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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텨낸 시간들: 가정폭력과 성장

잊히지 않는 기억들

by 구황작물

어릴 적 나는 누나와 많이 달랐다. 두 살 위인 누나는 키도 훨씬 크고 얼굴도 예뻤다.

심지어 성장이 끝난 지금도 누나가 나보다 3cm나 더 크다.


그래서 주변의 사랑을 거의 독차지했다.


심지어 가족의 사랑마저도. 지금 서른셋의 내가 돌아봐도 그건 부모님의 훈육이 아니라 분명한 차별이었고 폭력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아토피로 많이 아팠다.


스트레스관리나, 식단관리, 약 등으로 지금은 거의 완치에 가깝지만 어릴 적 방법을 몰랐던 나는 피부가 매우 안좋았다.


혐오스러울 정도로


관리법도 모르던 시절, 밤새 긁고 울다 보면 아침에 눈을 뜨면 베개가 피로 물들었었다. 진물과 가려움과 수치심 속에서 버텼다. 초등학교 때는 긴 옷으로 가릴 수 있었지만, 교복을 입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대인기피가 극도로 심해졌다.


어머니의 훈육은 회초리가 아니라 일방적인 폭력이었다.


아버지가 생활비를 안 준다며 밤 10시에 동네가 떠나가도록 발작하며 고함을 지르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 어머니를 머리채잡고 개패듯 패는 아버지의 살기어린 눈빛까지도..


열네 살 때, 아버지는 치매 걸린 친할머니를 집으로 모셨고, 집안은 며칠 동안 대변 냄새로 가득했다.


친구들과 산에서 딴 산딸기를 비닐봉지 가득 들고 와 “엄마가 좋아하시겠지” 하며 건넸지만, “아토피가 더 심해졌다”며 친구들 앞에서 내 바지를 벗기고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때리셨다.


그날의 치욕은 아직까지 생생하다.


식탁에서도 차별은 일상이었다. 맛있는 반찬은 늘 누나 앞에 놓였다.


6년 동안 아버지는 누나를 차로 등교시켜 주셨지만, 내 군 입대 날짜를 아는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혼자 입영버스를 타고 논산훈련소로 들어갔다.


훈련소 2주 차, 3분 전화 시간이 주어졌을 때 동기들은 모두 울며 통화했지만, 내 전화는 끝내 아무도 받지 않았다.


대학에서 자취하던 시절, 친구들 냉장고는 엄마가 보내준 김치와 반찬으로 가득했지만 내 냉장고는 늘 텅 비어 있었다.


가정폭력과 피부 스트레스로 밥조차 제대로 먹지 못해, 중학생 내내 얼굴에는 마른버짐이 퍼져 있었다. 학교에서 그런 얼굴은 나뿐이라, 매일이 버텨냄이었다.


그러다 내가 회사를 다니며 돈을 벌기 시작하자, 가끔 전화가 왔다. 내용은 늘 같았다. 돈을 보내달라는 말. 전화를 받는 순간마다 속이 뒤집혔다.


마치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요구했다. “이웃집 누구 아들은 매달 얼마씩 보낸다”는 비교까지.


그동안 버린 자식처럼 대하다가, 내가 돈을 벌자 그제야 부모 노릇을 하려는 듯한 태도


—그 모든 게 역겨웠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그럴일 없겠지만 언제 다시 만나게 된다면


당신들 왜 그렇게 했냐고 정말 나빴다고 얘기하고 싶은데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과거를 들추는 건 상대방도 슬픈 일이지만


끔찍한 기억을 더듬어서 입 밖으로 내는 나에게도 정말 슬픈 일이다.


그래서 차마 맨 정신으로 얘기할 수 없어서 술 취한 오늘 글로 남긴다..




부디 다음 생에 태어나면 내 자식으로 태어나길 바란다.. 사랑이 뭔지 가르쳐 줄 테니


PS. 이 글이 모든 가정폭력을 당했던 이들에게 조금의 위안을 주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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