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

by 신출내기

오래간만에 한국에 돌아와서 지내다 보니, 새삼 잘 발달된 상품과 서비스의 엄청난 양과 종류에 놀라게 된다. 한번쯤 머릿속으로 생각해 봤을 그것들이 모두 한자리에서 나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고, 혹 없는 것이 있다면 바로 다음날 새벽에 문 앞에 대령해 주는 놀라운 소비의 천국이다. 물욕이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듯 요새는 꼭 사용하고 나서 없는 것만 다시 사야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해외 학교 생활을 하다가 한국에 돌아온 아이들이 잘 적응하고 있다는 말에 마음이 놓인다. 좋은 성적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대견하고 기쁜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오르지만, 우리 아이들이 가진 잠재력을 과연 내가 물질적으로 잘 지원해 줄 수 있을지 걱정이 생긴다. 혹시라도 해외의 유명한 학교에 갈 수 있는 실력이 되는데 나의 경제적 부족함으로 제약이 생기는 것은 아닌지..


한국에 돌아와서 오래간만에 그동안 못 봤던 사람들을 만나보니, 온통 돈에 대한 이야기뿐이다. 학교 동창은 퇴직연금의 종류를 잘 구분 못하는 나를 타박하고, 동료직원 누군가는 집이 대치동에 있다고 하고, 어느 대학 동기는 사업이 제법 잘 되는지 외제차를 몰고 다니며 신수가 훤하다.

누군가는 아이들을 해외 대학에 보내고 나니 경제적으로 힘들다는 신세 한탄이다. 회사에서 받을 수 있는 급여는 빤 하고, 그렇다고 어디에 뭘 투자해 보기에는 돈도 없고 아는 것도 없다. 나름 열심히 최선을 다 해서 살아왔는데, 정작 아이들의 학비나 가족들의 노후조차 안정적으로 보장해 줄 수 없다니 새삼 허무하고 허탈하다.


어린 왕자가 어린 왕자 일 수 있는 건 작은 별에 혼자 살고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혼자서 넉넉히 돌볼 수 있는 작은 별에서 바오밥 나무 씨앗을 골라내고, 화산을 청소하고, 꽃의 바람막이를 세워주고, 작은 별의 모두를 충분히 만족시켜 줄 수 있었기 때문에 저녁놀을 바라보며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정말로 소중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 맞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지구에 돌아와 보니 보이는 것이 있어야 보이지 않는 것을 돌봐줄 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온다.


어린 왕자가 여행했던 다른 별의 다스리는 왕, 잊고자 술을 먹는 술꾼, 스스로를 찬양하는 허영심 많은 사람, 사용하지도 못하는 것들만 헤아리고 소유한 사업가, 아무 의미 없는 노력만 하는 가로등 불 켜는 사람. 어쩌면 그들도 처음에는 어린 왕자처럼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이었을 수도 있었다. 무언가 이유로 이상한 어른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양을 데리고 자기 별로 돌아간 어린 왕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연약한 가시 밖에 없는 꽃과 양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까. 아직 피어나지 못한 화산이 하나 더 피어올라야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온기가 생겨날 텐데, 기약 없는 청소가 이것을 이뤄낼 수 있을까. 바오밥 나무 씨앗을 끝까지 잘 골라낼 수 있을까? 모쪼록 어린 왕자가 충분한 능력을 발휘하여 그 작은 별과 그 안의 모든 구성원들과 함께 언제까지나 평화롭고 만족스럽게 살아갈 수 있기를..


보이는 세상 속에서 셀 수 있는 것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 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것을 잊지 않고, 모든 식구들을 평화롭고 풍요롭게 지켜나가며, 하루하루 저녁놀을 기대하고 감사함으로 맞이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직 작은 별로 돌아가지 못한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모쪼록 잠들어 있던 화산 하나가 빨리 활활 타오르길 바라며 오늘도 열심히 청소를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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