치료하고, 고아를 돌보는 수녀들을 만나 그들의 희생을 묵도하고 자신의 무가치한 삶을 반성한다. 그리고 그녀들처럼 가치 있는 삶을 위해 매일 같이 수녀원에 나가 봉사했다. 날이 지날 수 록 키티가 자신의 삶의 의미에 대해 알아가고 있을 때, 그녀는 또 한 번의 변화를 겪는데 바로 임신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월터는 그녀에게 물었다. 자신의 아이냐고, 키티 입장에서는 충분히 거짓말을 할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그에게 '모른다'라고 답했다. 그리고 며칠 뒤, 월터는 콜레라에 감염되어 죽었다. 키티는 병상에 누운 그 앞에서 자신을 용서해 줄 수 없는지 묻는다. 그러나 그는 유언으로 '죽은 건 개였어'라는 짧은 탄식을 남긴 채, 조용히 숨을 거뒀다. 월터가 죽고, 키티는 다시 자신이 있던 곳으로 넘어왔다. 더 이상 그녀가 그곳에 머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돌아오자 영웅의 아내가 되어있었고, 찰스의 아내 도로시로부터 자신의 집에 머물러 달라는 요청을 받아 마땅히 거절할 이유가 없기에 찰스 부부와 불편한 동거를 시작했다. 물론, 찰스의 아내 도로시는 자신의 남편과 키티가 부적절한 관계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한 행동이었다. 찰스도 아내의 요청에 반박할 수 없기 때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동거가 시작하고 몇 주가 지나고, 찰스와 키티 둘 만 남게 되었을 때, 찰스는 다시 키티에게 추파를 던지고, 키티는 악을 쓰며 그에게 대항하지만 결국 그에게 무너져 안기게 된다. 키티는 자신의 부정함에 절규하고 후회 사며, 그 일이 있고 3일 뒤에 중국을 떠나 영국으로 돌아가며 소설은 막을 내린다(내용 말미에는 그녀와 그의 아버지에 대한 내용이 있지만, 여기서 끝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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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티의 오답, '색욕'. 키티는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월터의 마음을 끝까지 몰랐다. 작중에 월터가 죽었음에도 그와 같이 일하던 '대령'이 눈물을 훔칠 때에도 자신은 눈물이 나지 않음에 화가 났다고 서술되어 있다. 키티가 월터를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용서를 구했을지언정 그녀의 마음속에는 그에 대한 진심은 단 한 켠에도 마련돼있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는 찰스와 부적절한 관계가 파행으로 맞이했음에도, 그에게 다시 굴복했다. 그녀가 그토록 깨달았다고 울 부 졌던 것은 모두 거짓에 불과하는 대목이다. 그녀의 오답은 평생의 숙명이고, 바뀌지 않을 것이다. 물론 작품은 키티의 후회와 반성 그리고 새로운 삶이라는 거대한 기둥을 토대로 쓰였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 소설이 더 진행되었다면 그녀는 또 다른 다른 부정을 저지르고도 남았을 인물이다.
월터의 오답, "분노". 그는 키티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녀의 외도에 그가 가졌던 사랑은 분노로 바뀌고, 그 분노는 오직 그녀를 파멸의 구렁텅이 빠트릴 생각뿐이었다. 결국, 그는 그녀를 사지로 데리고 간다. 그녀가 콜레라로 죽어버리기를 소원하며, 방치했다. 하지만 그는 인간이었다. 일말의 측은지심으로 작중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를 아이를 임신한 그녀를 위해 그곳에서 벗어날 면죄부를 주었다. 물론, 그녀가 거부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분노를 넘어서지 못했다. 키티와 그의 조수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가 자신의 몸을 실험체로 세균을 주입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직접적으로 '자살'이라고 언급되지는 않지만, 월터는 그녀의 몸에 다른 이의 생명이 자란다는 사실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을 사지로 내몰아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던 것이다. 그 와중에 그녀가 용서를 구했음에도 용서하지 않았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 '죽은 건 개였어'라는 뜻 모를 말만 남기며 철저히 그녀를 외면하는 모습을 보였다. '죽은 건 개였어'라는 대사는 '올리버 골드스미스'의 시 '장님 거지'에서 따온 구절로 해당 시는 어떤 선량한 사람이 친해진 개(광견병)가 있는데, 선량한 사람이 그 개와 놀다가 물리자 주변의 사람들이 놀라 그 개를 죽였고, 개에 물린 선량한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살았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월터는 처음에 자신은 개(부정)에 물리는 선량한 사람(긍정)인 줄 알았지만, 분노의 노예로 죽어가는 자신에 빗대자 '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결국, '착한 사람'은 죽어가는 자신 앞에서 진심으로 깨달은(척) '키티'였음을 내포했다. 그는 죽었다. 열렬히 사랑한 죄 밖에 없는 그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그가 처한 상황을 미뤄, 그의 분노는 자연스러운 정답에 가깝지도 모르겠지만, 그가 죽었기 때문에 삶의 관점에서는 오답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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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싯 몸의 다른 소설 '인간의 굴레에서'의 주인공 필립 캐리는 삷 전반에서 밀드러드라는 인물에게 이용만 당한다. 그럼에도 필립은 그녀와 관해서는 계속 오답을 남발했으며, 그 악연의 고리는 밀드러드가 파멸에 이르러서야 끊어낼 수 있었다. 만약, 작중에 밀드러드가 파멸하지 않고, 그를 계속 이용했다면 책의 결말은 달라졌을 것이다. 어쩌면, 서머싯 몸은 자신의 소설 속 주인공들을 통해 오답임을 알면서도, 선택할 수밖에 없겠금 설계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역설을 설명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두 주인공은 각자의 오답을 극복한 것처럼 표현하기는 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