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누구에게나 소설이다
강동구 명일동은 투박한 분위기의 서울 변두리 동네다. 지금에야 서울 쏠림현상과 재개발 덕에 20억을 호가하는 아파트들이 들어서기는 했지만 내가 살았던 8,90년대만 하더라도 대형 단지의 낡은 구축 아파트와 빌라촌, 다닥다닥 붙은 연립 주택 단지가 대부분인 서민 배드 타운이었다.
친구 도진이와 주영이의 집은 천호동의 3층 주택이었다. 아버님들이 모두 공무원이셨다. 안정적인 직업 덕분에 일찍이 집도 마련하고 세도 받는 알부자였다. 그렇다고 여유가 있어 허튼곳에 돈을 쓰거나 하지는 않았다. 미선이네는 집 외관부터 다른 집과 달리 부티가 흘렀다. 내부 역시도 그러해서 TV에서나 보던 바로크식 가구들과 벽난로가 있었고, 미선이가 통통해서 테가 안 났을 뿐 옷이며 가방 등이 좋아 보였다. 수현이네는 철물점을 운영하셨고, 우리 엄마는 옷 장사를 하셨다. 장사하는 집은 재산은 없지만 현금이 늘 주머니 속에 있었고, 직장에 다니는 집은 현금은 궁하지만 깔고 앉은 재산은 그래도 조금이나마 있었다. 어린 내 눈엔 경혜네가 가장 빈곤했다. 바로 위 오빠와 12살이나 차이가 나는 늦둥이 경혜의 부모님은 연세가 이미 60이 넘으셨다. 아버지는 특정한 직업 없이 늘 술에 취해계셨고 어머니의 식당 일과 작은 오빠의 월급으로 살아갔다. 명일 국민학교 뒤 넓은 밭, 사잇길을 가로지르면 파란 지붕의 키 작은 집들이 쪼로록 줄지어 서있는 동네에 경혜의 집이 있었다. 60년대 지어진 동네로서 동네 한가운데 우물이 있었다. 근처 트램펄린장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땀범벅이 되면 늘 그 우물에 가서 얼굴도 씻고 목도 축였다. 3층 벽돌집, 슬레이트 지붕의 단출한 집, 낡은 주공 아파트 상관없이 다들 사는 모습은 비슷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기 전부터 대학 다니는 내내 아르바이트는 우리에게는 당연했다. 학교 다니고 할 때 필요한 정해진 용돈 외 다른 일이 하고 싶으면 무조건 스스로 벌어야만 했다.
새로 생긴 중학교에 배정되었다. 입학 통지서를 들고 학교에 직접 찾아가 서류를 내고, 받고를 해야 했다. 엉성한 약도 한 장 들고 학교를 찾아갔다. 장애인 복지 시설 근처라고 하는 데 주위가 온통 공사판이라 가장 학교 다운 건물의 공사현장으로 갔다. 입학처를 겨우 찾아 통지서를 내밀었더니 잘못 찾아왔다고 한다.
"여기는 남학교야. 학생, 배재 학당 몰라?"
알게 뭐람. 다시 보니 대각선 맞은편에 공사 중인 곳이 내가 다니게 될 학교였다. 우리 학교 개교 보다 건너편 남학교 개교에 더 관심이 쏠렸다. 학교가 이만 저만 큰 게 아니었고, 월요일마다 교실까지 타고 들어오는 중저음의 교가 때문이었다.
"우리 배재 학당, 배재 학당 노래 합시다. 라, 라, 라, 라 시스품바 시스품바.."
무슨 교가가 저 모양인가 싶었지만 우리 학교 교가는 못 외워도 배재 학당 교가는 귀에 박혀 나도 모르게 흥얼거렸었다. 학교의 외관과 스케일은 압도적으로 명문고의 냄새를 풍겼다. 우리 학교는 3층의 단일 건물이었는데 멀리서 보면 그 학교의 창고 같았다. 대형 학교가 들어왔으니 새로운 사람들도 대거 유입이 되었다. 배재 학당 맞은편 아파트들의 가격도 덩달아 껑충 뛰어올랐고, 상가에는 값비싼 가구나 인테리어샵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중학교 2학년, 한 친구가 전학을 왔다. 얼굴이 뽀얗고 키가 컸다. 딱 봐도 곱게 자란 테가 났다. 앞, 뒤로 앉은 덕분에 우리는 금방 친구가 되었다. 하원 후 우리와 다르게 미애는 곧장 집으로 갔기에 밖에서 함께 보내는 시간은 없었지만 교실 안에서 만큼은 단짝이었다. 어느 날 아침, 등교하자마자 미애가 가방에서 까만 물건을 꺼내 보여준다.
