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좋아하는 것이 이끄는 삶

삶은 누구에게나 소설이다.

by 레인송

일주일에 이틀 일을 한다. 일하러 간다기보다는 놀러 가는 기분이다. 월요일엔 강북에 위치한 꿈드림센터에서 학교밖 친구들과 역사 공부를 하고, 수요일은 동네 중학생 녀석들과 역사 공부 겸 인생공부를 한다. 친구들 엉덩이가 가벼운 탓에 보통 복습이 반이상을 차지하고 나머지 반은 잔소리 시간이다. 학창 시절 놀아본 선배로서의 조언이다. 며칠 전 수업 중 아이들이 나의 어릴 적 꿈에 관해 물었다. 영리한 몰입 대신 마음이 가는 곳에 몰두했노라 솔직하게 답했다.



초, 중학교 시절, 나의 꿈은 영국에 가는 것이었다. 듀란듀란의 콘서트를 보고, 템즈 강변을 걷고, 비틀스의 도시에 가서 그들이 첫 연주를 했다는 바에서 어른처럼 맥주를 마시는 것이다. 영국으로의 여행 말고도 올림픽을 직접 관람하고, 그래미 시상식에 초대되어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레드카펫에 서기, 마라도나의 골을 코앞에서 내 두 눈으로 보기, 그리고 친구들과의 영원한 우정을 꿈꾸었다. 어떤 꿈은 이루어졌고 아닌 것도 있다. 그때는 마음속에 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86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을 나만큼 즐긴 한국인은 없을 거라는 엄마의 말처럼 고등학교 2학년이었음에도 만사 제쳐두고 지구촌 축제를 즐겼다. 무단 조퇴와 결석을 불사한 소원성취의 대가는 뭐, 고작 성적이 박살 났다는 것과 엄마와 나란히 교무실 소파에 앉아 담임선생님의 걱정 어린 질책을 감당한 정도다. 진짜 형벌은 교무실문을 나서면서부터였다. 엄마는 학교 복도를 걸으며 앞으로 나에게 닥칠 공포의 형벌을 복화술처럼 속삭였다. 나의 사교성을 과소평가한 엄마는 관리형 독서실에 비싼 돈을 지불하고 나에게 감옥살이령을 내렸다. 집에서의 나는 말이 없었다. 그녀는 나를 아주 내성적인 아이라고 생각해 백치 아다다라고 놀리기까지 했었다. 인근 학교 학생들이 모여있는 그곳은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데 그만이었다. 다른 학교 친구까지 사귀는 바람에 공부는 더 뒷전이 되었다. 3개월 만에 독서실생활은 끝이 났다.


1989년, 듀란 듀란이 드디어 내한공연을 왔다. 학년말고사 마지막 날이 공연일이었으니 당연히 시험은 안중에도 없었고 성적은 가히 충격적인 결과였다. 엄마는 당연히 벌어질 일이라는 것을 예감한 듯 혼도 내지 않으셨다. 88년, 89년은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시절이었다. 입시가 코 앞이었지만 영화를 실컷 보러 다녔다. 야간 자율학습이 없는 날이면 혼자 종로에 가 영화를 보고는 했다. 영화가 좋으면 두 번, 세 번, 다섯 번까지도 본다. 한참이 지나 다시 보는 것도 아니고 다음 날 바로 가서 보고, 다음 날 또 보러 간다. 친구 도진이는 좋은 마음을 오래 남기기 위해 아끼고 싶다고 했다. 나는 좋으면 충족이 될 때까지 달려든다. 감정 훈련이 덜 되었을 수도 있지만 아직까지도 마찬가지인 거 보면 그리 생겨먹은 것이다.




