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텀블러를 쓰며

by 페이지 성희

날씨가 쌀쌀해진걸 창밖에

나뭇잎이 변한 걸로 알았다.

작년 어머니와 이별 후

계절의 변화가 느리게 다가온다.

더우니까 짧은 옷 입고 추우니까

긴 옷을 생각없이 꺼내 입는

빈 마음으로 보낸다.


겨우살이에 필수품으로 3리터짜리

커다란 텀블러를 샀다.

커피포트, 커피 메이커를 치우고 그 자리에 커다란 텀블러를 놓았다.


아침에 주전자에 물을 끓여

여기에 담아 놓으면 하루 종일

따끈한 차나 커피를 마실 수 있다.

따뜻한 물이 필요할 때 써도 되고 수프를 만들어 먹기도 해서

여러모로 요긴하다.

텀블러 하나가 가스레인지, 티포트, 커피 메이커, 전자레인지 등 몇 개의 기기 역할을 대신해 주니 기특하다.


나는 단순한 살림살이를 좋아한다

주방 살림살이가 그리 다양하거나

많지 않다. 사실 이사 전후에 많았던 것들을 다 정리해서 그리 되었다.

식기 홈세트도 다쓰지 못했다.

동네 커뮤에 무료 나눔으로 주고

자주 시용하는 것만 남겨 놓았다.

가전도 심플한 기능이 있는 걸로 사서

오랫동안 고장 없이 쓴다.

나중에 부품이 더 이상 없어서

고치지 못할 때까지 쓰고

버리자주의로 산다.


가끔 신형이 빛나보여 유혹되기도 하지만 결국 익숙함과 멀쩡함에 길들여져 작별을 못하고 있다.

단순 무던하게 오랜 시간 주인과 동거하고 있다.



6년 전 오래 살던 집을 떠나 집으로 분양받아 이사하게 되었다.

동네 중고물품 사장님을 집으로 불렀다

쓸만한 것들은 버리기도 망설여지게 되어 중고로 팔아볼 요량으로 견적을 보려 했던 거다.

정리할 것들을 모아보니 거실이 꽉 찼다 에어컨, 턴테이블, 엠프, DVD,온풍기 같은 가전은 물론 결혼할 때 받은 몇 개의 커다란 액자,거울 등 어디에 있었는지 잊고 있던 것들이 구석구석 나타나서 거실이 가득 찼다.

잊고 있던 것들이 나타나니 놀랍기도 하고 신기함을 넘어 불가사의했다. 알고 보니 우리 집이 화수분이었다.

어디에 이 많은 것들이 꼭꼭 숨어 기척없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인가!



살 때는 발품팔고 기대하고 따져보고 어렵게 산 것들이다.

세월의 숫자만큼 물건의 개수도 비례하고 있었다.

그림 액자나, 인테리어 용품은 집 꾸미기를 좋아하는 남편과 고속 터미널 상가나, 이태원을 돌아다니며 샀거늘 이제는 처치곤란 새끼손톱만큼도 설렘이 남아있지 않았다.


말 그대로 새 집으로 데리고 가지 못해

버릴지말지 하는 존재들이 되었다.

결국 대다수는 돈 한 푼 못 받고 거저 주게 되었다. 심지어 스티커를 사야 처분했다.

중고품 사장은 공짜로 가져가는 갓만으로도 고마워하라며

의기양양한 얼굴을


그후 물건 사들임에 신중해졌다.

많은 물건은 맥시멀리스트인 남편 덕분인지라 계속 잔소리를 하고 있지만 아직도 우리 집은 구석구석 공구상점이고 낚시 가게이며 문구점이다.


새 집에 이사 오고 나서도 거실 팬트리에는 남편의 낚시용품으로 가득하다.

어쩌다 낚시라는 새로운 취미생활을 시작하면서 장비 욕심만 커져서

공간만 채운 것들이다.

아주 어선을 빌려 강이고 바다, 개울이건 언제 어디서든지 전천후로 떠날 모든 장비가 출발 5분 대기조로 정렬 중이다.


필요 소비가 아닌 욕망소비가 불러들인 결과물이었다.


낚시가게가 통째로 집으로 옮겨왔다.

종류별로 없는 게 없다.

팬트리 안을 열면 한숨이 나온다.



이제 남편은 취미가 어학으로 바뀌어 버렸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된

낚시 용품은 오늘도 뽀얗게 먼지를 얹고 돌아올 애인만 기다리고 있다

펜트리안 먼지를 털며 싹 다 버리고 싶은 마음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작가 조슈아 베커는 이런 마음을 보고 워워하며 말린다.

"버리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아요

진정한 미니멀리즘은 다시 사지 않는 거예요" 말한다

보통 미니멀리스트는 버리는 삶으로 간소함을 추구하는 걸로 알고 있지만 아니란다.


작고 간소한 삶으로 가는 원칙은

1. 일단 그냥 둘 것

2. 종류별로 모아 장소를 옮길 것

3. 그다음 처분할 것

4. 비워둔 장소는 다시 채우지 말 것

이게 진정한 간소한 삶의 정리

원칙이라 한다.

섣불리 마구 버리면 반드시 다시 사게 되기 때문이다. 물건은 필요해서 물건이기 때문이다.


나는 버리고 싶은 마음을 창고에 밀어 넣는다.


가족 한 사람의 가치관을 가족 모두에게 강요할 수 없다.

적어도 내 공간은 내 가치관대로 유지한다.

주방과 침실은 그렇게 내 맘대로 정리해서 심플하다.

심플하니 청소도 쉽고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하게 정돈된다.

지인들이 와서 보고 침실에 침대와 작은 서랍장만 놓인 걸 보고 감탄한다.

오직 쉬고 잠만 자는 곳이다.

스탠드도 어떤 가전도 없다.

빛과 소리에 예민한 내가 잠들기 좋다.

남편도 자신의 취향이 넘치는 서재에서 놀다가 침실로 오면 바로 꿈나라행이다.


미니멀리스트는 대단한 삶의 방식이 아니다.

개개인이 선택하는 삶의 방식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물건이 많아야 행복한 것도 아니고

단출해야 반드시 좋은 거라 말할 수 없다.


한때 물건을 살 때 풍요로워져서 좋았다.

욕망으로 키운 비운 마음을 지갑을 열어 채웠던 거다!


그 후 넘쳤던 소비는 결국 절제하는 간소한 삶으로 바꾸는 시발점이 되었다.

소비욕을 멈추고 참으니

내 삶의 초점을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지 보였다.

이게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내가 편하게 생각하는 쪽으로 집중하다

보면 나만의 삶의 방식이 보인다.

그렇게 채웠다 비웠다 하는게 인생살이다.

내일은 뭘로 다시 채울지

내마음 나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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