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 남자의 집에 방문한 것은 순전히 우연이다. 며칠 전 늦은 밤, 그 남자는 차도와 거리의 경계선 사이 생과 사의 기로에 서서 위태롭게 비틀거리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다가가자 그는 꺼지라는 듯 손사래를 칠 뿐, 말도 거의 하지 못한 채 오직 사의 기로에 시선을 던졌다. 나는 그의 무의미한 헛손질을 무시하고 그의 허리를 꽉 잡아 살아가는 자들의 거리로 이끌었다. 그는 약간의 신음과 함께 거리에 쓰러진 채로 나를 노렸봤다. 아까의 공허한 시선은 이제 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애써 그의 시선을 무시하고 그를 부축하려 오른팔을 그의 허리에, 왼팔은 그의 왼쪽 어깨를 감쌌다. 가까이 마주한 그의 검붉은 얼굴에는 세월의 나이테가 멋대로 자라 있다. 그는 여전히 나를 노려봤지만, 맥없는 초점이 내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는 최대한 다정한 말을 내뱉으며 그를 달래 의자에 앉혔다. 그는 의자에 앉자마자 깊은 잠에라도 빠져든 듯이 얼굴이며 어깨며 모두 떨구곤 가볍게 몸을 떨었다. 추운 날씨에 그가 동사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 재빨리 휴대전화를 들어 경찰에 신고하려 했으나, 어떻게 알았는지 그가 얼굴을 높게 쳐들고 내 팔을 잡으며 "경찰은 안 돼"라고 하더니, 의자에서 고꾸라지며 쓰러졌다. 넘어진 그를 부둥켜안고는 다시 의자에 앉혔지만, 이제는 완전히 정신을 놓아버린 그를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그에게 어떤 사정이 있으니, 마지막 힘을 짜내어 내게 부탁했으리라 짐작하고 그를 존중하기로 했다. 그의 겉옷과 속주머니 그리고 바지주머니를 뒤져 신분증을 찾아 주소는 알 수 있었다. 다행히 이곳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그를 옆으로 안은 채로 질질 끌다시피 해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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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이 조금 넘어 보이는 키에 깡마른 체구라 다행히 무겁지는 않았다. 아까는 몰랐는데, 그가 내뱉는 숨에서 역한 취기가 올라왔다. 그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1시간도 넘었고, 온몸에는 땀이 흥건했다. 필시, 이대로 집에 갔다가는 감기에 걸릴 것이 뻔했다. 괜히 남의 일에 나선 것은 아닐까 하는 책망이 들자 얼굴이 잔뜩 찌푸린 채, 크게 쉼 호흡을 한 번 하고 문 앞에 그를 앉힌 뒤,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살고 있으면 어쩐다 하는 걱정으로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하지만 반응이 없다. 답답한 마음에 조금 더 세게 두드렸다. 전역 시 반응이 없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문을 있는 힘 껏 크게 두드렸다. 그래도 반응이 없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그 남자 옆에 나도 앉았다. 그는 얄밉게도 푹 자는 듯이 보였다. 그의 코를 한 대 쥐어박고 싶은 기분은 억누르고, 왜 바보같이 남을 도울 생각을 한 1시간 전의 나를 이제는 원망하기까지 했다. 그때, 그 옆집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문이 서서히 열렸다. 나는 열리는 옆 집 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 가만히 숨죽였다. 아주머니가 잠 옷차림에 분홍색 카디건을 걸치고는 문을 조금 열어 머리만 내밀고 나와 그를 번갈아 마주쳤다. 나는 재빨리 일어나, 아주머니께 이 남자를 아는지 물었다.
"알지, 옆집 아저씨인데, 또 술을 많이 잡수셨나 보네".
나는 짧은 탄성이 나왔다. 우선, 내가 온 집이 목적지라는 안도의 탄성이었고, 또 내가 곧 집으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해방감의 탄성이었다. 아주머니는 대충 상황을 이해하셨는지 문을 아예 열고는 밖으로 나오며, 집 옆에 방수기 함을 열어보라고 내게 말했다. 나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방수기함을 열어 열쇠를 하나 얻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그의 집 열쇠구멍에 밀어 넣자 꼭 맞아떨어졌다. 아주머니에게 감사하다는 말은 10번은 했을 것이다. 아주머니는 내 감사 표시에 얼굴이 벌게진 채로 부끄러워하셨지만, 속으로는 좋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제는 그를 다시 둘러메고 거실 아무 데나 그를 떨군 뒤에 그곳을 빠져나갔다. 그때까지 그는 여전히 잠이 든 채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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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 다른 일정이 있어서 그 남자가 살던 동네에 들렸는데, 편의점 앞에 서있던 나를 그가 알아보고는 먼저 내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선생님, 지난번에 취해있던 저를 집으로 옮겨주신 분 맞으시지요?"
그때에는 어두워서 잘 몰랐지만, 밝은 데서 보니 그의 얼굴색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 그가 갑작스럽게 인사하는 통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기는 했지만 최대한 친절히 답변했다. 그러자 그가 멋쩍게 머리를 긁적거리고는 내게 할 말이 있는 사람인 양 서서 입술을 씰룩거렸다. 나는 이런 어색한 시간이 싫은 나머지 그와 헤어질 요량으로 적당한 인사말을 찾고 있었는데, 그의 입이 드디어 열리더니 내게 말했다.
"저기 선생님, 일전의 일도 있고 하니, 실례가 되지 않으면 제 집에서 차나 한 잔 하시겠어요?"
