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웠던 내 청춘의 베트남
2017년 여름은 한국도 뜨거웠지만 베트남은 정말 뜨거웠다. 모든 게
공항에서 울며 날 배웅하던 여자친구 또한 잊혀질 만큼.
그 당시 나에게 베트남은 정말 강렬했다. 나는 젊었고 패기 넘쳤었다.
혈기왕성한 20대 중반의 나이에 열정 가득한 외국인을 바라보는 현지들의 시선이 마치 연예인이 된 것 마냥,
놀이기구를 타는 어린아이처럼 미친 듯이 놀았다.
교수님의 친구분인 사장님은 한 동년배의 현지인분과 동업하셨는데
물류회사와 유학 비자회사를 겸했었다.
오전에는 물류회사, 한국 바이어와 소통 및 문의처리를 했고 오후에는 베트남 고등학생들을 한국의 이미그레이션에 통과시키기 위한 한국어 발음, 문화 교육을 했었다.
첫 한 3달은 교수님께 누가 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일도 하고 학생들하고 친해져서 고향에 초대도 받고
열심히 살았다.
사장님이 워낙 하시는 일이 많았고 하루 대부분을 나가서 일을 보셔서 어느 순간 나에게 모든 권한을 주셨고 그때 경영에 대해서 많이 배운 것 같다.
피 끓는 청춘은 고속도로에서 빠른 속도로 가는 트럭 바퀴 있는 돌부리처럼 쉬운 유혹에도 튕겨져 나가 버렸다.
노는 것을 한창 좋아할 나이였지
업무가 적응이 되고 베트남생활에 적응을 할 때 즈음
낮에 일을 하고도 남은 에너지를 소모할 곳이 없어 zalo나 데이트채팅앱으로 밤에는 여러 베트남 여자들을 만나고 짧고 강렬한 만남을 했다.
어딜 가든 자신감 있고 당당한 모습이 그들의 눈에는 굉장한 호감으로 보였던 것 같다.
그렇게 뜨거운 베트남에서의 첫 7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나는 졸업을 하기 위해 추운 어느 날 한국으로 돌아갔다.
베트남에는 어떤 마성이 있어서 한번 베트남에 온 남자들은 다시 베트남을 찾게 된다고들 우스갯소리로 선배님들이 하는 걸 들었던 기억이 난다.
졸업을 하고 집안이 조금 나아졌다. 누님은 큰 정유회사의 회계직원, 아버지는 건설노동자로 서로의 인생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사춘기 시절 그 미웠던 가족들을 향한 감정들은 상처가 자연 치유된 듯이 나도 그들 가족의 일원이 되고 싶었다.
한국의 한 회사에 내 이력서를 넣었다.
강점은 물류관리사, 지게차, 굴삭기, 자동차정비 기능사, 컨테이너크레인 장비 자격증 등..
새장에 갇힌 사무실보다는 역동적인 창고가 적성에 맞을 것 같아서 준비한 자격증들로
보는 이에게 무역학을 전공했지만 기계를 다루는 창고직이 적합했을 듯한 이력서로 어디든 그저 취업하고 일을 하고 싶었다.
--상사 창고팀 직원 모집 구인공고를 보고 지원했고 서류 합격 후 일주일 뒤 면접을 봤다.
10명 정도 되는 대기인원실에 나와 같이 정장이 낯설어 보이는 사회초년생들 사이에서 손에서 흐르는 땀을 정장바지에 닦아내며 제일 마지막에 내 이름을 호명할 때까지 기다렸다.
내 이름이 들렸고 수많은 자사제품들이 가득한 회의실에서 면접을 봤다.
강렬한 눈빛으로 적장의 목을 베는 심정으로 긴장하지 않은 척하며 애를 썼다.
면접관은 이사님, 그리고 회장님의 2세 둘째 아들
면접에서 뻔한 얘기들을 주고받다가 자기소개서에 적은 베트남 장기현장실습 이력이 이사님 눈에 뜨였었던 것 같다.
다른 놈들 한국에서 토익자격증 따고 취업준비할 동안 넌 베트남에서 7개월 동안 뭐 했냐
네 이사님 저는 경영을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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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팀에 TO 있지요?
???
이사님 : 하나 만드세요
인사팀 : 다음 주 월요일까지 무역 1팀으로 오시면 됩니다.
창고팀에 들어가고 싶던 내가 그렇게 무역팀에 들어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