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누구에게나 소설이다
가을이 오면 ... 이문세
가을이 왔다. 여기저기서 이 노래가 들린다.
가을을 탄다. 올 가을 유독 그렇다. 어릴 적, 나는 여름의 아이였다. 하얀 눈과 이만 보일 정도로 여름 내 새까맣게 탄 피부가 겨우 벗겨지고 속살이 하얗게 드러 나기가 무섭게 봄이 오자마자 다시 밖으로 나가 살을 태운다. 지금도 나는 여름의 태양을 피하지 않는다. 물이 있는 곳이면 언제든 뛰어들고 폭염주의보 한낮에도 홀로 산에 오른다. 올해만 강릉에 다섯 번, 고성에 세 번 달려갔다. 올여름 물빛은 하늘을 따라 유난히 예뻤다. 안타깝게도 뛰어들지 않고는 못 배길 끼깔난 바다를 나 혼자 뛰어들었다. 남편은 수영을 좋아하지 않고 딸은 할 게 많다며 캠핑 식탁을 놓고 공부를 한다. 친구들은 배 때문에 수영복 입기를 꺼리고 다들 물이 싫다고 한다. 별수 없이 바다에 혼자 들어간다. 잠수하고, 누워 하늘도 보고, 물 위에 둥둥 떠 다니는 기분은 땅 위의 자유와 전혀 다른 해방감을 준다. 여름 등산 또한 그렇다. 폭염 한낮의 산은 고요하다. 고요함이 자연과 나의 호흡에 온전히 몰두하게 만든다. 열기와 한판 붙는 기분도 좋다. 올여름은 어딘가 모르게 마지막 여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년에도 용감하게 바다에 뛰어들 수 있을까? 등산하다 다친 다리가 좋아져 다시 산을 탈 수 있을까? 다시는 이번 여름의 나처럼 될 수 없을 것만 같아 가을이 오는 게 아쉽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중년은 계절의 손바뀜에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기분 전환이나 할 생각으로 트렌치코트를 꺼내 입었다. 기왕 맞이한 거 가을 여자가 되어보기로 했다.
바람이 분다 ... 이소라
나의 이별은 잘 가라는 인사도 없이 치러진다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내게는 천금 같았던 추억이 담겨져 있던
머리 위로 바람이 분다
- 가사 일부 -
가요는 청승맞은 가사가 많아 싫었다. 팝송은 가사를 모르니 가사 때문에 싫고 좋고 하는 잣대가 없어 좋았다. 나이 듦이란 청승의 감성이 절로 생기는가 보다. 모든 노래 가삿말이 자신의 얘기 같다던 가요 러버 친구처럼 나도 그리 되어간다. 스산한 바람이 이 노래를 불러온다. 천금 같았던 추억도 함께.
Last Night On Earth ... Green Day
평생 단 한곡의 노래만 들어야 한다면 단연코 이 곡이다. 보컬 조 암스트롱이 자신의 아내에게 쓴 편지에 영감을 얻어 만든 곡이다. 딸아이의 돌 이후 우리 부부는 힘든 일을 겪었다. 매사에 '잘 되겠지' 마인드로 점철된 남편은 친구 따라 강남을 갔어야 했는데 주식을 샀다. 신혼집은 공중 분해 되었고 우리는 변두리 월세방으로 이사를 갔다. 정신이 멍했다. 나는 삶이 고단 할 때 걸어야 살아진다. 아기 띠 속에 나의 아기를 품고 눈 오는 날에도 비가 퍼붓는 날에도 걸었다. 막 돋은 봄꽃들, 미지근한 여름 내새, 밤새 내린 비로 불어난 하천, 새들의 소리와 움직임. 걷다 보면 자연이 눈에 들어온다. 어느새 걱정은 시시각각 변하는 계절의 아름다움 속에 섞이고 나도 모르게 휘파람을 분다. 이 곡은 아기가 잠들면 이어폰을 꽂고 듣던 노래다. 수 백번 들었지만 질리지 않고 들을 때마다 감탄한다. 이렇게 끝내주는 곡을 만든 조 암스트롱에게 샘나고 노래의 주인공인 그의 부인도 부럽고.
세상 모든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은 곡이다.
Try TO Remember ... 여명
가을엔 영화 '첨밀밀'이 생각난다. 이곡은 영화' 유리의 성' 주제가지만 여명 하면 먼저 떠오르는 영화가 첨밀밀과 이 노래다. 서른 살에 이 영화를 봤을 때는 두 주인공의 애잔한 감정을 온전히 느끼지 못했다. 신규 브랜드론칭은 혹독한 업무량인 데다가 디자인실 내 나의 포지션이 위, 아래 딱 중간이라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지긋지긋한 야근과 스트레스에 시달려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눈이 삭제된 시절이었다. 등려군의 노래에는 반했지만, 여명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았고 그저 재밌게 본 좋은 영화정도였다. 작년, 다시 영화를 볼 땐 많이 울었다. 여명의 눈빛은 왜 그리 멋진지..
