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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출내기 Apr 05. 2022

보고서 ver.10

 생활속의 달인 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정말 수 많은 일상 속에 여러 형태의 숨어 있는 고수들이 있음을 보게 된다. 달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한가지 일을 수십년 동안 꾸준하게 반복해 왔다는것, 그리고 달인이 너무 쉽게 해 내는 그 일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엄두를 낼 수 조차 없는 수준이 된다는 것, 그리고 그 고도로 응축되고, 숙련된 한가지 일은 결국 그 사람의 평생을 책임지고 있다는 것이다. 회사 속에서도 수 많은 달인들을 만나게 된다. TV 프로그램에 소개될 수 있을 정도로 그 스킬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한 직장에서 수십년을 버티고 있는 모든 직장인들에게는 결국 남들과는 다른 그 어떤 기술이 숨어 있는것이다. 정말 신기한 것은, 직장인의 기술은 그 자체로 하나의 직접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이 태반이라는 것이다. 연말이 되면 기가 막히게 회사 內 안테나를 동원하여 조직 변동의 낌새를 미리 알아차리고 고급정보를 흘려주는 기술, 경영진의 머릿속에 들어 갔다 나온것 처럼 그가 원하는 결과물을 콕콕 짚어주는 기술, 조선시대 실록의 한문장으로 대하 드라마를 만들었다는 사극의 어느 작가처럼 경영진의 지시사항 하나로 조직의 전략적 비전을 멋지게 만드는 기술. 결국 거대한 조직 안에 속해 있지 않다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그 일들이 각각 모여서 큰 성과를 만들어 나가는 것을 보다보면 때로는 신기하기도 하고, 결국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나의 겸손한 역할에 보람없음을 절감하기도 한다.  


  외국인 직원들과 함께 일하다 보면, 본사에서 파견된 한국인들만이 유일하게 해 낼 수 있는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보고서를 쓰는 일이다. 회사 안에서 사용되는 보고서는 일견 매우 간단해 보인다. 위에 큼지막하게 한두줄로 요약이 되어 있고, 아래에는 보통 간단한 표와 일정표 등등 내용이 들어간다. 종종 드라마에서 보여지는 멋지고 화려한 그림과 애니메이션, 프리젠테이션 스킬이 사용되는 경우는, 글쎄 나는 아직까지 한번도 본적은 없다. 보고서가 많다는 주니어들의 컴플레인 덕분에 보고서는 "1장" 으로 "양식이 아닌 내용이 중요" 한 것으로 조직문화 개선 대상의 1순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늘상 해결되지 않는 희대의 난제이다. 간단해 보이는 보고서는 어찌하여 본사 파견 한국인 직원의 전문적인 영역이 되어 버렸을까? 


생산해 내야 할 보고서가 늘상 쌓여가는 회사 업무 중에 시간을 내어 새로 채용한 외국인 직원에게 천천히 그가 만들어내야 할 보고서에 대해서 설명을 해 본다. 불필요한 형용사는 빼라. 핵심만 간단하게 요약해라. 단순히 사실만 나열하지 말고, 본인의 의견을 넣어라.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논리적인 설명을 넣어라. 각 이해관계자의 구조를 그림으로 표현해라. 표를 만들어서 여러 중요한 사실들을 요약해라. 모르는 용어나 기업이 나오면 별도로 주석을 달아서 설명해라. 1장으로 만들더라도 앞쪽 메인 장표에 넣을 수 없는 부분은 첨부 장표로 넣어라. 숫자가 들어간 정량적 관점의 분석 내용을 추가해라. 다른 조직에 공격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문구는 빼라. 색깔은 너무 다양하게 사용하지 마라. 설명 내용이 5가지를 넘어가기 시작하면 외국인 직원의 당황함이 느껴진다. 적극적인 직원이라면 Why 라고 반문하고, 소극적인 직원이라면 부모님 잔소리를 듣는 아이처럼 언제끝나나 이 잔소리는 하는 표정을 하게 된다.  역시 보고서는 내가 쓸 수 밖에 없구나. 외국인 직원들은 너무 단순해서 역시 한계야. 또 다른 한국인 직원이 필요한데, 왜 본사는 자꾸 현지화를 하라고 하는지... 생각 보다 포기의 순간은 빨리 찾아오고 결국 현지직원들에게는 첨부 장표에 들어갈 수 있는 Fact 를 찾아 오는 정도의 일만 맡기게 된다.


