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위원님, 예산회계과장이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싶다는데 어때요?”
11월 중순에 시작하는 제2차 정례회의 안건 검토 준비로 분주한 내게 5급 행정직 K 전문위원이 물었다. 평소 친분이 있는 과장이니 부담갖지 말고 식사나 하자는 K 전문위원의 제안이었다. 좋긴 한데 곧 있을 행정사무감사와 예산안 심사가 마음에 걸렸다. 예산결산특별위원회 담당 전문위원인 내가 집행기관의 예산회계과장과 그것도 하필 예산안 심사 직전에 밥을 먹는다는 것이 영 마뜩잖아 보였다. 물론 이럴 때 얼굴이나 익히고 통성명이나 하자는 정도로 가볍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밥 한끼 먹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하지만 내 마음은 편하지 않았고 결국 식사 약속은 기약없이 다음으로 미뤘다.
논어(論語)에서 유래된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은 인간관계에서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라는 의미의 고사성어인데, 지방의회 전문위원과 집행기관의 관계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전문위원도 사람이다 보니 집행기관과 지나치게 가깝게 지내면 본래의 역할을 놓칠지도 모른다. 안건의 쟁점이나 본질과 상관없이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흐를 수 있다. 그래서 기자와 취재원뿐만 아니라 전문위원도 집행기관 공무원들과 가깝지도 멀지도 않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직업관이다. 티타임은 환영해도 저녁 식사는 피하려고 한다. 내가 이렇게 유난스럽게 집행기관 직원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려는 이유가 있다. 처음 구의회로 이직했을 때 구의원의 소소한 정보부터 쟁점 사안에 대한 보이지 않는 입장에 이르기까지 일거수일투족이 거의 실시간으로 구청에 공유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인사권이 독립된 지금이야 덜 하지만 당시 그런 빨대(?) 역할을 가장 열심히 하던 사람이 퇴직을 얼마 앞둔 행정직 전문위원들과 의회사무국의 팀장들이었다. 이것은 마치 의원들이 가지고 있는 카드는 모두 펼쳐놓고 집행기관의 카드는 하나도 모른 채 카드 게임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방의원의 수준 낮은 질의, 억지스러운 지적, 과도한 자료제출 요구 등도 바뀌어야 하지만 행정관료에 의한 이런 지방의회 무력화 역시 경계해야 한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을 내 직업윤리의 하나로 여기게 된 이유이다.
흔히 지방의회와 집행기관은 견제와 균형의 관계이자 지방자치를 이끄는 두 개의 수레바퀴로 비유한다. 하지만 기초의회 사무기구의 직원들이 집행기관을 상대로 견제와 균형을 도모하기는 쉽지 않다. 왜 그럴까? 집행기관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기초의회 사무기구보다 우위에 있도록 법과 제도가 짜여있기 때문이다. 2022년 1월 단체장이 행사하던 지방의회 사무기구 직원의 인사권이 의장에게 넘어왔다고 하지만 기초의회 사무기구 직원들은 여전히 집행기관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예산편성권과 조직권의 실질적인 보장이 없는 구의회 인사권 독립은 사실상 반쪽짜리 독립이라는 자조섞인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이다. 엊그제까지 구청에서 수십 년 근무하던 사람이 의회사무기구로 파견이나 전입했다고 해서 갑자기 의회 중심으로 생각이 바뀔까? 한 다리만 건너면 다 아는 사이인 기초지자체에서 그렇게 하기는 인간적으로 쉽진 않다. 그래서 기초의회 사무기구 직원일수록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원칙을 강조하고 싶다. 그동안의 공무원 경력과 상관없이 이제부터는 지금, 여기 의회를 중심으로 생각하자고 말이다.
예전에 모 일간지에서 읽은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인터뷰 기사가 오랫동안 뇌리에 남았던 적이 있다. 자신은 영화판에서 감독이나 제작자 등의 절친이 별로 없다고 했다. 내 눈엔 그의 첫인상이 똘똘이 스머프와 비슷하길래 내성적이거나 모가 난 성격이라 그런가 싶었는데 그의 답변이 의외였다. 영화관계자와 너무 가까우면 평론하기가 불편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발언을 보면서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아, 지방의회 전문위원도 집행기관 직원들과 자주 술 먹고 밥 먹지 못한다고 자책할 필요까지는 없겠구나.’ 물론 이름만 들으면 금방 알 수 있는 이동진 영화평론가이기 때문에 이런 관계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면 영화판에서 왕따를 감수해야 할 테니까. 지금이야 그러려니 하겠지만 짐작건대 이동진 평론가도 초반엔 ‘그 평론가 싸가지가 있네, 없네’ 같은 영화관계자의 뒷담화가 적지 않았을 거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좋은 전문위원’에 대한 정의(定義) 역시 입장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집행기관 공무원 입장에서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관료집단의 처지를 가급적 많이 고려해 정상 참작해주길 바란다. 구청장 제출 안건의 경우 법적 검토의견만 짧게 작성해주는 전문위원 검토보고서를 좋아한다. 반면에 의원은 안건의 이모저모를 따져서 착안 사항을 풍부하게 작성한 전문위원의 검토보고서를 선호한다. 과연 주민들은 어떤 것을 좋아할까? 판단의 관건은 ‘일의 본질에 얼마나 접근하느냐’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