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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민 Sep 08. 2022

차에 치여 죽었으면 좋겠다.

우울증이 찾아왔다.

대학원 조교, 수술실 간호사, 산업 간호사, 간호협회 직원, 간호학과 실습 조교, 생명윤리 연구원.

24살부터 29살까지 6년 동안 내가 경험했던 직업들이다.

짧게는 4개월에서 길게는 1년 8개월까지, 평균적으로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직업과 직장을 바꿨다.

주변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옮겨가기도 하고, 내 의지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떠나기도 했던 시간.

그 과정에서 힘들었던 일도 많았지만 되돌리고 싶을 만큼 후회가 되는 경험들은 없다.

비록 한 분야에서 깊이 있게 일을 배우지는 못했지만 잠시나마 발을 담가봄으로써 막연한 환상 대신 생생한 현실을 느껴볼 수 있었으니까.


그중에서 가장 오랜 기간 일했던 곳은 대학병원 수술실.

2년도 아니고 1년 8개월이라는 이력서에 당당히 적기엔 다소 애매한 경력을 만들어 준 곳이다.

그래도 그나마 가장 오래 일을 한 곳이기에 적성에 제일 잘 맞았으려나?

단언컨대 절대 아니다.

업무에 적응하지 못하는 신입 간호사들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 마치 패배자처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 두려워 그저 참고 또 참았을 뿐. 일하는 재미는 눈곱만큼도 느낄 수 없었다.


수술실은 간호사로서의 내 꿈을 펼치기에는 나와 너무나도 맞지 않는 곳이었다.

보호자는 물론 CCTV도 없는 곳에서 일하다 보니, 같이 일하는 선배의 언어폭력과 신체적 폭력은 관행이 된 지 오래였다.

소위 ‘태움’이라고 표현하는 단어가 따로 있을 정도로 직장 내 괴롭힘이 만연한 곳이 병원 말고도 또 있을까.

게다가 신경외과 수술은 10시간 이상 전신마취 상태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환자와 따뜻한 말 한마디를 주고받기도 어렵다.

학생 신분으로 실습을 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환자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감정적인 교류를 많이 나누고 싶었던 나에게 수술실은 그 공기만큼이나 차가운 곳이었다.


그렇게 가족들에게도 친한 친구들에게도 힘들다는 얘기를 솔직하게 하지 못하고 있던 어느 일요일 저녁.

서울의 기숙사로 돌아갈 준비를 하라는 엄마의 말에 어린아이처럼 마룻바닥에 발을 구르며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엄마 나 병원 그만두면 안 될까? 나 정말 죽을 것 같아.
매일 밤 기도해. 내일 아침 눈 뜨지 않게 해 달라고.
출근하는 길에 차에 치이게 해 달라고.
엄마 제발 나 좀 살려줘…”


개그 프로그램을 보며 웃고 있던 가족들은 갑작스럽게 쏟아진 나의 울음과 심각한 말에 얼어붙은 듯 고요해졌다.

잠시 후 아빠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힘들면 진작 말하지 그랬니.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그만둬도 돼.”


그 말 한마디에 내 목을 조르고 있던 쇠사슬이 툭 하고, 맥없이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심지어 너무 허무해서 억울하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이 얘기를 꺼내기까지 수없이 고민하고 망설였는데 막상 말을 하고 나니 결론이 너무나도 쉽게 나버렸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언제 어느 상황에서든 무조건 내 편을 들어주는 가족들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었을까.  

내면의 상처가 이토록 곪아 터질 때까지 고민했던 이유는 나에 대한 편견을 스스로 깨보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려서부터 끈기가 없다는 말을 자주 들었고, 여러 가지 일을 시작만 하고 제대로 끝낸 적이 없었던 나였다.

그런 내가 가족들의 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고집스럽게 간호학과에 진학했고, 1,000시간이 넘는 실습은 물론 교직이수까지 해 가며 바쁘게 대학생활을 마쳤다.


그렇게 힘들게 얻은 간호사 면허를 가지고 부푼 가슴으로 입사한 병원과 수술실.

변덕 심한 내 성격상 그곳을 평생직장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적어도 5년 이상은 기본기를 다지며, 간호사로서 부끄럽지 않도록 일을 배우고 싶었다.

그런데 채 2년도 되지 않아 도망치듯이 그만두다니.

이번에도 어김없이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상황을 모면하려고만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병원의 일 자체보다도 나를 더 힘들게 했다.


그동안 꾹꾹 참아 왔던 이야기를 가족들에게 먼저 꺼내고 나니,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동기들은 처음엔 부럽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친구들도 줄줄이 사직서를 내고 병원을 떠났다.


대한간호협회 통계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신입 간호사 10명 중 4명이 병원 근무 1년 만에 퇴사했다고 한다.
이런 통계가 과연 개개인의 문제 때문일까?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병원을 그만두기 전에 매일같이 떠올리던 생각이 있다.


‘나만 없어지면 돼. 환자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민폐만 끼치는 나 같은 건 없는 게 나아’


나의 실수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선배의 폭력적인 말에 상처받을 때마다 그냥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간호사 선생님조차도 선배의 말만 믿고 ‘너만 잘하면 된다’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바람 빠진 풍선처럼 자꾸만 쪼그라드는 내게 기운 내라며 등을 토닥여 주는 사람은 힘없는 동기들뿐이었다.


비록 병원에 오래 남아 신입 간호사에게 직접 말을 건넬 수는 없지만, 글로나마 내 경험을 전하고 싶다.

지친 몸과 마음 때문에 눈물로 밤을 새우는 신입 간호사들이 힘든 시간을 이겨낼 수 있도록.


“너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
힘들면 잠시 쉬어 가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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