  회사에서 쓰는 여러 용어중에서 "보고를 올린다" 는 말이 있다. 그리고 경영진의 지시 사항은 항상 "내려온다"  사극에서나 쓰일법한 이 말들이 자연스럽게 쓰여지는 것을 보면, 도대체 왜 보고서가 이리 복잡한지 이해하게 된다. 온 지방 곳곳, 방방곡곡의 여러 상황들을 저 위에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 현장에 속해 있는 사람에게는 너무 당연한 일들이, 그래서 너무나 명확한 의사결정의 방향이 저 위로 올라가며, 활자와 그림이 되어 보고서가 되면서 별도로 설명해야 하는 내용이 되고, 수치로 증명해야 하는 일이 되고, 다른것과 비교해야 하고, 간단하게 이해시킬 수 있는 내용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모든 의사결정은 이미 보고서를 작성하는 사람의 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가 어떤 심중의 의사결정을 이미 가지고, 논리적 설명의 방향성을 만들고, 필요한 수치를 선별해서 논리를 강화해서 전혀 그 사실을 모르는 윗사람이 보아도 충분히 납득이 될 만한 내용이 보고서에 담겨야 하는 것이다. 저 위에서는 보고서의 내용을 보고, 의사결정 자체가 아닌 이미 결정 내려진 그 사실을 본인이 이해하고 있는 사실과 상식에 따라 "재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보고서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를 설명하다보면, 그건 외국 직원의 관점에서 나보다 훨씬 돈도 많이 받고, 경영의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경영진" 이 해야 할일이지, 한낱 직원이 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는 일이 되는 것이다. 잘 돌아 갔다. 한국의 기업은 그렇게 잘 돌아 갔고, 지금도 잘 돌아 가고 있다. 인사이트를 가지고 있는, 경쟁의 환경 자체를 바꿀 수 있는 네트워크를 가진 경영자의 한마디와 그 한마디를 체계적으로 설명해 내고, 큰 조직의 과업으로 분리해 낼 수 있는 관리자에 의해. 그리고 위에서 내려온 일이라면 어쨌든 해 내고야 마는 수많은 직원들의 노고로 인해. 잔업 수당 없는 수많은 초과 근무와 거의 가족과도 같이 뭉쳐진 회사 네트워크는 이렇게 유기적으로 움직여 나가며 글로벌한 성과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기술적 용어들이 쏟아지고 있다. 새로운 사업 모델이 넘쳐나고, 각 개인이 생산자로서, 소비자로서 직접 비즈니스 전면에 등장한다. 글로벌 머니는 새로운 투자처를 찾아 24시간 날아다니고, 어제 생긴 기업이 100년 역사를 넘는 기업을 금방 추월한다. 유니콘들이 날아 다니는 그야말로 판타지 세계에 나올법한 시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대변혁의 시대에 공룡은 멸종될 수 밖에 없다. 거대한 덩치에 맞는 무수한 감각기관과 마음만 먹으면 한 걸음으로 앞서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대변혁의 시대에 거대한 덩치는 오히려 장애물이 된다. 단순하고 잘 정리된 보고서가 만들어 지는 과정에서 버려진 그 수많은 Facts 들 속에 미래사업을 위한 Key들이 숨어 있지만 경영자는 결코 그것을 찾아낼 수 없다. 중간관리자들이 만들어 놓은 손쉬운 의사결정에 길들여진 경영진은 새로운 사업을 위해 필연적인 "리스크" 가 있는 의사결정을 할 수가 없다. 유능한 직원은 독자적인 생존을 향해 독립해 나갈것이고, 부가가치 생산 보다는 소비에 익숙한 직원들과 내부 조직들만 비대해질 것이다. 경영진은  위기상황 속에서 또 보고서를 찾는다. 이 위기를 해쳐나갈 만한 제갈공명의 비책을 담은 보고서는 어디 있는지? 제갈공명의 비책도 결국 그것을 이해했고 실행했기 때문에 효력이 있었으리라. 


  회사안에는 수많은 보고서의 달인이 있지만, 이제 보고서의 달인은 점점 뒤로 물러나야 하는 때가 된것 같다. 경영자 스스로가 끊임없는 공부와 노력으로 달인이 되고, 누구보다도 전문적인 실력과 시장에 대한 인사이트를 바탕으로 의사결정을 내리고, 많은 조직내 다른 사람들은 신속한 Facts 전달과 실행으로 역동적인 비즈니스 모델의 구동을 돕는다. 경영자가 접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네트워크와 정보를 바탕으로 혼란스러운 세계 속에서 길을 찾는다. 집단지성의 시대에서 도출된 수없이 많은 파편화된 BIG DATA 를 억지로 요약하거나 정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그 모습에서 의미를 찾아낸다. 언제나 존재해 왔던 유능한 직원의 아이디어를 완전한 보고서로 정리하라고 종용하는 것이 아닌 필요한 자원과 조직을 신속하게 공급해서 작은 싹을 우선 틔워내고, 그중에 고르고 골라서 미래의 나무를 키워낼 수 있지 않을까? (많은 대기업들이 나름대로의 인큐베이팅 시스템을 운영하고는 있으나, 결코 의미있는 수준의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는것 같지는 않다. 인큐베이팅의 결과물로 결국 보고서가 되며 특색을 잃고, 타이밍을 놓친다) 그렇게 태어난 명품 서비스가 결국 끝까지 살아남아 외부의 소비자와 내부 직원들의 만족을 이끌어 낼 수 있지 않을까? 


오늘도 하루종일 안구건조증이 찾아온 눈을 비벼 가며, 마이크로소프트 파워포인트 창을 수십개 띄워놓고, ver 10 을 곧 넘어갈 보고서를 만들며 넋두리를 남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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