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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내 마음속 영원한 아픔

삶은 누구에게나 소설이다

by 레인송

아이


마음 깊은 곳 꽁꽁 숨겨 놓은 아이가 있다.

89년, 이제 막 봄바람이 불기 시작한 계절에 우리는 만났다.

감기에 걸려 점심시간이 지나고서야 학교를 향해 집을 나섰다. 아끼는 진홍색 스웨터를 교복 위에 걸치고 이왕 늦은 거 산책이나 하자며 배재 학당 맞은편 언덕의 오솔길을 걸었다. 한낮에도 사람이 드문 한적한 그 길을 좋아했다. 걸으면 고립된 나만의 세상 속에 서 있는 듯 평온했다. 야간 자율학습이 끝난 늦은 밤에도 겁 없이 에둘러 그 길을 지나 집으로 가고는 했다. 나무로 둘러싸인 길은 여전히 겨울바람이 불었다. 스웨터 소매를 길게 빼 장갑처럼 손을 감싸 걷고 있는데 맞은편에 사람이 오고 있다. 걸음이 단정하다. 나처럼 교복을 입고 있었다. 방향을 보니 그 아이는 학교에서 나오는 길이 었을 것이다. 얼굴이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다. 안 보는 척 아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이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보자마자 알아챌 수 있었다. 앞으로 저 아이를 좋아할 것 같다. 몇 걸음 더 걷다 뒤를 돌아보았다. 우린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우리는 사랑에 빠졌다. 언제 아팠냐는 듯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잔뜩 쉰 목소리로 친구들에게 그 아이와 사랑에 빠졌음을 통보했다. 그 후 시도 때도 없이 그 길을 걸었지만 만날 수는 없었다.


2주가 지났다. 주말에 친구들과 도서관을 갔다. 새벽부터 줄을 섰지만 만석이다. 입장하지 못한 아이들을 위해 도서관은 특별히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30석 남짓 작은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운명처럼 아이를 만났다. 아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책상으로 가 물건들을 만지작 거리고 있을 때 아이가 돌아왔다. ‘망했다’ 하고 있는데 아이가 수줍게 웃는다. 안경집을 찾아들고나간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친구에게 속삭였다. “망했어, 진짜”

뻘쭘함에 꼼짝 않고 몇 시간을 앉아 있었다. 엎드려 잘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 낙서로 가득한 공책 위로 누군가 편지봉투를 툭 놓고 간다. 아이였다.

몇달 전, 아이는 도서관에서 나를 처음 보았다고 했다. 얼마 전 그 오솔길에서 나를 마주친 일이 자신에게는 운명과도 같은 일이었다고, 나를 좋아할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했다. ‘기꺼이!'

우리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표현했다. 그 아이 앞에서 나는, 절대 순수의 영혼이 될 수 있었고 숭고한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아이의 부모님은 사고로 일찍 돌아가셨다. 그럼에도 집안이 매우 부유해 벌서부터 유학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언젠가 이별해야 하는 운명을 걱정할 틈도 없이 우리는 진심을 다해 서로에게 마음을 주었다.


아이는 나를 샛별이라 불렀다. 그때부터 나는 습관처럼 별을 그리기 시작했다. 교과서에, 학교 복도에, 입고 있는 티셔츠 구석에도 나의 표식처럼 별을 그려 넣었다. 우리는 방학을 제외하고 거의 매일 등교하기 전에 만나 아침 산책을 했다. 아침잠이 많은 나로서 믿기지 않는 시간, 6시에 눈이 절로 떠졌다. 나는 아이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고 아이는 나의 이야기에 늘 웃었다. 손을 꼭 잡고 걸었다. 여름에 땀이 차면 옷에 땀을 닦고 곧 다시 잡았고 겨울에 아무리 손이 시려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아이는 꽁꽁 언 내 손을 잡고 호호 입김을 불어주었다.




빨간 장미, 흰 장미


여름 방학을 앞둔 주말, 비가 내렸다. 아이는 어학 공부하러 외국을 가야 했다. 아이의 맑고 짙은 눈동자 위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아이가 말했다.

“나는 너밖에 없어”

우산 위로 쏟아붓는 여름 장맛비 소리가 일시 정지라도 된 것처럼 내 머릿속에 그 말이 울려 퍼졌다. 속으로 맹세했다. '나는 이 아이의 행복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야.'

