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와 아마추어

by 이일우

거실에서 TV를 보며 아내와 저녁 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2023년 PSG(Paris Saint-Germain 파리 생제르맹)로 이적한 이강인 선수의 경기 장면이 뉴스에서 나오길래 아내에게 물었다.

"프로선수는 소속팀을 옮기는 게 아무렇지도 않나 봐."

"당연한 거 아닌가, 연봉을 많이 준다는데……."


그렇지. 연봉을 높게 준다는데 프로스포츠선수가 소속팀을 옮기는 게 뭔 대수일까. 그래도 여전히 찜찜했다. 이강인 선수는 2001년생으로 2017년 발렌시아 CF 메스타야에 입단한 후 2018년부터 스페인 프리메라 리그에서 뛰었다. 유럽에서 뛴 역대 한국 축구 선수 가운데 가장 어린 나이에 프로 공식 경기 데뷔전을 치른 선수 기록이라고 한다. 프로선수 경력에 비하면 구단 이적 경력이 벌써 서너 번째인데 나는 이런 점이 어색했다. 스카우트든 트레이드든 프로선수가 소속 팀을 옮길 때 과연 인간적인 고민은 없을까 궁금했다. 분야는 다르지만 마치 A정당 소속으로 선출직을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탈당해 경쟁 관계인 B정당에 입당하는 철새 정치인의 얼굴도 연상됐다. 물론 정치적 신념을 기반으로 하는 정당과 자본의 원리로 작동하는 프로스포츠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긴 어렵다. 그래도 수년간 한솥밥을 먹으며 땀 흘린 동료 선후배 선수들을 어느 날 갑자기 상대 팀 선수로 만나는 상황이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다. 한번 입단했으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소속 팀을 떠나지 않는 것이 의리있는 선수가 아닌가. 의리가 밥을 먹여주냐고 따지면 뭐라 할 말은 없지만 일례로 우리나라 여자프로배구의 한국도로공사 하이패스 배구단에서만 무려 10년이 넘도록 활약하는 문정원(1992년생) 선수가 있다. 나는 문정원 선수의 기량이나 외모 못지않게 그녀의 의리가 좋다. 물론 프로선수의 이적은 냉정한 시즌 성적 평가를 거쳐 다양한 요인들이 고려된다. 프로선수라면 능력을 인정해주고 그만큼 금전적인 대우를 해주는 팀에서 뛰고 싶어 한다. 훌륭한 코칭 스태프가 있는지, 기량과 팀웍이 좋은 동료 선수가 있는지도 중요한 고려사항이다.


프로선수도 직장인이다. 스포츠를 통해 가족을 부양하고 노후 대비를 한다는 것이 여느 직장인과 다를 뿐. 프로선수가 본인의 실력과 성적, 팀 기여도에 부합하는 금전적인 보상을 소속 팀과 구단에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만일 소속 팀이나 구단이 선수의 이런 요구를 계속 만족시켜 주지 않는다면 아마 다른 구단에서 그 선수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을 지도 모른다. 몰래 보쌈이라도 해서 스카웃하고 싶을 테니까. 그렇다면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프로선수가 소속 팀을 바꾼다면 결코 '배신'이 아니다. 오히려 부러움과 찬사를 받을 일이다.

나는 2023년 2월 건강상 이유로 서울시의회를 사직하고 임기제 공무원 생활 17년 만에 백수가 됐다. 실로 오랜만에 내 소속기관을 설명하는 명함이 사라진 것이다. 이제껏 정책토론회가 있을 때마다 자주 드나들던 국회의원회관의 방문신청서 직업란도 빈칸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부양가족이 아내가 전부이다 보니 통장 잔고 걱정없이 1년 넘는 기간 동안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 시기를 간간이 여자프로배구 경기를 보는 재미에 빠져 지냈다. 그러다 문득 나 자신을 '백수'보다는 FA(Free Agent) 즉 자유계약선수로 부르기로 했다. 목표도 꿈도 없는 소극적인 실업자가 아니라 전문성과 실력을 인정해주는 새로운 소속팀과 계약하기 위한 적극적인 도전자라는 나만의 다짐이었다.


간혹 어떤 분들이 내게 묻는다. 국회나 서울시의회에서 일하지 왜 구의회에서 일하느냐고. 호기심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질문이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하찮은(?) 기초의회에서 뭘 그렇게 아등바등하냐는 의미와 함께 이왕이면 큰 조직에서 일하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음을 잘 안다. 나 역시 고민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일까, 이번 생은 이렇게 기초의회 전문위원으로 끝나는 건가’ 등등의 질문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곤 했다. 그럴 때마다 머리로는 ‘괜찮아. 여기도 못 와서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싶다가도 ‘일우야, 구멍가게에서 뭐 하고 있냐.’ 싶어 자괴감에 빠진 적도 많았다.


