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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 영화

삶은 누구에게나 소설이다

by 레인송

며칠 전 채널을 돌리는데 국방채널에서 영화'멤피스 벨'을 한다. 이미 영화의 중반이 지났지만 넋 놓고 보고 말았다. 개봉 당시 해리 코닉 주니어의 음반을 즐겨 듣던 터라 영화배우로 데뷔하는 그의 모습도 볼 겸 극장에서 본 영화다. 갓 스무 살 됐을 무렵이니 벌써 34년 전 영화다. 영화는 세계 2차 대전 당시 실제 존재했던 전투기 멤피스 벨의 마지막 비행에 관한 실화를 다루고 있다. 전장 속 열 명의 젊은이들이 맞닥트린 죽음의 공포와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건 마지막 비행에서의 긴박한 전투가 실감 나게 그려져 재밌게 봤던 기억이다.

영화 멤피스 벨. 우측 서있는 순서대로 매튜 모딘, 빌리 제인, 에릭 스톨츠, 모자 쓴 해리 코닉 주니어. 좌측 두 번째가 프로도 친구 샘, 션 오스틴

배우들이 젊고 아름답다. 지금은 넷플릭스 시리즈 '기묘한 이야기'에서 주인공 엘을 혹독히 훈련시킨 나쁜 파더로 유명한 매튜모딘, 아름다운 외모에 비해 작품 운이 없는 에릭 스톨츠, 타이타닉의 여주인공 로즈의 약혼자 역에 빌리 제인, 반지 원정대의 프로도가 악으로부터 절대반지를 지켜내고 임무를 완수하는데 큰 힘이 되어준 우리의 샘 , 숀 애스틴까지. 우리가 익히 봐왔던 배우들의 젊고 앳된 모습을 볼 수 있다. 개봉당시 영화를 보던 나 또한 어리고 젊었다. 그들도 나도 이제 중, 장년이 되어버렸다.


나의 감정이 녹아들어 있는 영화가 있다. 내가 만든 영화가 아님에도 영화 속에 나의 한 시절, 곁의 인연, 내 마음이 일기장처럼 스며들어있다. 요즘 들어 새로운 영화보다 전에 본 영화를 다시 보는 일이 많다. 조금 전에도 어느 채널에서 타이타닉을 하는데 결국 끝까지 보게 되었다. 1년에 한 번씩은 보게 되는 것 같다. 감정이나 기분 따라 생각나는 영화들이 있다. 가을 찬바람이 몰고온 스산한 기운에 애잔한 영화들이 보고 싶어 진다. 그리고, 나는 평생 동안 가을이 오면 사랑에 빠지고 싶어 진다. 현재 사랑하는 중임에도 그런 기분이 드는 까닭은 역시 가을 찬바람 때문일 것이다. 가을마다 선언한다.

"누구 하나 걸려봐, 로맨스 바로 시작이야"

"그래, 그러시던지" 하던 남편은 이제 대꾸도 안 한다.

아쉽게도 성사된 적은 없다.

쓸쓸한 마음에 가슴 미여지는 아픈 영화가 보고 싶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에 아름다운 사랑 영화가 생각난다.




좌부터 고디, 크리스(리버), 버니, 테디

롭 라이너 감독의 1986년 작품 'Stand by me'

네 명의 어린 소년이 주인공이지만 영화는 청소년관람불가였다. 원작자인 스티븐 킹이 영화로 만든 자신의 작품 중 가장 마음에 든다고 했을 정도로 완성도 높은 수작이다. 일찍이 리버 피닉스의 열혈 팬이었던 나는 영화 잡지와 OST를 들으며 보고 싶은 마음을 달래며 비디오가 출시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딸이 고등학생이 되던 해 우리는 나란히 침대 맡에 앉아 이 영화를 보았다. 최고의 성장 영화이자 청소년 로드무비라는 생각은 수십 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다. 딸에게 최고의 로드무비는 반지의 제왕이다.

친구 도진이와 애순, 그리고 나는 리버를 사랑했다. 리버는 다른 청춘 배우들과 다른 특별한 아우라를 지니고 있다. 극 중 배역인 크리스와 리버의 이미지는 교묘히 맞물린다. 어느 평론가의 말을 빌리자면 태어날 때부터 어른의 눈빛이었을 것만 같은 배우 리버 피닉스. 리버는 배우로서의 필모그래피 또한 흔한 할리우드 청춘스타들과 결을 달리한다. 거장 시드니 루멧감독의 '허공에의 질주', 구스 반 산트 감독의 또 다른 로드무비 '아이다호', 그리고 '스탠 바이 미'까지. 리버는 이미 어린 나이에 뛰어난 연기력으로 명감독의 러브콜을 받는 배우이자 청춘의 아이콘이 되었다. 1993년 시월의 마지막 밤, 대체불가한 배우로 성장해 가던 리버는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 날이후, 시월의 마지막 밤은 늘 춥고 시리다.

