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 한 쪽 내놨다.
우리 회사는 종합무역상사로 수산물과 마트에 들어가는 모든 제품들을 해외로 수출하는 회사였다.
PB제품만 3천개에 NB제품까지 1만2천여개를 가진 업계에선 꽤 유명했다.
내가 맡은 직무는 밴쿠버, 뉴욕에 제품들을 수출하는 오퍼레이션 일을 맡았다.
미국 바이어 측에서 어떤 제품들이 필요하다고 오더장 보내면 받아서 나는 각 제조사(농심, 오뚜기 cj, 면공장 과자공장.. 등)에 연락을 해서 공장에 발주에 넣고 각 제조사로부터 우리 회사 창고로 받으면 검수를 진행하고
회사 창고로 입고일을 맞춰 컨테이너 부킹하고 운송사에 연락해 컨테이너를 부두에 보내는 일까지였다.
말로 적으니 간단해 보이지만 신경 써야 할 게 상당히 많았다.
제품마다 수출라벨도 붙여야 하고 FDA에서 라벨규정 바뀌면 디자인팀에 얘기해서 라벨변경도 해야 하고.
박스까대기(컨테이너에 한 박스씩 싣는 작업)도 해야 하고
하루하루 배우는 게 정말 신났었다.
한 여름에 저녁 늦게까지 와이셔츠가 땀범벅이 되도록 까대기 하고 동기 선배들과 나가서 먹는 그때 소주 맛은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일이 힘드니 같이 있는 사람들이 끈끈해지고 서로 더 챙겨주려고 했던 것 같다.
일을 하나씩 배우고 시스템을 알고 나니
업무가 보람찼다.
배로 45일을 가야 하는 미주 땅에 우리 한국 제품들이 그 먼 땅에서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 멋진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한류열풍의 주역인 블랙핑크나 BTS,, 손흥민, 페이커, 김연아 등이 있기 전에 K-FOOD를 알린 수출역군들이 있었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라벨 붙이는 아주머니, 냉동창고에서 손 녹여가며 일하는 직원들부터 늦은 밤 쏟아지는 잠을 참아가며 운전하는 트레일러 기사님들
그들 모두가 하나의 톱니바퀴처럼 굴러가며
먼 해외에 K푸드를 알릴 수 있게 한 우리나라의 영웅들이었다.
이 사실을 알고 나니 일이 즐거워졌다.
어떤 하찮은 일을 하던 보람이 있었다.
그렇게 회사에서 인정받고 있을 때
입사 한지 몇 개월 후 되었을 때 이사님이 한번씩 따로 불러 나에게 베트남 현지 유통사정이랑 통관,, 창고 부지 등 이것저것 알아보라고 조금씩 미션을 주셨다.
미션을 받은 대로 조사를 하고
지금 보면 참 귀여운 내 나름대로의 베트남 사업계획서도 만들어 봤다.
내가 베트남 떠나기 전 날에 여태까지 모은 자료를 보니 두꺼운 레미제라블 벽돌 책처럼 투명 파일철이 3개가 만들어졌었다.
그 당시에 2020년은 코로나가 심해지기 시작했을 때라 베트남 하늘길이 막혔었다.
알아보니 한인회를 통해 삼성 주재원 직원들 및 가족들은 특별입국으로 베트남의 허가를 받아 몇백 명씩 입국하고 있었다.
경제활동을 하는 외국기업에 대해서는 특별입국이 허가가 되었었다.
그래서 나는 다낭한인회 주관으로 하는 특별입국으로 삼성주재원들 틈에 끼여서 가게 베트남을 가게 되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회장님은 젊은 직원 보내는 것을 반대했던 것 같다.
현지직원들을 관리하고 지사를 운영해야 하는 해외주재원으로 나가는 것에는 열정과 의지도 중요하겠지만 한 회사를 운영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연륜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이사님은 나를 믿어 주셨던 것 같다.
"내 팔 한쪽 내놨다, 잘하고 와라"
멍청하게도 이 말을 그땐 이해 못 했는데 꽤 시간이 흐른 나중에서야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게 특별입국에 필요한 각종 서류,, 코로나 음성확인서부터 비자발급을 위한 서류 등 준비하면서
모든 것이 빠르게 흘러갔다.
중국지사에서 오셔서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신 정 팀장님.. 고마운 선배들과 동기들의 응원을 받고 인천으로 출발하기 전 날은 이사님의 생일이었다.
감사인사를 전하고 싶었는데 명분이 없었는데 잘 됐다.
아침 일찍 정장샵에 들러 정장 한 벌,, 그리고 멋진 넥타이를 쇼핑가방에 넣어 퇴근하시는 주차장 앞에서 전해드리고 왔다.
그렇게 나의 베트남 주재원 생활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