영화는 여명의 전성기 시절뿐 아니라 홍콩 영화 전성기의 클라이맥스나 다름없다. 격변하는 영화 시장 속에서 홍콩의 영화 산업은 슬슬 하향세에 접어들기 시작한 때였기에 어쩌면 더 아련하다. 이 노래는 이미 수십 년 전 나를 크게 울린 적이 있다. 월세방과 여러 이모네 집을 떠돌다 잠시 고시원 생활을 한 적이 있다. 친구 애순이가 고시원을 찾아왔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집에 돌아간 애순이로부터 삐삐 메시지가 와있었다. 공중전화박스로 가 메시지를 확인해 보니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기타 소리를 듣자마자 울어버렸다. 위로 이상의 의미가 담겨있었다. 이 노래는 잊지 못한 첫사랑을 생각나게도, 낯선 곳에서 주춤해할 나를 걱정하는 친구의 마음도 생각나게 한다.
비처럼 음악처럼 ... 김현식
고3, 2학기가 되어서야 나는 진로를 정했다. 샤머니즘 입시 컨설팅 결과, 남서쪽 대학에서 의상을 전공하라는 남대문 큰 할머님 신의 지시였다. 마침 의상과가 이과 계열로 편입되며 실기 비중이 확 줄었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석 달 남짓 다닌 미술학원에서 친구를 사귀었다. 작고 귀여운 아이 정수다. 묻지도 않았는데 필요한 미술 도구의 종류며 구매처를 알려줄 뿐 아니라 본인에게 여분이 많다며 붓과 물감들을 나눠 주었다. 쫑알쫑알 말도 많고 흥도 많아 가끔 성가시기도 하지만 같이 있으면 기분 좋은 친구다. 정수에게는 학원 커플 주용이가 있었다. 알콩 달콩 10대 커플을 보고만 있어도 사랑스러웠다. 부럽기도.
커플은 운이 없어 나란히 재수를 하게 되었다. 나는 둘이 다니는 미술 학원에 수시로 놀러 갔다. 10월, 정수의 아버님께서 돌아가셨다. 시험이 코앞이라 걱정과 안쓰러움이 더 컸다. 주용이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정수는 잘 버텨냈다. 11월 1일, 정수에게 아침부터 전화가 왔다. 같이 주용이에게 가자며 재촉을 한다. 이유를 묻자 가수 김현식이 죽었다고 했다. 주용인 화실에서 종종 김현식 노래를 들려주었다. 가요는 듣지 않지만 김현식과 신해철 노래는 좋아했다. 주용이가 크게 낙담하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우리의 위로가 필요한 정도인가 싶었다. 주용이의 엄마께서 5년째 투병 중이시고 김현식을 너무 좋아하신다는 말을 주용이에게 가는 버스 안에서 정수를 통해 들었다. 주용인 이미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화실 앞 올림픽 공원 둘레길은 노란 은행잎으로 뒤덮여 있었다. 걷자고 했다. 걸어야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인다. 우리는 말없이 빗물에 잠긴 은행잎을 내려다보며 두 시간을 걸었다. 김현식의 목소리는 가을비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늘 했었는데.. 그는 가을비 내리는 날 떠났다.
만추 ... 탕웨이
가을이 시작될 때 생각나는 영화 '만추'. 영화 '색계'에서의 탕웨이도 좋지만 '만추'에서의 탕웨이를 더 좋아한다. 현빈의 연기는 별로지만 만추의 현빈은 괜찮다. 가을이 오면 이영화의 포스터가 눈에 아른 거린다. 기한이 정해진 사랑과 찰나의 계절 가을이 만났다. 쓸쓸한 아름다움이 있다면 이 영화가 아닐까. 노래는 리마스터링 버전의 엔딩곡이다. 주인공 애나와 훈의 3일간의 아련한 사랑이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떠올리게 한다. 생의 마지막일지도 모를 강렬한 끌림이 언젠가 나에게도 온다면 어떡하지?
오지도 않을 걱정을 한다.
Can't Help Falling In Love ... Kacey Musgraves
엘비스 프레슬리의 버전도 좋지만 가을엔 그녀의 목소리로 듣는 게 좋다. 젊을 땐 이 노래가 촌스럽게 느껴졌다. 작년 여름 등산길에 들은 이곡이 발길을 멈추게 했다. 적막한 산속에서 홀로 듣는 노래는 전혀 다른 감정을 불러온다. 이렇게 좋은 곡이었나? 땀범벅이 된 채 숲속 한가운데서 지난 인생을 몰아보기 하는 기분이 들었다. 산행의 무거운 단 한걸음 만큼 짧은 인생이었다.
나이 들면 많은 게 변한다. 생전 안 찔 것 같은 얼굴에 살이 오르고, 2.0의 시력에 노안이 오질 않나 김치, 나물 싫어하던 입맛이 죽어라 한식만 찾는다. 미소년 배우와 가수만 보면 입이 헤벌쭉했는데 요즘은 변우석보다 배우 박정민이 예쁘고 베네치오 델토로의 눈빛이 섹시해 보인다.