4주 후, 약속 장소인 동네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걸어 들어오는 아이의 품에 하얀 장미가 한가득 들려있다. 벤치에 앉아있는 내 곁에는 빨간 장미 다발이 놓여있었다. 우린 해가 질 때까지 운동장 벤치에 앉아 있었다. 아이는 주말에 만나는 날엔 종종 흰꽃을 들고 왔다. 나도 아이를 닮은 꽃을 주고 싶었다. 자율 학습으로 꽃집에 갈 시간이 없거나 돈이 없을 때는 욕쟁이 교감이 아끼던 운동장의 노란 장미를 꺾어 가기도 하고 학교 앞 주택 담장 위로 빼곡히 내민 라일락이며 조팝꽃을 꺾어 아이의 품에 안겼다. 하늘에 별도 따다 줄 기세로 아이를 사랑했다.


5월 어느 아침, 아이가 작은 상자를 건넸다. 상자 안에는 등나무 꽃을 엮은 목걸이가 있었다. 등나무꽃을 따러 새벽 4시에 집에서 나왔다고 했다. 나는 항상 생각했다. 아이의 사랑이 나에게 과분하다고. 소녀도, 소년도 아닌 외모와 다듬지 않은 짧은 머리도 별로였지만, 지랄 맞은 성격이 언제든 탄로 날까 늘 조심했다. 상관없이 아이는 눈에 보이는 모든 예쁜 것이 나를 닮았다며 날 멋쩍게 했다.


고3이 되면서 우리 만남의 횟수는 줄었다. 아이는 유학 준비를 하느라 매일 시내로 나가다시피했다. 밤마다 집안에 굴러다니는 10원짜리 동전을 한 움큼 쥐고 공중전화 부스로 갔다. 꽃바람이 솔솔 부는 봄에도, 찌는듯한 무더위와 굵은 빗 줄기 속에도 공중전화박스 안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행복했다. 전화부스는 울창한 은행나무 밑에 있었다. 가을엔 노란빛 조명이 되어 내 마음을 달달하게 녹였다. 그 밤, 아이가 노래 '세월이 가면'을 불러준다. 집으로 돌아와 언니가 즐겨 듣던 가요 모음 테이프에서 그 노래를 찾아 듣고, 듣고, 또 듣기를 반복했다. 다음 날, 답가로 '장미'를 불러주었다.


당신에게서 꽃내음이 나네요

잠자는 나를 깨우고 가네요

싱그런 잎사귀 돋아난 가시처럼 어쩌면 당신은 장미를 닮았네요

당신의 모습이 장미꽃 같아

당신을 부를 때 당신을 부를 때 장미라고 할래요

평소 가요도 듣지 않고 누가 부르는지도 모르지만 그 노래만은 자주 흥얼거릴 만큼 좋아했다.


1990년 겨울, 아이가 떠났다. 떠나기 이틀 전 우리는 올림픽 공원 둘레길을 두 번이나 돌았다. 눈물 보이기 싫어 할말을 삼켰다. 꼭 잡은 손이 얼얼했다. 5년 후, 우리는 올림픽 공원에서 다시 만났다. 아이는 그날 하얀 장미를 한 아름 품에 안고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내가 화장한 모습을 처음 봐서였는지, 긴 머리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함박웃음을 지었다. 내 손에는 빨간 장미가 들려있었다.



이별


우리는 각자의 길 위에서 성장하는 중이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별을 준비했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면 다 잊혀지겠지.. 하면서. 아이는 가끔 엽서와 편지를 보내왔다. 나는 답장하지 않았다. 여느 대학생처럼 연애를 하고 클럽을 다니며 세속적인 인간이 되어갔다. 많은 사람을 만나 다양한 세상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사이 우리 집은 이사를 했고 전화번호도 바뀌었다. 이제 아이는 나를 찾을 수 없다. 4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아이는 나의 또 다른 그림자였다. 잊히지도 지워지지도 않았다. 허구한 날 아이의 꿈을 꾸었다.


수 백번 걸었던 전화번호를 눌렀다. 아이를 엄마처럼 키운 이모님이 받으셨다. 아이는 사라진 내가 걱정이 돼 여러 번 한국에 왔었다고 했다. 떨리는 가슴을 누르며 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는 한참 동안 울었다.