학교는 제대로 다니기는 했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하고 다닌 일이 참 많았다. 나에게는 계절마다 이벤트가 있었다. 겨울엔 농구대잔치를 보러 잠실과 장충동에, 여름엔 배구 보러 한양대 체육관과 천안 실내 체육관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국민학교 6학년부터 용산고 경기를 보러 다니기 시작해서 중앙대를 거쳐 기아의 농구대잔치 3회 우승까지 지켜보았다. 허재선수 때문에 용산고를 응원하기는 했지만 중앙대의 모든 선수와 플레이를 좋아했다. 겨울 방학 내내 심지어 설날에도 농구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한 번은 설날에 치러진 경기도중 관중석을 향한 카메라에 내가 나오는 바람에 큰집에 모인 일가친척들이 놀람과 동시에 내흉을 한참 나누었다는 이야기를 언니로부터 전해 들었다. 엄마는 계집애가 무슨 스포츠를 그리 좋아하냐고 야단도 치고 어르기도 했지만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때는 티켓 사라고 큰돈을 덥석 주셨고, 듀란 듀란 공연 때는 존 테일러 오빠 눈에 잘 띄라고 빨간 스웨터를 사 오셨다. 한겨울 이른 아침부터 농구장에 간다며 눈을 부릅뜨고 인상을 쓰면서도 줄 설 때 추우니 신으라며 발목까지 올라온 운동화를 사주셨다. 엄마의 마음이 허용하는 데까지만 하고 말면 좋으련만, 나는 늘 거기서 더 가고, 더 해버려 매번 새드엔딩이 되었다.


좋아하는 것에 열의를 다했다. 본능이 앞서는 유아나 동물과 다를 바 없었다. 훗날 한심했노라 후회가 들기도 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도 진로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을 하지 않았다. 소련이 좋아 무작정 러시아어과를 가고 싶었을 뿐 미래의 내 모습을 그려 본 적이 없었다. 미국에 가서 영화공부도 하고 싶었지만 그 또한 그리 되기 위한 전략도 노력도 없었다. 엄마의 애간장만 탔다. 의상 전공도 엄마의 제안이었다. 마침 그 해 의상과가 이과로 편입되며 실기 비중이 축소되는 바람에 가능한 대안이었다. 동네 미술 학원에서 사 개월 동안 그림을 그렸다. 사활을 걸고 한 것은 아니지만 학원생활이 재미있기도 하고 그림이 제법 빨리 늘기도 해서 열심히 다녔다. 실기 시험도 운 좋게 치를 수 있었다. 한 번도 그려 본 적 없는 두 개의 사물이 주제로 나왔다. 당황은 했지만 아이들이 시작하기를 기다렸다가 2.0의 시력으로 날름 캐치한 후 재빨리 그려냈다. 다른 건 몰라도 손이 빨라 시간 안에 끝낼 수 있었다. 나중에 보니 내가 커닝한 친구는 학교에 없었다. 덕분에 붙었다고 솔직히 고백하고 밥이라도 살 요량이었는데.




대학생이 되고 성인이 되었다. 연애를 하고, 화장도 하고, 나이트도 다녔다. 대학생활 초반만 하더라도 고등학생때와 별 반 다를 바 없이 천둥벌거숭이였다. 새벽까지 영화를 보느라 지각을 밥 먹듯이 하고, 늦으면 학교에서 세수하고, 머리가 거추장스러우면 화장실에서 머리도 자르고, 출석 체크만 하고 창밖으로 가방을 던진 후 화장실 간다고 나가 집으로 가버리기도 했다. 수업은 제대로 안 들어도 운동장에서 남학생들이 농구를 하고 있으면 창피한 줄도 모르고 달려가 "나도 껴주면 안 돼요?" 하며 탐탁지 않게 보거나 말거나 엉성한 드리블을 하며 그들의 운동시간을 망쳐놓았다. 안하무인에다 꼴통짓은 대학 가서도 변함이 없었다.