그러다 우연히 조계사에서 진행된 불교창립 50주년 붓다빅퀘스천 릴레이 강연에서 들은 원철 스님의 말씀이 내게 죽비였다. 조천일우 차즉국보(照千一隅 此則國寶). 천 구석 가운데 한 구석만 밝힐 수 있다면 이 사람이 바로 국보같은 존재가 될지니라. 일본 교토 히예산 연력사 입구의 돌기둥 글씨이고 창건주 최징 대사의 어록이다. 나중에 자료를 찾다가 유홍준의 2024년 최근작 《나의 인생만사 답사기》에도 똑같은 글귀와 비슷한 해석을 발견했다. 유홍준 작가는 ‘천 가지 중 오직 하나를 잘하면 그것이 국보라는 뜻이다. 한 가지 일에 충실하면 그것이 인생의 보람이고, 사회로부터 인정받고 나라에 기여하는 길이라는 신념을 말해주는 표어다. 그건 정신에서 일본은 장인을 존중하는 사회로 성장했고 직업윤리 의식이 형성되었다.’라고 설명했다. 그래, 이거다! 나는 저절로 쾌재를 불렀다. 세상의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을 반박할 나만의 근거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의 저자 최인아 대표는 결국 ‘왜 일하는가’ ‘어떻게 일할 것인가’ 즉 일에 대한 의미와 태도에 대한 질문은 세상의 답이 아닌 나만의 답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30여 년간 크리에이티브의 최전선인 광고업계에서 자기만의 색깔로 인정받고 일터에서 스스로 물러나 10년 넘게 자신의 이름을 딴 ‘최인아책방’을 운영하는 그녀의 말이기에 더욱 수긍이 됐다. 최인아 대표는 비록 현실이 만족스럽지 못하더라도 그 시간 역시 다시 안 올 내 인생이기에 최선을 다하며 일이 주는 기쁨과 슬픔을 온전히 느껴보라고 권한다. 그녀의 말대로 우리는 흔히 조직의 일을 해주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 시간 역시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즉 나를 위해 일하고 결과로써 기여하는 것이다.


내 직업에 애착을 갖게 된 계기는 그 외에도 많다. "초밥은 수행이다“라는 문경환 셰프에게 스시는 밥의 온도, 굳기, 밥과 생선을 같이 먹었을 때 입안에서 사라지는 정도 등 모든 것을 연구하고 고려해 균형을 맞춘 ‘최상의 작품’이라는 인터뷰 기사를 인상적으로 본 적이 있다. 日미쉐린 외국인 최초 1스타를 받은 문 셰프는 “어느 수준 이상으로 가면 ‘맛있는 식당’은 많다. 그러나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식당’은 또 다른 영역”이라고 했다. “손님이 왔을 때 어떤 자리에 앉았을 때 가장 기쁠지, 술은 어떤 걸 좋아하는지, 차의 온도는 어떤지까지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저 가게를 가면 100% 안심하고 맡길 수 있다. 100% 행복해진다’ 하는 게 진정한 ‘오마카세’”라고 했다. 초밥이 뭐길래 이렇게까지 진심일까. 기초의회가 뭐길래 나는 지난 8년 동안 진심이었을까. 악마만 디테일에 있는 건 아니다. 고수도 디테일에 있다.


"프로패셔널의 조건은 사랑이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에 가까이하지 않을 수 없고 저절로 잘하게 된다. 사랑하는 것에게 진지하지 않을 수 있는가? 엄숙할 필요는 없지만."

《위반하는 글쓰기》와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의 저자 강창래 작가의 말인데 나 역시 적극 동감한다. 언제까지 외적인 것만으로 일의 가치를 재단할 것인가. 어떤 일이든 진심을 다해 꾸준하게 노력한 결과로 평가받을 수 있다면 프로가 아니겠는가. 베스트셀러 《대통령의 글쓰기》를 쓴 강원국 작가는 2025년 8월 공개된 콘텐츠 구독 서비스 “폴인”과 인터뷰에서 직장의 모든 글쓰기의 본질은 처세라고 말했다. 글머리를 키워야 일에서 밀려나지 않는다고도 했다. 어느 정도는 공감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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