'아니, 이건 내가 그토록 갖지 못해 피가 마르는 SONY 카세트 플레이어!'
음악 좀 듣는 아이들에게는 지니의 램프 같은 물건이었다. 도진이와 경혜도 눈을 뚱그렇게 뜨고 달려들어 신문물을 바라본다. 하도 입을 크게 벌려 저러다 침이라도 흘릴 판이다. 남 말할 때가 아니다. 내 입은 벌써 1분 넘게 벌리고 있어 턱이 빠질 지경이다.
나에게는 분홍 마이마이가 있었다. 이전에는 대우 전자의 카세트 플레이어가 있었다. 까만 레자 커버가 씌워져 묵직한 그 아이도 엄마를 두, 세 달 졸라 겨우 얻어냈었다. 두세 달 동안 엄마는 싸게 장만할 방법을 여기저기 수소문했다.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인 아남전자 직원을 통해, 그분의 친구인 대우전자 직원에게 직원 할인가를 적용한 끝에 그나마 살 수가 있었다.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에서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 소유자는 아마도 내가 유일무이했을 것이다. 운동화에 구멍이 나면 꿰매 신고 다녔던 시절이다. 귀한 그 녀석도 1년 넘게 여기저기 들고 다니다 보니 너덜너덜 해지고 고장이 잦아 수리비 나갈 바에야 중학교 입학 선물로 퉁치차며 새로 사게 된 아이가 분홍 마이마이다. 대우의 카세트 플레이어는 시커멓고 커서 멋은 없었지만 그 아이가 처음 온 날, 나는 밤을 새웠다. 귓속 깊숙이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알란 파슨즈 프로젝트의 앨범을 들으며 눈물이 줄줄 새어 나와 헤드폰을 적실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악기 하나하나의 소리가 선명하게 들리고, 보컬의 목소리는 나의 두 눈을 바라보며 오직 나만을 위해 열창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생생했다. 알란 파슨즈 프로 젝트 다음 듀란 듀란, 에어 서플라이, 다음은 팝스 히트 퍼레이드.. 동이 트고 맞춰놓은 알람이 울릴 때까지 나만의 콘서트는 계속되었다.
분홍 마이마이는 중학교 내내 교무실을 드나들었다. 중학생이 되어 사춘기가 왔는지 음악을 한순간도 못 들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귀에서 헤드폰을 떼지 않았다. 나는 새 학년 첫 시험만 잘 보는 학생이었다. 그런 탓에 선도부 부장이 되었지만 두 달 만에 박탈당한 까닭도 헤드폰 때문이었다. 품행이 바르지 못하다는 이유였다. 애초에 안 하겠다고 했지만 그때까지 선생님들은 나의 본모습을 모르고 등 떠밀어버린 결과다.
분홍이 와 함께라면 칠흑 같은 밤 길도 두렵지 않았고, 엄마의 사랑의 매질과 담임의 모진 꾸지람도 금세 훌훌 털어졌다. 이런 분홍이를 앞에 두고 나는 의리없이 삐까뻔쩍한 일제친구를 탐하며 찬양하고 있다. 분홍이가 입을 열 때는 철커덕 둔탁한 소리를 내는데, 요 녀석은 아주 우아하게 소리도 없이 스무스하게 입을 벌린다. 닫을 때도 분홍인 가볍게 냉큼 닫고 마는데 일제는 묵직하고 단호하게 굳게 걸어 잠근다. 헤드폰은 어찌나 가볍고 세련됐는지. 하루 종일 소니를 떠올렸다. 미애의 아버지는 비행기 기장이셨다. 미애가 갖고 다니는 물건은 대부분 일제 거나 미제였다. 미애에게 가격을 묻자 일본에서 사다 주셔서 모른다고 했다.
하굣길 내내 우리의 화두는 '얼마일까?'였고, 결국 '미애는 좋겠다'로 귀결되었다.