오래된 수첩속에 간직하고 있는 리버의 사진


네 소년이 실종된 동네 아이의 시체를 찾아 나서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처음으로 마을 밖을 벗어난 성장기의 소년들은 위태로운 현실과 성장의 전환점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를 갈망하면서도 두려워한다. 그 과정 속에 길이 있다. 길은 소년들의 새로운 세상이며 극복해 나아가야 할 통과의례와도 같다. 그리고 그 여정을 함께 하는 친구가 있다. '12살 때 가졌던 친구들 같은 친구는 다시 못 만났어. 누구나 그렇지 않아?' 성인이 된 고디의 내레이션처럼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는 다시 가져보지 못한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었던 순간이 있을 것이다. 내가 10대를 기록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나이 들어가며 점점 더 좋아지는 영화다. 긴 시간 스치다 만나고 헤어짐을 겪는 연인들의 이야기가 나의 한 시절, 어디쯤에 있다. 그때는 미처 몰랐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힘, 그게 영화다. 한때 곁을 내어준 그 사람의 온기가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했는지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귀한 것도 못 알아보고, 참 어리석었다.

첨밀밀은 단순한 사랑이야기가 아니다. 더 나은 삶을 향해 도시 이민자가 된 사람들, 낯선 도시 안에서의 외로움과 정체성, 삶의 목적이 다른 두 남녀의 엇갈린 사랑이 홍콩 반환이라는 시대적 변화와 맞물려 펼쳐지는 삶에 관한 진지한 영화다. 첨밀밀은 영화 안에서 OST가 갖는 힘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영화가 유독 가을과 어울리는 데엔 음악이 한 몫한다. 등려군의 목소리로 듣는 '월량대표아적심'도 좋지만 장국영이 고별공연 때 부른 '월량대표아적심'을 좋아한다. 등려군의 노래는 사랑을 속삭이는 느낌이라면 장국영의 노래는 고백의 느낌이다. 나는 연인과 사랑을 속삭이는 순간보다 막 사랑을 시작하려는 고백의 순간에 더 끌리는가 보다. 20년 후, 한 참 나이가 더 들어 이 영화를 본다면 그때도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을 흘릴까? 죽는 순간 까지도 사랑하고 싶고 사랑을 목격하면 가슴이 뛰는 인간으로 살고 싶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이 영화는 강렬하다. 내가 꿈꾸는 사랑이기도 하다.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 콜미 바이유어네임은 무려 한 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본 영화다. 아침, 저녁 두 번 본 적도 있고 여행길에 가는 비행기, 오는 비행기 안에서 봤을 정도로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영화다. 콜미 바이 유어 네임이 첫사랑의 아픈 기록의 영화라면 아이 엠 러브는 사랑을 통한 자아의 해방을 보여준다. 영화의 배경이 여름임에도 가을에 보고 싶은 이유는 사랑 때문이다. 영화 속 주인공의 사랑은 의미를 부여하지도 따져 묻지도 않는다. 대자연의 일부처럼 사랑의 마음을 쫓아 자신을 옭아맨 알을 깨고 나와 나신의 상태로 자유를 향해 달려 나간다.

나는 사랑을 해봤다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남긴 영화다.







가을이 오면, 가을 옷 꺼내듯 생각나는 영화다. 잠시의 이별조차 허용할 수 없는 감정이 사랑인데 잠깐의 사랑이라니. 누군가를 가슴에 묻고 평생 그리워하는 스토리는 나에겐 눈물 버튼이다. 영화 해바라기가 그랬고 애수, 닥터 지바고가 그렇다. 보고 싶으면 당장 봐야 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리움이란 지옥이다. 애나도 훈이도 짧은 입맞춤의 순간을 평생 마음에 품고 살아가겠지. 그보다 더한 고통이 어디 있을까를 생각하면 심장이 아프다. 탕웨이의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만큼 쓸쓸한 영화.











가장 좋아하는 장면

개봉당시 무려 다섯 번을 관람했던 작품이다. 개봉일에 친구와 관람 후. 하루 일과의 마지막처럼 단성사로 갔다. 영화의 모든 장면과 대사가 내 마음을 한 여름밤의 꿈으로 만들어버렸다. 이제는 아픈 영화가 되어버린 캡틴의 부재.. 오! 캡틴 마이 캡틴, 로빈 윌리암스의 죽음에 충격이 컸다. 그의 모든 영화를 봤고 다음 작품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대학생활의 처음은 쉽지 않았다. 모두들 대학생처럼 성숙해 보이는데 나만 여전히 유아기에 갇혀있는 사람이었다. 여전히 선머슴 같은 나와 막 피어난 꽃처럼 고운 여학생들과의 불협화음은 컸다. 도무지 여자 아이들과의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관심사와 표현방식이 동떨어졌다. 시골 촌 놈이 도시 한복판에 떨어진 듯 겉돌았다. 여성스럽게 외모를 가꾸고 차밍한 언행이 나와는 영 맞지 않았다. 성장이 더뎠다.

힘들었던 그 봄에 이 영화를 만났다. 나의 뒤늦은 성장통을 함께 해준 영화다. 영화 중반, 온통 가을빛으로 물든 장면이 있다. 베토벤의 황제 중 '환희의 송가'를 틀어놓고 키팅 선생님과 제자들이 공을 차는 장면이다. 곧이어 헨델의 곡이 흐르고 키팅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쪽지를 나누어 주며 큰소리로 외치라고 한다.

