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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출내기 Apr 07. 2022

출장과 동물의 왕국

 해외에 근무하다보면 아무래도 출장을 가야 하는 일이 자주 생기게 된다. 회사에서 발급해 준 비행기표를 받아서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파트너를 만나고 새로운 음식을 먹고 깔끔한 호텔에서 묵을 수 있는 출장이 예전에는 설레고 즐거운 일 이었지만, 언젠가 부터 출장은 점점 귀찮고 피하고 싶은 일이 되었다. 새로운 것을 접하고 경험하는 것은 매 한가지 인데, 왜 이렇게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는지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한 두 해 쌓여가며 생긴 익숙함 때문이고, 예전과 다른 체력 때문이고, 연차가 쌓여가며 점점 늘어가는 출장을 통해 결과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회사는 여전히 출장을 직원에게 주는 혜택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고 싶어서 간 것도 아닌데, 편하게 사무실에 앉아 있는 그들은 왜 갔는지, 왜 이걸 먹었는지, 왜 이 사람을 만났는지, 왜 증빙이 부족한지 시시콜콜 괴롭히고, 결국 한뭉치의 해결되지 않은 영수증은 출장 기간동안 쌓인 이메일 처럼 서랍 한 구석에 쌓여간다. 

 지난주에도 그랬다. 갑작스럽게 내가 했던 일도 아니고 해야 할 일도 아니지만, 갑자기 무언가 해야 할 일이 떨어지고, 갑작스럽게 생겨난 일은 늘 그렇듯 이미 꼬일대로 한참 꼬여버린 더 이상 정상적인 업무가 아닌 터지기 직전의 문제거리 이다. 공항에 픽업을 나오기로 했던 직원은 한 술 더 떠서 코로나 양성 반응이 나왔다며 짐짓 예의바른 Regeret 과 Apolgy 를 전해 왔다. 다시 이동 수단을 부산하게 찾으며, 렌트카가 도착할때 까지 붕 떠 버린 시간에 공항 커피숖에 앉아 있는데, 문득 건너편 스크린에서 상영 되고 있는 동물의 왕국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식물에 대해서도 나왔으니 자연의 왕국이라고나 할까? 분명히 제목은 동물의 왕국이 아니었을것이다. 어렸을때, 보통 다른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채널 선택권이 막내인 나에게 까지 돌아오기 전에 늘상 TV 는 뉴스 아니면 동물의 왕국을 상영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동물과 자연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통 관심이 없었고, 나의 마음은 얼마 남지 않은 만화가 시작되기 전에 재미없는 그 프로그램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랬던 그 시절이 있었다. 그때의 그 동물의 왕국이 30년도 훨씬 지난 지금, 우연하게 어느 공항에서 나의 눈을 사로 잡은 것이다. 

 그랜드캐년을 연상 시키는 황량한 사막속의 깊게 패인 어딘가에서 머리에 동그랗고 억센 뿔을 가진 동물들이 뛰어올라서 온몸의 체중을 싣고 다른 한 마리를 공격하고, 뿔이 엉키고, 흙먼지가 일어난다. 사막에 그야 말로 주사바늘 같이 길고 날카로운 선인장이 족히 2m 는 되어 보이는 꼭대기에 조그만 꽃과 열매를 맺었는데, 낙타 같이 생긴 동물이 혀를 아슬아슬하게 먹어 치운다. 손가락 만한 도마뱀 수백 마리가 어느 계속의 너른 바위 에서 물보라 속에 날아 다니는 하루살이들을 향해 자기 몸 길이만큼 뛰어올라 한 입에 삼키고 꼬리를 지팡이 삼아 안전하게 다시 찾지한다. 거대한 나무가 파노라마로 새순이 돋고, 푸르게 풍성해지고, 색이 물들어 떨어지고, 앙상한 나뭇가지가 된다. 아무런 자막도, 출처도 없는 그 영상은 그저 고화질로, 줌인과 줌아웃을 반복하며 이 지구상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세계를 비춰주고 있을 뿐인데, 유독 그날은 그 풍경이 새롭고 놀라웠다.

 결국 나도 이 세계의 동물이다. 누군가 고화질로 내 삶을 비춰본다면 나도 그렇게 아슬 아슬하고 위험하게 싸우고 있을 것이고, 작은 목표를 향해 온힘을 다해 애쓰며 위태로울 것이고, 태어나서 피어났다가 늙어가고 사라지겠지. 이 세계에서 그 어떤 동물 하나가, 식물 하나가 사라져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은 무섭고, 허무한 일이기도 하지만, 삶의 고단함과 문제가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위안을 주는 일이다.  뉴스를 통해서는 온 세계의 다른 사람들이 당하고 벌이는 일들을 발견하게 되고, 동물의 왕국을 통해서는 이 지구의 인간이 아닌 다른 생물들이 당하고 벌이는 일들을 보게 되는 것이다. 어느새 나도 그것과 공감하고, 그것을 통해 위로 받는 동물이 된 것이다. 불멸을 바라고 이해하지만 언제가는 없어질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바로 그 내려놓음과 위로가 필요한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유럽의 작은 동네에는 오래된 집들이 많다. 대를 이어 가며 사는 사람들도 많고, 서로 서로 오고 가며 눈인사를 하며, 눈치 아닌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하는 전형적인 유럽의 마을이다. 거의 모든 집에는 큰 나무들이 있다. 짐짓 보아도 백년은 넘었을 큰 나무를 보며, 한번도 이런 큰 나무가 있었던 집에 살아본 적이 없었던, 집에서 나무를 심고 자라게 한다는 생각 조차 할 수 없었던 한국 아파트에서의 삶이 문득 서글퍼 진다. 당연히 노력하고, 애쓰고, 아슬아슬한 것이 살아있는 생물의 운명이건만 왜 이토록 나는 무리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뿔은 결국 두개이고, 뛰어오를 수 있는 높이는 내 몸 정도이고, 꼬리는 넘어지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 줄 수 있을뿐 인데. 내 유전자에 나의 노력을 뼈를 깍는 새겨서 좀더 진화된 후손의 삶을 준비해 주기 위함인가.

 급하게 생겨난 출장이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는것 처럼, 이미 문제가 되어 버린 일이 갑자기 역전되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는 없다. 협상은 지지부진 했고, 의사 결정하시는 분들은 본인들이 놓쳐버린 수 많은 기회들은 아랑곳하지 않은채 도무지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의아해 한다. 누군가는 귀찮은 일이 결국 벌어져 버리지 않은 것에 내심 안도하고, 누군가는 실패해 버린 일에 대해 실망하고 깊은 현자의 시간으로 들어간다. 

그래도 나는 하나 글감을 건졌다. 영수증과 피로는 또 쌓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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