토요일 수업을 마치고 도진이, 경혜, 수현이와 세운 상가를 갔다. 워크맨 가격을 알아내기 위한 외출이었다. 세운 상가의 골목마다 SONY, AIWA의 여러 모델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저리 많은데 내 것은 없다니. 모두 십만 원이 넘었다. 일주일 용돈이 삼천 원이었다. 하나도 안 쓰고 모아도 40주 이상 모아야 한다. 10개월이라니. 우리는 무거운 마음을 안고 경복궁으로 향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부모님이 사주는 기적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았다. 경복궁을 다 돌고 명동으로 가 천냥 뷔페에서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도 우린 뾰족한 수를 찾지 못했다. 다음 날, 수현이의 소집 요청으로 명일동 아메리카나에 다시 모였다. 그녀는 아르바이트를 제안했다. 자신의 이모도 하는 일인데 집에서 하는 거라 우리도 할 수 있다고 했다. 일감은 자신이 받아 올 테니 앞으로 각자 돈이 모여질 때까지 하원 후 자기 방에서 작업을 하자고 했다. 흔쾌히 OK를 외치며 우리는 몇 달 후, 소니와의 만남을 꿈꾸며 대동단결했다.
월요일부터 시작이었다. 수현이 방에 들어서자 커다란 비닐봉지 두 개와 작은 봉지 하나가 놓여있었다. 큰 봉투에는 형형색색의 빨대가, 작은 봉투에는 발가락만 한 크기의 종이 선글라스가 수백 개 포개져 있었다. 수현인 손가락 만한 튜브를 하나씩 건네며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작업을 설명했다. 빨대 끝 5cm 내려와서 튜브 안에 들어있는 본드를 사용해 선글라스를 붙이는 일이었다. '뭐야, 일도 아니네' 우린 둘러앉아 소니를 곧 갖게 될 희망으로 부푼 가슴을 수다로 풀었다. 하다 보니 눈이 아파오기 시작하고 생각 외로 선글라스가 빨대에서 이탈하는 일이 많아 힘이 들었다. 그제야 우리가 하는 이일의 대가에 관해 궁금해졌다.
"수현아 그런데 이거 하나 붙임 얼마야?"
"빨대 하나에 3 환인가 그럴걸"
"3원?"
"아니 3 환!"
큰 봉투에 들어있는 빨대 작업만 다 해도 겨우 3천 원이었다. 아직도 환의 화폐가치가 존재하는 것도 놀랐지만 적은 금액에 더 놀랐다. 갑자기 하기가 싫어졌다. 넷이 앉아 두 시간이나 했는데도 큰 봉투의 반에 반을 겨우 했는데 어느 세월에 각자 십만 원이나 되는 큰돈을 모으겠냐며 우린 회의적으로 돌변했다. 수현이의 이모님도 반나절 앉아서 해도 한 달에 오만 원 벌기가 힘들다고 하셨다. 빨대 프로젝트는 접기로 했다.
이번에는 도진이가 아르바이트를 물어왔다. 5시부터 밤 9시까지 4시간 일하고 13만 원이나 준다고 했다. 천호동 사거리에 새로 생긴 햄버거 가게였다. 두 명만 뽑기에 도진이와 나만 가서 면접을 보기로 했다. 일이 급했는지 당장 내일부터 출근을 하라고 했다. 이게 웬 횡재냐 싶었다. 5시부터 근무지만 첫날이라 40분 일찍 갔다. 다른 아르바이트생과 인사를 나누고 앞으로 우리가 맡게 될 파트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매니저는 우리를 위아래 훑더니 유니폼을 한 움큼 들고 왔다.
"건물 3층 화장실에 가서 맞는 걸로 갈아입고 와요"
화장실 옆칸에서 도진이의 다급한 비명이 들린다.
"악! 옷이 왜 이렇게 다 작냐?"
도진인 벌써 두벌째 패스다.
"와! 난 몰라 요건 좀 맞는데 입다가 옆구리 찢어졌어. 너 옷핀 있냐?"
"일단 나와. 가서 해결 하자. 더워 죽겠어"
밖으로 나온 도진이의 얼굴이 땀범벅이다. 나도 안 어울렸지만 도진이를 보자마자 웃음이 터졌다. 햄버거 가게 유니폼이 어쩌다 하이디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너무나 안 어울렀다.
"야, 우리 보고 햄버거 먹기 싫어져서 옆에 있는 아메리카나로 가는 거 아냐?"
"그럼 다행이고"
우리는 어울리지도, 맞지도 않은 유니폼을 입고 어색함에 뒤뚱이며 매장으로 갔다. 어, 매장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아르바이트생 두 명은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었고 사장과 매니저 언니는 밖에서 언쟁 중이다. 사장이 먼저 들어오더니 성이 잔뜩 난 목소리로 우리를 향해 말했다.
