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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아프다

삶은 누구에게나 소설이다

by 레인송


딸이 16세가 되었을 때, 나는 51살이 되었다.

우린 잘 맞는 친구 같은 모녀다. 시험 한 달 전부터 딸은 비장한 각오로 공부에 온 집중을 다한다. 아무리 꼬셔도 놀아주지 않는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둘이 뒤엉켜 앉아 순풍산부인과를 보며 까르르 넘어가는 딸을 보는 행복도 그 기간엔 사라진다. 누굴 닮아 저러나 하며 배부른 투정을 하다가 나의 16살을 떠올렸다. 분명 내 삶의 한 부분이건만 다른 이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나도 저렇게 숨 쉬는 것만으로도 예뻤던 때가 있었는데.. 하며 감구 하다 나의 어린 시절을 기록하고 싶어졌다.




혹독한 20대는 순진했던 지난 시간을 지워놓았다. 지금 생각하면 지옥 같았던 20대 역시도 빛나는 청춘의 한 부분이라는 생각에 좀 더 아껴 쓰고 남겨 둘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누구나 인생의 황금기를 마음 한편에 고이 접어놓고 산다.

언제고 펼쳐보면 심장이 뜨거워지는 나만의 이야기.

나의 화양연화는 단연코 10대였다고 말한다.

진짜 세상을 알기 전, 어설프고 철없던 그 시절이 좋았다.



딸은 성장할수록 나를 쏙 빼닮아간다. 까탈스러움도, 깔끔 떠는 것도, 급한 성격도 닮아 내가 조금만 우왕좌왕해도 못 참고 잔소리를 해댄다. 낯선 여행길에선 오롯이 나에게 의지하던 녀석인데 이제는 내가 녀석에게 의지한다.

서럽다.


아이는 점점 성장하는데 반해 나는 많은 게 흐릿해지고 손에 익지 않은 일들이 늘어나는 아줌마가 되어간다.

엄마인 채 이대로 늙어 죽고 싶지 않다.

엄마 이전에 나는 재기 발랄한 소녀였고 멋쟁이 아가씨였으며 커리어 우먼이었다.

딸의 눈에는 그저 아빠의 월급날과 자식의 행복만 오매불망 바라는 엄마로 보일지도 모른다.




추억을 기록하기로 했다. 나에 대한 이야기를 남기고 싶었다. 내가 아니면 아무도 모를 이야기, 그마저도 내가 더 늙어 지나온 시간을 서서히 잃게 될 때면 거의 사라질지도 모를 이야기들이다.


무작정 노트에 두서없이 써 내려갔다. 기억이 또렷한 일들은 서너 장 술술 써내려 졌고 토막 난 이야기들은 과거로의 여행을 하듯 천천히 꺼내왔다. 기억의 끈을 잡아 올릴 때마다 생각지도 못한 또 다른 기억의 방이 연달아 문을 열었다. 40년 전의 이름들과 얼굴들이 노트 위에 또렷하게 그려졌고, 내가 온 마음으로 사랑했던 잊힌 기억들이 영상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그 길 위에 서고 싶어 부러 집을 나섰던 명일동의 플라타너스 가로수길,

사랑하는 아이와 나눈 보랏빛 등꽃아래의 약속들.

라일락 향이 진동하던 1988년 5월, 그 밤의 달과 별,

빗물에 젖은 노란 은행잎이 뒤덮인 10월의 올림픽 공원 둘레길, 이처럼 사소한 기쁨이 나를 얼마나 행복한 사람으로 살게 했는지.

지난 시간 속에 얼마나 많은 사랑과 축복이 나를 위해 존재했는지.

그리고, 내가 얼마나 용감한 소녀였는지.




10대의 기억을 들추니 신이 났다. 별 걱정 없던 시절의 이야기는 누구나 그렇듯 아름답고 유쾌하다. 그 시절의 음악을 들으며 그때의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 쥐고 있는 펜에 신이라도 들린 듯 써 내려갔다. 한동안 추억에 들떴던 기분은 이내 사라지고, 어느 순간 슬픔이 몰려들었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얼굴들이 사무치게 그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이별의 원인이 나였을 것만 같아 자책을 하기도 하고, 많은 아쉬움의 원인을 찾고 싶어 기억 속을 헤집으며 며칠밤을 보내기도 했다.

소중한 사람과 기회들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돌아가고 싶어도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나의 시간들. 분명 나의 것인데..

너무 멀리 와버렸다.


중년의 한가운데서 노년을 준비하기 위해 나름 만반의 준비를 잘하고 있다고 믿었는데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래서 추억은 그냥 묻어 두어야 하나보다.



찾고자 했던 게 분명 있었는데 길을 잃었다. 나를 찾고 싶었던 것도 같고, 어쩌면 이대로 잊히다 영원히 사라지고 말 것 같은 기억을 마지막으로 탐했던 것일 수도 있다.


노래 가사처럼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다. 이제 그만 놓아주어야겠다. 지나가버린 시간을 더는 그리워하지 않기로 했다.

아프다.




이제는 내 앞에 놓인 이야기들을 바라보고 싶다.

지금 인연들, 모든 하루하루, 크고 작은 감정들을 귀하게 끌어안고 살 것이다.

누구보다 나 자신을 사랑할 것이다.

10대의 기억 속 엉뚱하고 호기롭던 소녀, 그 소녀와 함께 아직 맛보지 못한 저 너머의 세상으로 함께 모험을 떠날 것이다.


Don't Dream It's Over ... Crowded House

Mr/Mme ... Loic Nott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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