그의 제안은 뜻 밖이었다. 술에 취했을 때에는 안하무인의 독불장군처럼 행동하더니, 지금은 완전히 딴판이었다. 나는 얼떨결에 그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고, 지금 막 그의 집에 도착한 참이다. 그의 집에 들어가자, 거실에는 큰 유화그림(80인치 벽걸이 TV 정도의 크기였다)이 걸려있고, 그 아래 이젤과 캔버스 그리고 물감이 덕지덕지 뭍은 팔레트가 바닥에 있다. 그리고 코를 찌르는 듯 한 기름 냄새는 정신을 빼앗가 가 버릴 정도다. 그는 나를 나를 거실 소파로 안내했고, 자신은 차를 끓이러 주방으로 향한다. 나는 다시 일어나 그가 그린 그림을 유심히 살핀다. 물론, 나는 그림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그저 눈으로 보는 것이 끝이지만 말이다. 그때, 그가 뒤에서 내게 말을 건넨다.
"그림 어떤 것 같아요?"
그의 말에 놀라 뒤를 보자, 가녀린 팔로 흔들거리며 커피잔을 양손에 들고 있다. 나는 얼른 그에게 내 몫의 커피를 받아 들고 다시 자리에 앉으며, 간단한 칭찬 몇 마디를 했다. 그가 내게 물은 그림은 웬 남자의 초상화였다. 하지만 그는 아니었다. 초상화 속 남자는 좀 더 키가 크고 덩치가 있어 보였으며 미형에다가 결정적으로 얼굴이 희고 고았다 나는 그 초상화가 어느 유명한 작각의 그림일 것이라고만 생각했기에 누가 그렸는지 그에게 묻자 그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땅을 바라보며 자신이 그렸노라고 답한다. 나는 그에게 깜짝 놀란투로, 당연히 유명화가가 그린 줄 알았다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사실 그 그림을 누가 그리던 나에게는 흥밋거리가 아니었다. 나의 반색에 그도 흡족했는지 까무잡잡한 얼굴을 최대한 붉히며 내게 고맙다고 답했다. 그의 대답을 끝으로 어색한 침묵만이 감돈다. 다시 찾아온 어색함이 달갑지 않은 나는 그림 속 남자에 대해 물었다, 이번에도 그의 표정이 굳어지며 땅을 바라봤지만 쉽사리 입을 떨어트리지는 않는다. 나는 무언가 큰 실수라도 한 줄 알고, 눈을 굴리며 다른 주제를 찾고 있을 때, 이번에도 그가 입을 떼며 답한다.
"접니다"
그의 대답에 놀랐다. 누가 봐도 닮은 구석이 없는 그림 속 잘생긴 청년과 내 앞에 까무잡잡하고 호리호리한 사람이 같은 인물이라니 말이다.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초상화 속 사람과 그가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하니, 내가 그림 속 주인공을 물었을 때 어째서 당황했는지 대충은 알 것 같았다. 어쩌면, 나를 보고 무례한 사람이라고 느낄 수도 있겠다. 나는 재빨리 이 가녀린 남자를 달랠 만한 말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쉽지 않다. 공기는 더 어색해지고 있다. 이제는 이마에서 땀까지 나기 시작한다. 그때, 그가 유쾌한 듯 웃으며 말을 더한다.
"선생님, 괜찮습니다. 제 어릴 적 모습입니다. 지금은 작고 초라한 노인이지만 어렸을 적에는 저도 꽤 잘 나가는 화가였습니다. 지금은 은퇴하고 소일거리로 그리고 있지만 말이지요. 아 그렇지 않아도 제가 선생님께 차를 마시자고 한 이유는 선물을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갑자기 방으로 들어가더니 액자를 하나 가지고 나오며 말한다.
"사실, 그날 조금 괴로운 일이 있어서 술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그냥 죽을 작정이었지요. 그때 선생님이 저를 살려주셨어요. 제가 기억나는 건 딱 거기까지입니다. 제가 도로에 넘어지고부터는 이상하게 기억이 안 나더라고요".
내가 그의 말을 끊고 '경찰서에 연락하지 말아 달라'라고 했던 내용은 기억하느냐 물었다.
"기억은 안 나지만, 왜 그랬을지는 알겠네요"
그의 표정이 씁쓸해지며 다시 입을 연다.
"제게는 아들과 딸이 하나씩 있습니다. 선생님도 눈치채셨겠지만, 지금은 같이 살지 않고요. 왕래도 전혀 없습니다. 저는 그 아이들에게 나쁜 아버지였습니다. 젊었을 적, 그림에 미쳤습니다. 다행히 그만한 성과도 나왔고요. 돈도 많이 벌었고, 명예도 얻었지요. 예의 그런 사람들의 말로는 뻔하지 않겠습니까? 술과 여자, 도박으로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가족에게는 등한시했습니다. 결국 애들 엄마는 병에 걸려 죽고, 아이들 마저 저를 원망하며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그 일이 있던 지가 벌써 20년도 더 됐습니다. 제가 경찰서에 가게 된다면 분명, 제 아이들에게 연락이 닿아 귀찮게 했을게 뻔합니다. 아마, 저는 술기운에서라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했나 봅니다"
말을 마친 그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지만, 내용을 들어보면 모두 그가 초래한 일이기에 딱히 동정이 들지는 않았다. 나는 적당히 호응해 주고는 그에게서 그림을 받아 집을 나선 뒤 문 앞에서 그와 인사했다. 문이 닫히기 전, 그의 어린 시절이 담긴 초상화와 지금의 얼굴이 동시에 보인다. 나는 멀뚱히 서있는 그의 모습 속에서 지난날의 영광을 잊지 못하는 그 추레한 늙은이를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