전공 수업에는 흥미가 없었다. 보그와 엘르등의 패션지를 보며 마리오 테스티노, 리처드 아베돈등 패션 사진작가에 매료되어 사진과를 기웃거렸다. 과 활동보다 사진과 활동을 더 적극적으로 했다. 과 MT는 안 가도 사진과 MT는 따라나섰다. 사진과 교수님이 나를 사진과로 착각 했을 정도로 사진에 푹 빠져 지내는 바람에 성적은 바닥이었으나 겨우 F는 면했다. 놀랍게도 취업은 과에서 가장 먼저 하게 되었다. 교수님들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하셨다. 취업은 했지만 마음은 늘 좋아하는 곳을 향했다. 디자인실은 여자들의 공간이다. 기 센 여자들이 연차 별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막내인 나는 승냥이 굴에 들어간 어린 토끼였다. 군기가 바짝 들지 않으면 못 버틴다. 의외로 나에게 근성이 있었다. 일본 문화복장 출신 두 명과 미국 파슨즈 스쿨 출신의 인턴과 3개월 경쟁 끝에 나는 정직원이 되었다. 집도 안 가고 업체 상담용 탁자에 원단을 깔고 자며 밤새 일한 덕이었다. 근사한 생활이었다. 업무량은 살인적이지만 그만한 보수와 대우가 있었고 잦은 해외 출장과 남들보다 계절을 앞서 사는 것도 좋았다.


직장생활에 불만이 있거나 재미없던 것도 아닌데 나는 늘 뛰쳐나가 내가 원하는 세상 속에 속하기를 갈망했다. 머릿속에서 나는 이미 영화인이었다. 모두 퇴근한 토요일, 미리 준비한 영화 제작사 30여 군데에 전화를 걸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영화 쪽 전공은 아니지만 영화 관련 일을 하고 싶습니다"

황당해하면서도 다들 정중히 곤란하다고 답했다. 딱 한 군데 만은 관심을 보였다. 이것저것 나에 대해 물어보기도 해서 희망적이라 생각하며 열심히 나에 대한 아니, 영화에 대한 나의 사랑을 쏟아냈다. 그분은 매우 진지하게 나의 열정이 펼쳐지기를 바라시는 듯했다. 그분은 나에게 영화 쪽에서 코디네이터 일을 해보라고 했다. 아직 자리잡지 못한 분야고 전문가라 할만한 사람도 아직 없으니 영화판에 있으면서 개척해 보라는 진심 어린 조언이었다. 그리고 곧 영화 제작이 들어가는데 와서 해보겠냐고 물었다. 듣자마자 머릿속에서 사표를 어떻게 쓸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감독의 이름을 듣자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이 예스! 예스! 였다. 그런데 그분의 다음 한마디에 마음을 돌리고 말았다.

"월급은 따로 없고 차비 정도만 줄 수 있어요"

"그게 얼마 정도예요?"

"콘티작업 도와주는 다른 초보 스텝도 지금 삼십만 원을 못 받아요"

회사에서 받고 있는 월급 팔십팔만원도 적은데 삼십도 안된다니. 생각해 보고 전화드리겠다며 황급히 전화를 끓었다. 패배자가 된 기분이었다. 여태껏 꿈꿔온 열정을 나 스스로 부정한 꼴이 되고 말았다. 애타는 척만 했지 정작 뛰어들 준비는 전혀 하지 않았다. '너는 입만 살았어'라는 엄마 말이 증명되었다.




중학교 1학년, 수업시간임에도 이어폰을 꽂고 몰래 음악을 듣다 걸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급기야 압수당한 내 마이마이가 교장실문턱을 넘어갔던 적이 있다. 그때 교장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이다.

"너 그렇게 팝송만 듣다 머리가 밥통 된다"

예언이 현실이 된 것만 같았다. 꿈이라고 생각했던 곳에 스스로 등 돌린 후 나는 꿈이 없는, 아예 없었던 사람이 되었다. 스스로 사회적 맥락의 범주에서 한참 벗어난 인간임을 자각한 순간 그동안 나를 지탱해 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하찮게 느껴졌다. 황홀한 감정만 쫒다 허술한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치고 좋은 직업을 갖게 되어 스스로도 천운이라 생각한다. 비록 꿈도 아니었고 계획했던 진로도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패션디자이너로서 12년을 보냈다.


