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21일 홋카이도 여행 3일째 되던 날. 약 7백 킬로미터를 운전해서 비에이에 도착했다. 비에이는 드넓은 언덕이 관광 명소다. 그곳 언덕은 여름이면 라벤더가, 가을이면 샐비어와 해바라기가 방문객의 발길과 눈길을 끈다. 꽃 피기 전이나 후라면 탁 트인 언덕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손을 위로 뻗으면 금방이라도 잡을 것 같은 파란 하늘 위두둥실 흐르는 하얀 구름. 저 멀리엔 듬성듬성 나무들이 서 있다. 비스듬히 서 있는 나무들은 저마다 이름이 있다. 철학의 나무, 켄과 메리의 나무, 세븐스타의 나무, 크리스마스 나무, 오야코(가족) 나무…. 다 TV 광고 CF에 나온 스타 나무들이다. 초록색 이파리가 무성해도 좋고 빈약해도 좋다. 그도 아니라면두툼한 솜이불처럼 비에이 언덕을 덮고 있는 하얀 눈을 상상해 보라. 절경이다
그날 나도 비에이 언덕에 올랐다. 라벤더는 지고 해바라기는 아직 없었다. 대신 대지가 온통 초록색이었다. 철이 지났거나 이른 그곳에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파란 하늘 하얀 구름 아래 한 농부가 무심히 밭을 갈고 있을 뿐이었다. 먼 길을 달려온 뒤라 배가 출출했으나 좀 있으면 노을이 번질 기세였다. 그 풍경, 카메라에 담으면 좋을 것이다. 기다렸다. 슬슬 거닐다가, 나무들 이름을 헤아려보다가, 차 안에 잠깐 누워 있기도 하다가. 그렇게 노을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다가 저녁 6시가 넘어서야 언덕에서 내려왔다. 가게 대부분이 문을 닫아 허기를 채울 식당이 한 군데도 없었다. 마을은 모든 소리를 진공관으로 빨려 들인 모양이다. 아이도 없고 개도 없는 곳인 양 마을은 고요했다. 그저 어둠뿐 침묵할 뿐. 숙소에서 수전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을 읽다가 이곳의 고요 또한 은유가 아닐까 싶었다. 정갈하고 소박하고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마을에 고착된 적막에서 어떤 질병의 징후가 느껴졌다.
한 친구가 추석 명절에 인사를 보냈다. 흔하디 흔한 휴대전화 메시지였다. 그러나 인사의 내용은 명절 연휴가 끝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오늘 저는 선생님과의 고마운 인연이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생각했습니다. 선생님이 제 딸을 안고 몇 시간씩 있었던 그때였을까. 아이와 저를 집까지 데려다준 그때였을까. 그 시간과 순간에 감사하다가 인연의 시작은 선생님이 먼저 건넨 손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인연이구나 했지요."
의례적인 인사가 아니었다. 가슴속 소리였다. 나도 그런 소리를 가끔이나마 표현하자 싶었다. 당신을 향한 내 마음을 당신도 느끼고는 있겠지만, 내 마음을 내 입으로 말하는 것에 비하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