"내가 너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

"미안해"

6년 전, 이모님이 나에게 전화를 하신 적이 있다. 아이가 친구 얘기한 적 도 처음이지만 저렇게 밝았던 적이 없다며 내게 고맙다고 하셨다. 아이 덕분에 나 같은 꼴통이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다.


2, 3년에 한 번씩 우린 만났고 그때마다 걷고 또 걸었다. 퇴근 후 만나 걷기 시작하면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고 서로의 집을 바래다준다며 왔다 갔다를 반복하다 새벽이 되기도 했다. 나에겐 간간히 애인이 있었다. 아이를 향한 마음은 그대로 인채 현실을 살아갔다. 서른살 즈음, 회사로 큰 꽃 바구니가 왔다. 아이가 돌아왔지만 기쁘지 않았다. 세상 풍파에 찌든 나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 상황이 좋지 않았다. 위태로운 현실에 속이 타들어 갔지만 아이를 만나면 환상의 세계에 빠진 것처럼 그저 행복하기만했다. 아이는 변함없이 영혼이 맑고 예전과 다름없는 사랑스러운 눈빛이다. 나는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집안 어른들과의 재산 분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아이를 지켜보며 나는 점점 더 자괴감이 들었다. 이제는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음을 깨닫자 도망치고 싶어졌다. 사실 더 큰 이유는 나는 더 이상 아이가 생각하는 내가 아니었다. 나 스스로 아이 앞에 서 있을 자신이 없었다. 완벽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전지전능의 사람이되어 지켜주고 싶었다. 아이는 내게 꿈이자 상실이었다.


2002년 가을, 우리는 처음 술을 마셨다. 아이였을 때 만나 여태껏 아이의 사랑처럼 지고지순했던 우리 관계가 끝나는 날이었다. 아이에게 장문의 편지를 주고 돌아섰다. 후련했다. 완벽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느라 자학할 필요도 없고 피곤한 밤 걷느라 고생할 일도 이제 없게 되었다.




이름 없는 관계


일주일 내리 아이의 꿈을 꾼 적이 있다. 자고 나면 흐릿해 질까 두려워 벌떡 일어나 노트에 꿈을 기록했다.

10시 이전에 퇴근하는 일은 꿈도 못 꿀만큼 회사일에 곤죽이 되고 남들처럼 연애 하느라 싸우고 지지고 볶다 진이 빠지는 날에도 아이의 꿈을 꾸었다. 잊었다 싶을 때마다 아이가 꿈에 나왔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며 성심성의껏 생을 채워 갔다. 가끔씩 그 아이 생각이 났다. 그때마다 몇 시간씩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2009년 겨울, 아이의 이모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이는 지난해 늦은 결혼을 했고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조카의 결혼을 보며 내 생각이 났다고 하셨다. 아이는 우리 집과 불과 30분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 며칠 후, 아이가 사는 동네를 배회했다. 혹시 마주치면 숨을 테지만 멀리 서라도 볼 수 있기를 바랐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텐데. 어떤 모습으로 변했든 정말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텐데.


우리는 어떤 이름으로 불릴까, 여러 번 생각했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딸을 향한 사랑이 넘쳐 더, 더 많이 사랑을 주고 싶을 때 그 아이를 떠올린다. 그 아이는 나에게 그런 사랑을 주었다. 자식을 향한 어미의 사랑처럼.

회사로 꽃 배달이 올 때마다 동료들은 애인이 보낸 거냐 물었다. 사귀던 애인은 꽃구경조차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우리의 관계를 설명하기 귀찮아 매번 그렇다고 답하는 바람에 무감성 애인이 난데없이 로맨틱 가이로 둔갑했다. 완벽한 사람이 되어 다시 그 아이 앞에 설 것이라는 결심은 묻히고 어느새 23년이 흘러버렸다.

가끔 적막한 허공 속에 아이의 이름을 두, 세 번 연속해서 불러본다. 마음속 깊은 곳에 아이를 향한 사랑을 그대로 남겨 두었다.


아이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치고, 우리를 어떤 이름으로 부를까 괴로워하던 때였다. MBC 라디오 '정은임의 FM 영화음악'에서 왕가의 감독의 영화 '열혈남아'를 소개하고 있었다. 주제가 제목을 듣는 순간 정의되었다.


'그대 내 마음속 영원한 아픔'


Torn Between Two Lovers ... Mary Macgregor

Glide ... Mitski

Oblivion ... Piazzo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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