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성장하고 있다는 것
나는 여전히 심리상담을 받는다. 오늘도 역시 지난 1주일 동안 있었던 일들을 선생님한테 보고한다.
“지난 한 주 동안에는요, 직장은 무탈했어요. 질문이 많았던 동료 선생님 질문도 많이 줄어서 저를 덜 힘들게했고, 업무량도 적당했어요. 집에서 엄마랑 크게 싸우지도 않고, 이제는 기분 나쁘면 기분 나쁘다고 장난스럽게 표현도 잘 했어요. 그리고, 제가 다니던 모임에 새로운 친구가 와서 반가웠어요. 저희 회사 근처에 직장이 있는 친구였어요. 저런 친구랑 연애하면 즐겁겠다는 생각도 해봤어요. 예전에 만났던 남자친구처럼 마음에 결핍있는 사람 말고, 같이 있으면 그냥 즐겁기만한 사람을 만나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얘기를 하는데, 문득. ‘이제는 마음에 결핍이 있거나 공허한 사람은 안 만날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항상 누군가에게 맞춰주는 삶은 살았었다. 엄마의 명예욕과 지적 욕구를 대신 채워주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했고, 남자친구의 마음을 채워주기 위해 그를 많이 이뻐해줬었다. 그러는 동안 내가 너무 지치고 소진되는 걸 몰랐다. 내가 나를 너무 갉아먹었다. 나를 너무 홀대하고 함부로 했었다.
최근에 나에게 호감을 표현했던 친구가 하나 있었다. 정확하지 않아서 호감을 표현한건지, 잠깐 친하게 지낸건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그 친구에게서도 마음의 구멍이 보인다. 예전 같으면 얼른 ‘내가 또 사랑을 쏟아 부어 주어야겠구나’ 싶었겠지만 이제는 싫다. 내가 너무 힘들다. 그냥 단순하게 만나서 깔깔거리면서 장난이나치고 즐겁고 기쁘고 재미있기만 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나는 나도 완벽하지 않고 마음이 충만한 사람이 아닌데, 남의 마음 구멍 채워주느라 급급했던 것 같다. 엄마의 낮은 자존감을 채워주기 위해 공부하고 엄마의 명예욕을 채워주기 위해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노력했다. “딸, 나중에 커서 꼭 선생님 되어야 해.” 참, 우리 엄마도 너무 했었다. 본인이 좀 직접하시지.
이제 마음 구멍있는 남자친구들한테 정성 쏟느라 내 마음 구멍나는 것도 몰랐던 거 이제 안 하려고 한다. 나도 내 마음 구멍 꿰매어 가고 있으니까, 마음 튼튼한 남자 만나서 또 꽁냥거리면서 즐겁게 살아야겠다.
전 남자친구한테 갑자기 미안했다. 이제 오빠 같은 사람 못 만날 것 같아. 집 앞 사거리에서 펑펑 울었다. 집에 와서 또 엉엉 울었다. 이제 오빠 같은 사람은 못 만나겠네…
상담받으면서 마음이 성숙해지는 내가 너무 좋다. 오늘은 또, 인생 곡선을 그려보면서 지난 삶을 살아 오는 동안 행복했던 시절에 대해 이야기를 좀 했다.
“중학생 때, 그때 제가 너무 행복했던 것 같았요. 친구들 무리 속에서 이쁨 받으면서 친구들이랑 어울려놀던 게, 행복했어요. 친구들이 제가 1살 어리고, 작고 귀엽고 공부 조금 잘 한다고 자랑스러워해줬던 것 같아요. 그때 행복했어요. 특별하게 어딜 가서 놀지 않아도 그냥 친구들 무리 속에 있으면 안정감도 느끼고 행복했었어요. 딱 80점 만큼의 시험점수를 받을 때 제일 편하고 행복한 것 같아요.”
그때의 나에게 잠깐 돌아가본다. 문을 열고 15살의 나에게 가서 말한다.
“OO아, 지금처럼 아무 생각없이 열심히 뭘 하지 말고 그냥 행복하게 살아. 계속 그렇게 별 생각없이, 고민없이 계속 행복하게 살아야 돼. 너는 너무 귀엽고 이쁘고 사랑스러워. 앞으로도 계속 그럴거야. OO아, 내가 너를 지켜줄게. 힘들면 내가 또 와서 안아줄게. 행복해야해.”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따라한다. 내 이름을 부르는데 목이 메인다. 이름 부르는 게 참으로 어려웠다. 억지로 목구멍을 열고 소리내어서 따라한다. 오글 거리는 대사들을 따라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입 밖으로 음성이 나올 수 있도록 해본다. 다 끝내고 나니, 기분이 좋고 속이 시원하다. 행복함을 느끼는 것도 같다.
‘아, 이제 내가 정서적으로 많이 안정되고 성숙해져 가는 구나’를 느낀다. 어우, 내가 나를 힘들게 했던 마음들과 감정들에게 벗어나니까 너무 편하다. 속이 시원하다. 편하니까 행복하다. 오늘도 이렇게 한걸음 성숙해져가고, 또 하루를 채워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