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둘러 가서 먼길 - 질러가서 가까운 지름길
독일에 와서 일하게 되며 새롭게 발견하게 된 좋은것 중의 하나가 골프다. 한국 사람들에게 "독일" 이라는 이미지는 뭔가 막연한 유럽의 선진국에 대한 동경을 상징하는지, 독일에서 일하고 있다라고 하면 뭔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전에 근무하던 러시아가 엄연한 사계절이 있는 나라이지만, 늘 추운 겨울과 보드카와 불곰이 떠오르는 것과 비슷하게, 독일이라면 뭔가 정확하고 정돈되어 있고 안정적인 유럽의 삶을 떠올리게 하는가 보다. 하지만 막상 독일이라는 곳은 정말 심심하고 느린곳이다. 거의 일상의 모든것이 답답한곳이고, 보수적인 부분이 많아서 새롭게 사업을 일으켜야 하는 기업의 입장에서는 난감한 상황이 많이 발생한다. 모든것이 한국 보다 멀고, 이용하기가 불편하지만 몇가지 접근성이 좋은것이 있다면 그것은 축구장과 골프장이다. 동네마다 잔디 축구장이 있고, 외각에 나가면 골프장이 있다. 이곳에서의 골프장은 한국의 강변에 생활체육시설의 느낌이 있어서,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왔거나, 조깅을 하고 있는 동네 주민들을 만날 수 있을 정도이다. 카트가 있긴하나, 정말 나이 드신분들 아니면 대부분 본인의 트롤리를 끌고 다니고, 복장도 기능에 충실한 그런 옷들이다. 한국에서 골프를 즐기지 않았던 나는 잘 느끼지 못했지만, 한국에서 라운딩을 하셨던 분들의 증언에 따르면 정말 다른 문화라고 한다. 집에서 차를 타고 30분 밖에 걸리지 않고, 아주 비싸지 않은 연간회원권이 있으면, 무제한으로 즐길 수가 있고, 내가 잃어버리는 공을 제외하고서는 라운딩에 따로 돈이 들어가지 않고, 동료들과 함께 어울려 널찍한 자연을 즐길 수 있으니 - 뒷땅을 때려서 잔디를 파괴하는 나를 보며 수시로 찾아오는 자괴감만 이겨낼 수 있다면.. 이것은 독일에서 누릴수 있는 호사가 아닐수 없다.
몇번인가 골프 관련된 동영상을 찾아본이후로 골프라는 키워드가 유튭 알고리즘에 입력되었는지, 켤 때마다 관련된 영상이 자동으로 상위에 올라오기 시작한다. 상위에 올라오는 영상들의 특징을 보면.. 골프 잘치고 싶다면 무조건 따라하세요. 이것만 알아도 싱글은 칩니다. 클럽스피드를 올리는 4가지 비결, 그립은 이렇게 잡는겁니다. 안 그러면 망해요... 10분 남짓한 동영상을 보다 보면, 금방 고수가 될 수 있는것만 같다. 보통 3~4 가지의 간단한 연습 드릴로 되어 있는걸 몇일 연습하고 나면 이번에는 뭔가 될 것같은 자신감이 차오르는데, 막상 토요일 아침에 첫 티샷을 하고 나면 바로 현실을 자각하게 되는 숭고한 그 시간이 찾아온다. 나무와 풀숲 사이에서 이리 저리 뛰어다니며, 공을 살며시 집어 들어 빼 내고 싶은 유혹을 참아내며,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을 같이온 동료들을 바라보며 견디고 나면 어느새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아, 역시 골프에는 왕도가 없구나.
그래도 작년에 처음 시작했을때 도통 맞출수 조차 없었던 몇몇 채들이 조금씩 맞아 가고 있고, 일부러 치기 전에 잃어버려도 되는 공이 어떤 것인지 골라서 올려 놓을 필요가 없어지고 있다. 나름대로 거금을 들여 선생님에게 배웠던 그 노력이, 매주 빼먹지 않고 연습장에서 흘렸던 땀이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골프 근육을 만들어 낸 결과겠지. 하지만 정말 더디고 더디게.. 자세히 보면 움직이는지 조차 알 수 없는 개미들의 행렬처럼 앞으로 가는 지금의 속도를 보면 앞으로 부끄럽지 않게 치려면 아직 한참 남아 있을 시간이 아득하다.
