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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페이지 성희
Dec 25. 2024
전봇대
기다림과 추억, 삶의 위로
구도심 주택가나 오래된 아파트 부근에
가보면 하늘에
온통 검은 선으로
줄을 그은 듬직한
전봇대가 서있다.
전봇대는 기다란 나무 위에 매달린
어둠을 덮는 불빛 이상이다.
아이들에게는 친구 같은 존재다.
아니 깍두기
친
구나 마찬가지다.
고무줄 놀이 할 때 고무줄을 붙잡아 주기도 하고 말뚝박기 할 때 버텨주는 친구 역할에
무궁화 꽃이 피었을때도 누가 움직였는지 지켜보고 있다고 속살대기도 했다.
소식을 알려주고, 일자리 구인이나,
사람을 찾는 게시판이
되기도 했
다.
만약에 낯선 곳에서 사고가 났을 때
중간쯤에 붙여있는
표찰번호는
요긴한 구조 알람이다.
112나 119에
이
번호를
신고하면
길을 잃은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려주고 구조를 받기
도 한다.
소설책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전봇대는
사람들에게
추억을 선물했
다.
요즘
가로등과는
뭔가
다른
푸근하고 아련한
기다림이 되어 주었
다.
전봇대 앞에서 연인들이
잡았던 손을 놓고 아쉬운 마음을 접고
등을 돌려야 하는 헤어짐의
종착점이
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첫
키스를 본
증인으로
남아 주었다.
그렇게
아
쉬운
눈길을 나누는 마침표가 되기도 하고, 귀가하는 자식을 기다리는 어머니가 서있는
기다림도 되었
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보일 때
제일 먼저 맞아주는 주는 전봇대 불빛은
피곤하고 불안했던 하루를
안심과 위안으로 물들게 해 주었다.
나에게
전봇대란 존재가 마음 밑바닥에 묵직하게 박혀있다.
초등학교 4학년 여름. 어머니가 큰 수술을 받으셨다.
한 달 넘게 입원하셨다.
외
할머니께서 매일 안암동 집에서
연건동 서울대 병원까지 오고 가면서
어머니의
병간호를 하셨다.
사 남매
나 되는 어린 손자
들도 돌보시고 집안일도 하시고 할머니가 얼마나 힘드셨을까 생각하면 눈물이 나고 마음이
저릿하게
아파온다.
그날도 나는 3살 된 막내를 안고 할머니를 기다리며 동생들과 저녁을 먹고 있었다.
동생 하나가 칭얼대며 밥을 잘 먹지 않았다.
아버지가 뭐라 뭐라 동생을 나무라셨고
나중엔 떼쓰는 동생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셨다.
동생이 더 크게 울었던 게 사단이 된 거 같다.
놀란
우리는 밥을 먹다 말고 문밖으로 뛰어나왔던 거 같다.
먹다 내팽개친 밥상과 어수선한 집안 풍경, 이미 깜깜해진 밤이 그려진다.
벌써
밤
8시쯤인
가 되
었다
.
어느집 쾌종 시계가 8번을 울었다.
그날따라
할머니가 어두워졌는데도 오지 않으셨다.
우리는
환한
전봇대 앞에
조롱조롱 서
서
어서
할머니가 오시기를
멀리서
어서
우리 넷을 보고
달려오시길
목을 빼고 기다리고 기다렸다.
전봇대 앞에 서있으면 그 따뜻한 불빛이 멀리서도 할머니에게 어서 오시라고
애들이 기다린다고 소리쳐 알려줄 거 같았다.
하늘엔 달님도 보이지 않았다
주위가 칠흑같이 깜깜하고 개 짖는 소리도 지나는 사람들도 하나 없는데
우리 넷은 저 멀리 할머니가 오실 개천너머 길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서서 기다렸다.
그때였다.
멀리 할머니가 우리 이름을 부르시며 달려오시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반가움 반, 울음 반 섞여서
울먹였다. 아니 울음이 터졌다.
"할머니, 할머니 왜 늦게 왔어요~"
우리도 울고 할머니도 우셨다
할머니를
붙들고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 뭉쳐있던
울음
이 쏟아져
터져 버렸
다.
꾀죄죄한 얼굴을 타고 찝찔한 눈물
맛이 입가를 흘러 떨어졌다.
할머니는
두 팔 벌려 안아주시며 전봇대 앞에서 가족 상봉을 했고 다시는 늦지 않으셨다.
세월이 이렇게 많이 흘러 그때의 할머니 연세에 가까워지고 있는데
주책맞게
그 기억을 하면 그때의 11살 꼬마가 되어 눈물 콧물이 이렇게 흐르는지 모르겠다.
전봇대의 기억이 항상 고장 난 스위치처럼
마음 안에 등불처럼 환하게 켜져 있다.
지금도 하루의 고단함을 씻어주는 건
홈 스위트 홈이 보이는 동네 입구의
정겨운
불빛이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다.
불빛으로 지친 다리와 구겨진 마음이 펴지고
다시 내일을 위해 쉬는 일만 남았구나
하고
씩씩하게 나를 일으켜 세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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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봇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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