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의 이웃인가

by 이일우

민망하고 쑥스럽게도 30대 초반에 천주교의 수도회 입회를 진지하게 준비했던 적이 있다. 모든 게 낯설고 배고팠던 대전 촌놈이 월세 15만원의 고시원 생활로 지치고 위축됐을 때였다. 어렵사리 입학한 대학원의 첫 학기 식목일 전후로 심한 몸살을 앓은 후 나는 도망치듯 휴학을 했다. 우연히 성당의 주보에서 봤던 피정(避靜)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매주 토요일 오후 J수도회 지원자 모임에 2년간 참석했다. 외롭고 가난한 자취생이 공짜로 맛있는 밥을 먹고 따뜻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곳은 천국이었다. 하지만 5명의 신부님들이 개별적으로 면담을 진행한 입회심사 결과, 나는 입회가 거부됐다. 성소(聖召)가 없다고 공동체로부터 영적 식별을 판정받은 셈이다. 쓰린 가슴을 안고 2년 만에 대학원 석사과정에 복학했다. 당시,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대학원뿐이었다. 그렇지만 도시개발, 부동산 등 도시계획을 연구하는 대학원의 학문적 분위기는 여전히 낯설었다. 게다가 논문의 주요 연구방법인 계량분석은 수포자인 내게 어쩔 수 없는 넘사벽이었다. 학부 때 행정고시 공부를 하다 차선책으로 선택한 진로가 대학원 진학이었으니 누굴 원망할 수도 없었다. 입학 동기들은 졸업논문을 쓰고 있는데 2년간 휴학했다가 복학한 나는 2년 후배들과 강의를 들어야 했다. 꾸역꾸역 졸업학점은 채웠지만 교내에 있는 대학생활문화원에서 진행하는 집단심리상담, 리더십 프로그램을 훨씬 열심히 쫓아다녔다. 나는 왜 대학원에서 '비주류'일까 자문하며 캠퍼스 이곳저곳을 방황했다.

2004년경 석사 3학기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우연히 한국도시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던 대학원 선배의 '관악구 신림동 난곡지역 원주민 심층면접' 알바 모집공고를 보고 무작정 지원했다. 이전엔 따분하기만 하던 도시계획 분야에서 유독 '주거복지'에 뭔지 모르게 끌렸다. 재개발사업으로 인해 반강제로 떠밀려 나는 원주민들을 각각 심층 인터뷰하는 알바를 신나게 했다. 달동네인 난곡지역은 당시 재개발사업 과정상 주민 이주 단계였다. 한 집 건너 허름한 빈집들이 줄지어 있고 좁은 골목에는 이사하고 버려진 쓰레기가 아무렇게 놓여있었다.


두 달쯤 지나 심층면접 알바는 끝났지만 난 그 나이 어린 선배랑 인연을 계속 이어가고 싶었다. 4학기에 작성할 졸업논문 주제를 주거복지 분야에서 잡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역사회 정착을 위한 노숙인의 주거지원 프로그램 연구'라는 나의 석사논문은 그렇게 시작됐다. 계량 분석이 아니라는 이유로 한 차례 논문심사에서 고배를 마시는 우여곡절 끝에 2006년 여름 석사학위 수여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 수여식이 끝나고 함께 사진을 찍고 싶다는 내게 대학원 은사님이신 이정전 교수님께서 던진 농담이 생생하다. ‘이군은 뭐가 그렇게 좋아서 계속 웃나?’. 그랬다. 남들은 2년 만에 졸업하는 석사과정을 휴학 기간까지 포함해 5년 만에 졸업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죽했으면 학위 수여식장에 원색의 석사학위 가운을 입고 앉아 있는 내가 마치 천주교 사제서품식의 부제(副祭)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정도니까. 아무튼 졸업 이후에도 석사논문의 핵심 조력자였던 그 선배와는 일 년에 한두 번쯤 막걸리를 마신다. 위기든 기회든 모두가 사람을 통해서 온다. 그 동생같은 선배를 만남으로써 나는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정책적 관심을 구체적으로 풀어낼 수 있었다. 더욱이 국민권익위원회(권익위) 조사관 채용 면접시험에서 그 석사논문의 덕을 톡톡히 봤다.


9년간 권익위 조사관 생활의 우선순위는 '고충마인드'였다. 민원을 발생시킨 공공기관이 아니라 민원인의 입장에서 사건을 검토한다는 의미이다. 지방의회로 이직하고 보니 신문방송에서 동네북처럼 항상 두둘겨 맞는 지방의원들이 사실은 관료집단에 비해 약자라는 것을 깨닫고 분노했다. 주민들의 대표인 지방의원들은 관료집단의 틈바구니에서 '벌거벗은 임금님' 처럼 조롱과 무시의 대상이었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방의원의 낮은 수준을 비난하기 전에 질적, 양적으로 부실한 의회사무기구를 보완해야 하고 국회의원같은 중앙정치에 속절없이 휘둘리는 지역정치 구조가 바뀌어야 했다. 그렇게 의회중심으로 판단하려는 '의회마인드'가 내게 조금씩 스며들었다. 지방의회 전문위원은 단순한 생계수단 그 이상이었다. 철저하게 의원들의 입장에서 일하려고 애썼다. 그러다 보니 '비주류 집단'은 어딘가 모르게 친근하다. 기억력도 좋지 않고 예민한 탓에 스트레스를 자주 받지만 앞으로도 비주류를 위해 일하고 싶다. 故 신영복 선생의 변방론이나 서강대 철학과 최진석 명예교수의 경계론을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비주류인 지방의회와 지방의원이 제 역할을 하도록 돕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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