간단하고 빠른것이 미덕이 된 시대인가. 지름길을 마다하는 바보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지름길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바보가 되기 쉬운 요즘이다. 예전에 개그콘서트에서 어떤 개그맨의 코너가 떠오른다. 세세한 소재와 내용이 모두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충 뭐든지 그까이꺼 대충 뭐뭐 하면 다 되는거 아니냐고. 거대한 목표를 말도 안되는 간단한 방법으로 그까이꺼 대충 그냥 설렁 설렁 하다보면 아무나 할 수 있다는 그 단순함과 억지스러운 인과관계를 보며 웃어 넘기곤 했는데... 점점 개그가 개그가 아닌 현실이 되고 있는것 같다. 산꼭대기에서 바라보면 간단하고 단순해 보이기 그지 없다. 그냥 장난감 같은 건물들과 자동차와 개미 같아 보이는 사람들. 한 뼘도 안되는 거리를 내려다 보고 있노라면 여기에서 저기까지 가는건 짐짓 간단해 보인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그 아래로 내려가서 한 걸음을 내딛는것 보다 위에서 바라보며 누리는 전지전능한 작가적 시점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성공하는 것은 매우 쉬워 보인다. 7가지로 정리된 수많은 책들과, 10분이면 볼 수 있는 유튭 컨텐츠들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성공의 길이 있다고 말한다. 찾아서 보면 꼭 그럴법한 맞는 말 들이다. 하지만 이는 필요조건일뿐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는 어디에 적혀 있는 것인지. 좋은 입지 조건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어느 광고 구석에 거의 보이지도 않는 글자로 적혀 있는 "수익율을 보장하지 않으며, 투자 손실에 대한 책임은 개인에게 있습니다" 라는 최소한의 예의 조차도 생략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쉽고 간단한 것은 없다.... 라고 단언하기에는 아직 이르지만... 쉽고 간단한것은 없다 라고 믿고 싶다. 만약 쉽고 간단했다면 미련하게 버텨온 내 지난 시간들이 너무 서글퍼지기 때문이다. 애매모호한 지금의 내 커리어와 위치가 성공한 그 사람과 비교할때 초라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쉽고 간단하게 할 수 있는 그 3가지 비결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허공으로 날아가 버린 나의 더 찬란했을 미래가 아쉽기 때문이다. 나의 하루들은 늘 아슬 아슬 하고 위태로워서 늘 간신히 겨우 긍정하며 마무리 할 수 있는데, 한모금의 한숨이 더 해진다면 긍정은 부정으로 추억은 후회로 쌓여갈것만 같은 두려움이다.
하지만 두려워 해서 무엇하리. 지나간 길은 이미 와버린 길이다. 지름길로 왔던 둘러서 왔던 지금 나는 여기에 서 있고, 아직 끝에 도착한것은 아니다. 사실, 어디로 언제까지 가야 하는지도 알 수 없는 우리 인생이니 지름길로 왔다고 자랑할것도 아니고, 에움길로 왔다고 후회할 것도 아니다. 눈 앞에 보이는 길로 하루 하루를 걸어갈 뿐이다.
올해는 회사 동료들과 또 다른 친구들과 주말 라운딩을 위한 정기 모임을 벌써 두개나 시작했다. 한달에 첫주는 친구들과, 나머지 주간은 동료들과 함께 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나니 뭔가 마음이 든든하다. (매주 마다 라운딩을 갈 수 있도록 허락해준 아내에게 고맙다 ㅎㅎ) 광고를 보니 스윙 연습을 분석해주는 새로운 장비들도 제품화되어서 나오고 있는 것 같던데, 가격을 보니 너무 비싼것 같다. 얼마전에 구독을 시작한 00 프로의 동영상을 보며 매일 같이 연습하리라 다짐해 본다. 긴 인생길의 목표를 정하는 것은 너무 심오하고 어려우니, 우선 올해 골프 목표를 정해본다. 충분하고 차분하게 연습하며 욕심내지 말아야 겠으나, 빨리 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도 좋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