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선생님이 되었다.
얘들아, 학교에 왜 왔니?
아이들에게 물었다. 학교에 왜 왔느냐고. 질문을 받은 아이 둘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다 나의 눈치만 살핀다. 개천절 연휴를 보낸 다음날, 아침 8시 40분 등교시간에 맞춰 학교를 온 아이들은 딱 그 둘 뿐이었다.
이성친구랑 헤어져서 학교 가기 싫다는 얘기부터 저마다 나름의 이유를 들며 무단결석을 한 녀석들이 3명, 질병결석(꾀병) 1명, 질병지각 2명, 무단지각 2명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그리하여 조회시간 교실에는 책상 주인보다 빈자리가 훨씬 더 많게 되었다.
그 광경을 보고 화를 내야 하나 어쩌나 싶었는데 문득 이상한 물음이 떠올랐다. 여기 앉아 있는 두 아이들은 왜 학교에 왔을까?
학교에 가야 하니까 왔어요.
아. 너는 학교는 가야 하는 곳이라고 생각했구나.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학교를 가야 한다’라고.
그럼 오늘 학교를 오지 않은 친구들은 왜 그랬을까?
왜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되는 곳이라고 생각했을까?
아이는 내 질문에 더 이상 답을 하지 않았지만 난 정말로 궁금해졌다. 학교를 오지 않은 아이들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제시간에 학교를 오는 아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어떤 생각으로 학교를 왔는지가 말이다.
중고등학생 시절 우리 부모님은 몸이 아파도 학교에는 꼭 가야 한다고 하셨고, 그 덕분에 12년 개근상을 받기도 했다. 몸이 너무 아픈 날에는 조금 서럽기도 했지만 내 주변에도 비슷한 친구들만 있었기에 ‘아파도 학교에 가서 아파라’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라떼는~”을 시전하는 걸 보니 내가 꼰대가 되었나 싶긴 하지만 학교를 오지 않은 아이들이 답답한 것은 나도 어쩔 수가 없다.
2학기가 되고 우리 반 아이들의 출석률이 매일같이 2,30퍼센트를 넘지 못하고 있는 요즘, 혹시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 걸까. 아무리 수시 원서 접수도 거의 다 끝났고 남은 건 합격자 발표뿐이라지만 이렇게까지 생활패턴이 무너질 수 있는 걸까.
오늘은 특히 더 심한 날이었다. 1교시 수업을 해야 하는데 학생이 3명밖에 없으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교탁 앞에 서서 번호 순서대로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1번, 4번, 6번, 7번…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아무래도 다들 잠을 자거나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는 것 같다. 쉬는 시간에 교무실로 와 학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무단지각을 벌써 몇십 번을 했는데 5분, 10분 정도 늦는 것이 아니라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늦잠을 잤다며 나타나는 녀석이다. 하지만 전에도 몇 번 연락을 드려서인지 이제 아예 내 전화를 받지 않으신다. 문자도 남겨봤지만 답장이 오지 않는다.
하염없이 아이들을 기다리는 사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도 했다가 화를 내면 뭐하나 서로의 감정만 상할 뿐인데 하며 오늘은 그냥 넘기자고 다짐하기도 하며 오후 내내 롤러코스터를 오르내렸다.
그리고 종례시간. 오전 수업에 보이지 않던 세 녀석이 자리에 앉아있다. 점심시간에 등교를 한 모양이다. 그래도 학교에 오긴 왔으니 다행이다 싶었지만 일부러 인상을 쓰고 목소리를 높였다.
학교 좀 성실히 다닐 수 없겠니?
어떻게 매일같이 지각이야!
조금 늦는 것도 아니고 점심시간에 일어난다는 게 말이 되니? 나중엔 어쩌려고 그래!
아이들은 또 시작이라는 듯이 듣기 싫다는 티를 팍팍 내며 땅만 쳐다보고 있다. 사실 지각이나 결석을 하건 말건 싫은 소리 할 것도 없이 출석부에 제대로 표시만 하면 아무 문제없을 수도 있다. 나도 기분 상하지 않고 스트레스받을 일도 없을 것이다. 아이들은 나를 잔소리하지 않는 수용적이고 마음 넓은 담임 선생님으로 여기며 좋아해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인기 많은 연예인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각자의 꿈을 이루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규칙을 배워야 한다. 별다른 이유가 없는 한 학교에 제시간에 등교하여 학교생활을 하는 것도 아주 중요한 교육내용이다.
교사의 잔소리가 아이들은 너무나도 듣기 싫겠지만 악역을 자처할 수밖엔 없다. 담임인 내가 하지 않으면 다른 선생님들은 더 지도하기 어려울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