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할이 불안

by 이일우

해보지 않은 실무(예산, 회계, 계약 등)를 팀원에게 질문받을까 불안하기 보다는 '회계가 어려운데 설명을 들으니 참 쉽게 이해되네, 고마워' 식으로 오히려 조금 더 뻔뻔해도 된다. 모든 업무를 다 잘 알기 때문에 팀장이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2024. 9. 25.(수) 업무일기


어느 시인은 자신을 키운 8할을 바람이라고 했던가. 고백하자면 나를 키운 8할은 불안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직장 동료들은 못 믿겠다는 표정이 대부분이다. 덩치가 작지도 않고(키 178센티미터, 몸무게 90킬로그램 이상) 외향적으로 보이면서(가끔 외부 강의도 하고 상임위에서 곧잘 발언도 하니까) 웃는 낯이니(잘 생겼다는 말이 아님) 도저히 못 믿겠다는 반응이 당연하다. 사람은 겉보기와 다른 거라고 말해도 소용이 없다. 전문위원 경력이 9년이라지만 내가 여전히 상임위 회의를 앞두고 거의 매번 불안해한다는 것을 전혀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검토보고서의 논리나 근거가 엉터리거나 오탈자라도 나올까, 잘 모르는 내용을 의원들이 물어보면 어쩌지 불안해하면서 과민성대장증후군을 달고 사는데도 말이다. 매일 업무 일기를 적고 유용한 정보를 스크랩해두는 네이버 밴드에서 내가 가장 자주 기록한 키워드가 ‘불안’일 정도다. 40대 때까지만 해도 ‘하루라도 마음 편히 살아봤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다시피 했다. 어찌 보면 30∼40대 동안 심리상담, 리더십 프로그램이나 영화, 북토크 행사에 유독 관심이 많았던 것도 어떤 고상한 이유보다 이런 내 기질적 특성이 큰 몫을 차지한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조금이라도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나만의 루틴을 갖게 됐다. 설탕이 적은 스테비아 봉지 커피 한 박스를 사무실 책상 서랍에 두고 오전과 오후에 두 개씩 뜨거운 물에 타서 마신다. 봉지 커피 두 개를 스테인리스스틸 재질의 머그컵(용량 414ml)에 털어 넣고 컵을 약간 기울였을 때 바닥의 한쪽 구석이 살짝 보일 만큼만 물을 붓는 것이 핵심이다. 봉지 커피 두 개에, 컵의 바닥이 보일락 말락 정도로 물을 적게 넣어 에스프레소처럼 진하게 해서 마신다. 마치 커피의 농도가 불안의 정도와 비례하는 것처럼 상임위 회의라도 있는 날이면 평소보다 물을 줄여 더 진하게 탄 커피를 마신다. 그렇다면 일을 더 잘하고 싶어 노심초사하며 생기는 불안한 마음 자체가 나쁜 것일까. 완벽주의 성향으로 계속 자신을 괴롭히는 태도가 더 문제일 것이다. 그래도 전문위원을 처음 시작했을 때와 비교하면 요즘은 상대적으로 마음이 훨씬 편안해졌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업무 노하우가 생기기도 했고 불안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 자체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건국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하지현 교수는 모호한 걸 견디는 능력이 인생의 내공이라고 말했다. 철학자 강용수는 불안의 원인을 ‘남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에 대한 지나친 걱정에 있다고 봤고 그래서 자신을 이 세상에서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존재로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적당하다는 기준이 사람마다 워낙 다른 것이 문제지만 ‘적당한’ 긴장이나 불안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님은 이미 학자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나도 지난 20여 년간 불안 때문에 힘들었던 적이 많았지만 따지고 보면 이 불안 덕분에 얻은 성취가 적지 않으니 새옹지마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신경정신과 의사인 하지현은 『나는 왜 이유 없이 불안할까』(창비)에서 불안은 사라질 수 없지만 길들일 수는 있다고 말한다. 잘만 길들이면 삶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불안이 뭔지를 이해부터 하라고 충고하는 저자는 불안을 전혀 느끼지 않는 사람은 ‘매우 위험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흔히 사이코패스라고 부르는 이들, 이런 사람들이 불안을 전혀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약간의 근심과 적정은 배의 밑짐과 같다”는 쇼펜하우어의 명언을 인용한 뒤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배는 밑짐이 꽤 단단하게 있어야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해요. 불안, 근심과 걱정이라는 게 아예 없으면 나라는 배가 오히려 흔들흔들해요. 부정적으로만 생각했던 이 감정들을 우리가 더욱 잘 살 수 있게 뒷배를 받쳐주는 존재, 인생의 상수 같은 것으로 생각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울렁거리며 요동치는 불안한 마음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는 조언이 아닐 수 없다.


가끔은 프로스포츠의 멘털 코칭을 참고하기도 했다. “누구나 흔들린다, 불안을 인정하라” 멘털 코칭이라는 말은 ‘정신력 강화 훈련’ 같은 느낌이 든다. 실제 멘털 코칭은 기본적으로 선수가 마음과 머리, 몸 사이의 관계를 인지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데 초점을 맞춘다고 한다. 그러려면 일단 선수가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또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법을 알아야 한다. 야구 선수가 일상적으로 제일 많이 느끼는 감정은 뭘까.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를 60년 넘게 취재한 기자이자 책 17권을 펴낸 작가인 레너드 코페트(1923∼2003)의 대표작 ‘야구란 무엇인가’에 힌트가 들어 있다. 코페트는 이 책 첫 문장에 낱말을 딱 하나 쓰고 나서 마침표를 찍었다. ‘두려움(Fear).’ 이럴 때는 ‘호랑이에게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이 떠오른다.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라는 여덟 글자를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멘털 코칭에서는 불안한 감정을 억지로 다스릴 필요가 없다고 제안한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돼. 이렇게 생각해야 해”라고 마음을 고쳐먹는 게 아니라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는 것이다. 멘털 코칭은 운동선수만을 위한 훈련법이 아니다. 누구든 흔들릴 수 있고, 그 흔들림을 다룰 수 있어야 한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는 말은 그저 위로가 아니다. 흔들리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래도 괜찮다’는 마음가짐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면 된다. 부정적인 마음을 애써 억누르려 하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 마음을 제어하는 힘을 얻는다. 영화 <위대한 쇼맨>의 OST ‘This Is Me’처럼. 그래, 이게 내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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