"내 인생의 노예가 아닌 지배자가 되기 위해!"

지배자로 남기 위해 나답기를 택했다. 전처럼 학교에서 머리를 감고 남자아이들과 섞여 농구도 하고 창문 너머 땡땡이도 치면서.

2학년 봄, 결국 연애를 시작하며 나는 자연스럽게 변하기 시작했다. 화장을 하고, 여러 소년과 썸을 타고, 클럽도 다니고 술도 마시며 그토록 못마땅했던 속물이 되었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작품이다.

고2 겨울 방학을 함께 보낸 영화다. 친구 승희와 함께 4번이나 대한극장으로 달려가게 만든 영화. 고3을 앞두고 방황하던 때였다. 입시의 무게는 결코 아니었고 그동안의 삶을 이제는 바꾸어야 할 때인가를 고민했다. 주변에서 끓임 없이 그러기를 주문했던 것 같다. 지금처럼 하고 싶은 데로 마음이 이끄는 데로 살 수 있을 거라는 철부지 같은 생각을 거두어 내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1시간을 달려가 이 영화를 보고 오면 어쩐지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실컷 울어서였을 수도 있다. 승희와 나, 누가 나설 것도 없이 시간이 되면 으례 대한 극장으로 갔다.

대제국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에서 전범으로, 그리고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간 푸이의 60년 인생을 그린 파란만장하고 서글픈 인생 드라마이자 역사 드라마다. 거장 베르톨루치 감독의 작품이기도 하지만 영화 최초로 실제 자금성을 무대로 촬영한 대작이라는 소문이 자자 했기에 개봉 전부터 영화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

시간적, 공간적 스케일에 압도된다. 영화는 시종일관 차갑고 무겁게 푸이의 시간을 담아낸다. 황제의 욕망을 지키기 위해 일본에 나라까지 내주는 이기적인 인간이지만 그에게 연민이 가는 일은 어쩔 수가 없어, 또 다른 황제로 등극한 마오쩌뚱의 연설을 무표정으로 듣고 있는 장면에선 매번 눈물이 났다. 마지막 귀뚜라미 씬에서는 거의 통곡하는 수준이 되었다. 절대적 존재로 키워진 황제였지만 결국 그 역시도 살아내야 하는 일 앞에서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OST가 더해져 명작의 반열에 오른 영화는 그해 아카데미에서 최다 수상작이 되었다. 존론의 남우주연상 불발이 아쉬웠다.





할리우드으로 간 아시아 감독 중 아마도 가장 성공한 감독이 아닐까 싶은 이안 감독의 작품이다. 잭역의 제이크 질렌할과 에니스역의 히스 레저의 연기가 빛나는 아름다운 사랑 영화다. 모든 영화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이 영화에 있다. 이영화를 성소수자 영화라 거부감을 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감정이다. 나는 사랑 그 자체를 본다. 영화 속 두 주인공은 평범한 삶 속에 자신을 가두기 위해 무던히 애쓴다. 사랑이 뜻하는 데로 접었다 펼쳤다 할 수 있다면 그건 진정한 사랑이 아닐 것이다. 사랑은 대자연의 섭리처럼 자연스럽게 용솟음치는 감정이다. 막을 수도, 그만 둘 수도 없는 감정 앞에서 두 남자는 성심을 다해 마음을 따른다. 금지된 이 사랑이 언젠가 끝나고 말 것을 직감하지만 그들은 온마음을 다해 사랑을 믿는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고통은 로미오와 쥴리엣과 다르지 않다.

잭의 죽음 이후 에니스는 처음으로 사랑하는 이의 집을 방문한다. 그의 방을 천천히 눈에 담는 중 옷장에 걸린 셔츠를 발견한다. 오래전 둘이 격렬히 싸운 날, 잭은 피를 흘렸고 사랑의 징표처럼 갖고 싶었던 에니스의 셔츠 위에 자신의 피 묻은 셔츠를 포개어 걸어 놓았다. 에니스는 셔츠를 끌어안고 오열한다. 몇 년 후 에니스의 집, 이번엔 잭의 피 묻은 셔츠 위로 에니스의 셔츠가 포개져있다. 에니스가 잭을 꼭 감싸 안은 모습처럼. 남겨진 연인은 맹세한다.

"Jack, I Swear"


사랑은 여러 모양을 하고 우리 앞에 나타난다. 잭과 에니스의 아픈 사랑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는 영화다.




관람한 거의 대부분의 영화를 습관처럼 기록해 둔다. 음악도 마찬가지고, 사람들도 그렇게 남긴다.

기억 저장소를 갖고 있다. 누군가에게 내가 잊힐까 두려운 만큼 내가 잊는 것도 두렵다. 어릴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영화는 언제나 내 편이었다. 잠시 스쳤더라도 다시 보고 싶은 날을 위해 기록해 둔다. 언젠가는 지나쳐온 모든 것이 그리울 때가 틀림없이 오게 될 것만 같다.


*겨울 오기 전 볼 영화

타인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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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오브 시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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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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