꿈은 날렸지만 좋아하는 마음은 버릴 수가 없었다. 좋아하는 데 버려질 리 만무하다. 나 같은 사람한테 한번 찍히면 평생 단짝이 되는 거다. 10대부터 쫓아다니던 음악, 영화, 스포츠를 잠시도 떠난 적이 없다.

집과 차 안에는 늘 80년대 팝과 영화음악들이 재생된다. 걷거나 무의식 중엔 휘파람으로 대신한다. 지금까지도 올림픽 시즌엔 밤 낮 없이 TV앞에 진을 치고, 좋은 영화를 만나면 보고 또 보고를 반복한다. 지난봄, 94화나 되는 진격의 거인을 한 달 동안 두 번 연속해서 보며 감독 이사야마 하지메의 천재성에 심장이 뛰었다. 극 중 조사병단의 구호인 '신조오 사사게요'를 가족들에게 시도 때도 없이 외치기도 하고 주제가를 외워 부르기도 했다. 남편은 저런 만화를 왜 두 번이나 보냐며 비웃었다.

"나가! 나가! 뭘 안다고? 이건 그냥 만화가 아니거든!"

그래 , 나만의 세상이다. 뭐라 해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여전히 내 심장을 뛰게 하니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그 좋아하는 마음이 심장 한가운데 떡하니 살고있으니 힘든 시절 잘 버티고 명랑한 사람으로 살아진 거다.




동네 역사반 친구들이 또 묻는다.

"선생님은 무슨 대학, 무슨 과 나왔어요?"

"ㅇㅇ대학 의상과"

"그런데 왜 역사 선생님 됐어요?"

내가 한국사를 공부하게 된 계기는 최 재형 선생님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서이다.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그분의 애국심과 희생에 감동받아 그때부터 독립운동가들의 생애를 찾아보고 관련 서적을 모으기 시작했다. 2년 가까이 역사 다큐멘터리를 보고 유튜브를 통해 역사 학자들의 강의를 듣다 보니 한국사 능력 시험을 보면 잘 볼 것만 같았다. 한 달 동안 마음먹고 공부해 시험을 치렀다. 우리 집 역사상 최소금액의 카드값이 나와 남편이 매우 기뻐했을 정도로 외출도 안 하고 공부를 했다. 백점이 목표였으나 안타깝게도 두 개 틀리고 1급에 합격했다. 몇 달 후, 공부할 때 풀었던 기출문제를 보는데 못 풀겠는 문제가 제법 많을 정도로 잊어버렸길래 더 잊기 전에 역사 지도사 1급 시험을 보게 되었다. 한능검 공부하면서도 독립운동 선생님들은 그냥 넘어가질 못하고 일일이 사진과 생애를 찾아보며 울먹이곤 했다. 그렇게 역사 선생님이 되었다. 선생님이라기보다 독립운동에 몸 바친 분들이 지켜낸 대한민국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어른이 되었다. 내가 좋아서 하게 된 공부를 아이들과 나누고 싶어 봉사로 시작한 일이 이제는 돈도 벌게 해 준다.




만약, 지금 나에게 좋아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심장이 없다면 생기 없는 아줌마로 살고 있을 것이다. 좋아하는 게 많으면 영혼은 평온하고 몸은 바쁘다. 내 인생을 가득 채웠던 좋아하는 마음들은 나의 심장을 두드려 가슴 뛰는 순간들을 주었고, 지친 밤의 휴식처가 되어주었다. 스스로에게 채찍질할 때도 좋아하는 마음은 조용히 나를 위로해 주었다. 진심으로 좋아했던, 작지만 깊고 뜨거운 마음을 사랑한다. 마음 끌리는 대로 살자.





Summer Song ... Chad & Jeremy

Le temp est bon ... Bon Entendeur & Isabelle Pierre

Hold On ... Santana

You Got It ... Roy Orbison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