"지금 가게문 닫을 거니까 다들 집에 가. 미안한데 오늘 장사 안 해. 월급 며칠 있다 받으러 와"
사장은 그대로 사라지고 매니저가 들어와 도진이와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나도 나갈 거야. 오자마자 미안한데 사장이 다 나가래. 너넨 일을 안 해서 나갈 급여가 없으니까 햄버거라도 싸줄 테니 들고 가. 다른 아르바이트 알아봐야겠다"
도진이의 유니폼은 입을 때만큼이나 벗을 때도 힘이 들었다.
"으악! 팔이 안 빠져! 이게 뭔 난리라냐"
우린 햄버거 두 개씩을 받아 들고 수현이에게 갔다. 사연을 들은 수현이는 자지러지듯 웃더니 우리를 위로했다. 그러더니 서랍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낸다.
"헉! 뭐야 너 빨대 다 했어?"
"아니, 엄마 아빠 없을 때 내가 장사 좀 했거든. 운 좋게 몇 개 팔았어"
우리 엄마 가게는 왜 그리 멀리 있단 말인가..
집에 돌아가는 길, 손에 들고 있는 분홍이가 들려주는 WHAM의 노래를 들으며 깨달았다. 외모는 맘에 안 들지만 영국 아티스트답게 곡을 참 잘 만들었단 말이지. 그리고, 중요한 것은 듣고 있는 음악이지 플레이어의 종류가 아님을.
중2 겨울 방학, 그날의 깨달음이 무색하게 다시 한번 일제 플레이어가 탐이나 눈이 뒤집혔다. 대학생이 된 사촌 오빠의 소니가 참 예쁘단 말이다. 수현이와 도진, 그리고 나는 또 다른 아르바이트를 구하러 다녔고 마지막으로 눈 딱 감고 해 보기로 한다. 이번 일은 잠실에서 하는 일이었다. 이번엔 도넛 행상이다. 아침에 물건을 받아와 잠실 지하보도 입구와 지하도 두 군데서 2인 1조가 되어 달콤한 도넛을 팔면 되는 거다. 더도 말고 딱 두 달 일하면 소니든 아이와든 다 가질 수 있다. 장사는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내복도 모자라 위아래 두세 개씩 옷을 껴입고 일터로 드디어 출격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었다. 목도리로 얼굴의 반을 가렸지만 사람들 눈을 똑바로 보지도 못했다. 분명 사무실에선 큰 소리로 영업을 잘했는데.
"세 개 이천 원, 일곱 개 사천 원! 아침에 만든 도넛! 백화점 납품하는 도넛이 세 개 천 원, 세 개 천 원!"
입도 뻥긋할 수가 없었다. 평소와 다르게 수현이 마저도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겨우 입을 뗀다. 나는 눈을 내리 깔고 결심한다.
'분홍이면 됐어!'
맞은편에서 도진이가 터덜터덜 걸어온다.
"나 못하겠다고 말하고 왔어"
우리는 도넛이 담긴 큰 대야를 들고 사장님께 갔다.
"사장님 죄송한데요 못 하겠어요. 정말 죄송해요"
느닷없이 도진이가 울기 시작했다. 옆에서 나도 울었다.
결국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야 매끈한 소니가 내 손에 들어왔다. 보다 못한 엄마가 남대문 도깨비시장에서 사다 주셨다. 정품인지 아닌지는 상관없었다. 얇고 날렵한 옆테는 우아하고 차콜색의 몸체는 도도하다. 거기다 오토리버스의 기능까지 더한 완벽한 결정체다. 야무진 요 녀석과 고등학생 시절을 보냈다. 그 후 SONY와 AIWA를 번갈아가며 사용했다. 카세트 플레이어의 시대가 저물고 CD플레이어의 시대가 도래했다. CDP 역시 첫 아이는 SONY였다.
20대의 내 자취방, 귀중품은 요 녀석 단 하나였다. 손바닥 만한 그 녀석은 아무도 보지 못한 우주를 내 눈앞에 펼쳐 보여 주었고, 울다 지친 밤을 지켜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절벽 앞에 서있던 나를 외롭지 않게, 두렵지 않게 해 주었다. 뮤직 플레이어만 있으면 세상 두려울 것도, 걷지 못할 가시밭길도 없을 것만 같았다.
고마웠다, 얘들아.
소니를 추억하며 우리가 나눈 옛 정과 의리를 생각해 몇 해전 소니 그룹의 주식을 기념 삼아 샀다. 고공 행진 중이다.
여전히 우리는 찰떡궁합이다.
Venus ... Bananarama
Time ... Alan Parsons Project
Lost in love ... Air Supply
Clair ... Gilbert O'Sulliv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