여름부터 6,70년대 팝을 모으고 있다. 취향도 바뀐다. 점점 더 과거로 가고 있다. 20년 후, 임영웅 콘서트에 앉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밀려오는 파도 소리에 ... 썰물
대학가요제가 하는 날이면 온 가족이 둘러앉아 시청을 했다. 시집 안 간 이모들과 함께 살 때였다. 가요제는 여자 많은 집에서의 큰 이벤트였다. 어린 마음에 누가 좋고 누구는 별로네 하며 나름 예측도 하며 꽤나 몰입하며 봤다. 이 곡은 단번에 내 마음을 홀딱 훔친 곡이다. 두고두고 귓속에 맴돌고 입으로 흥얼거렸다. 수십 년이 흘렀어도 잊지 않고 플레이 리스트에 저장해 둔다. 오랜 시간 수많은 가요제에서 히트송과 스타들이 탄생했지만 이 곡만큼 나를 사로잡은 곡은 없었다.
If You Remember Me ... Chris Thompson
'로미오와 줄리엣'의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의 영화 '챔프'의 주제곡이다. 내가 9살쯤 영화를 봤으니 고전이라 할 수 있다. 내용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언니와 내가 엄청 울었던 기억이 난다. 서울로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그날은 어린이날이었다. 우리를 돌 봐주시던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어버이날을 앞두고 이모들이 잔치를 해드린다며 큰 이모네로 가셨고 집에는 어린 자매 둘이 엄마가 오기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다. 어린이날이라고 TV에서 방영한 영화가 '챔프'였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가 되어 가는 데도 엄마가 오지 않자 이렇게 어린이날이 끝나는가 싶어 속이 타들어갔다. 어린 자식을 집에 두고 일하러 나간 엄마 역시도 속이 타들어 가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영화는 우리 자매의 마음을 무너트렸다. 당장이라도 울고 싶은 기분을 꼭꼭 감추고 있었는데 말이다. 차라리 울고 나니 후련하고 잔뜩 부풀었던 어린이날의 기대감도 날아간 듯 편안해졌다. 배도 고파져 언니가 라면 물을 올려놓으려는데 엄마가 오셨다.
"많이 기다렸지? 얼른 옷 갈아 입어. 짜장면 먹으러 가자"
영화는 잊었지만 음악은 두고두고 마음속에 남았다. 크리스 톰슨의 목소리가 가을과 잘어울린다.
Dust Wind ... Kansas
Chez Laurette ... Laura Anglade
For The Peace Of All Mankind ... Albert Hammond
Sympathy ... Rare Bird
Ylang Ylang ... FKJ
You Call It Love ... Karoline Krugeer
Aubrey ... Bread
Drive ... The Cars
I'm Not In Love ... 10cc
A Love So Beautiful ... Michael Bolton
Kissing A Fool ... George Michael
When October Goes ... Barry Manilow
A Groovy Kind ... Phil Collins
I've Been In Love Before ... Cutting Crew
Wake Me Up When September Ends ... Green Day
기억의 습작 ... 김동률
If You ... Big Bang
No Surprises .. Radio Head
Champagne Supernova ... Oasis
어디선가 나의 노랠 듣고 있을 너에게 ... 015B
1월 부터 6월까지 ... 015B
대학교2학년, 첫 남자 친구가 생겼다. 선머슴 컨셉을 벗고 여자다운 여자 아이가 되었다. 마음이 여린 친구였다. 잘 보이기 위해 무던히 허세 부리던 모습이 좋았다. 나 역시도 그 친구 눈에 마냥 예쁜 아이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났었다. 성격 좋은 척, 고고한 척, 순진한 척을 하느라 살이 절로 쏙쏙 빠졌다. 가요를 좋아하던 녀석은 만날 때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곡을 녹음해 주었다. 아는 노래도 하나 없고 듣고 싶지도 않았는데 녀석은 노래 감상평을 수시로 물었다. 심지어 통화 도중에도 노래를 들려주었다. 싸울 때마다 울던 눈물 많은 녀석과 헤어졌다 만났다를 3년 동안 반복했다. 헤어졌지만 정은 남아 내가 힘들 때 외롭지 말라며 강아지를 선물했던 좋은 녀석. 비록 인연은 끝났지만 선물한 노래 중 두 곡이 남았다. 마흔이 넘어 문득 떠오른 그 친구와의 추억 속에 저 두곡이 배경 음악처럼 흘렀다. 윤종신의 목소리는 그때도 참 좋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시작되면 나이 한 살을 더 먹는다. 중년의 변화와 갱년기의 공포를 잘 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가을은 여러 가지 감정들이 뒤 섞여 난감하다. 힘든 것도 아니고 서러운 것도 아니고 정의할 수 없이 복잡하다. 지난주와 이번 주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이만보를 걸었다. 가을이 세상을 뒤덮었다. 태양에 몸을 맡긴 여름이 아쉬웠 듯, 짧은 가을은 또 가을 데로 여운이 남겠지.
겨울을 준비해야겠다. 가을 노래와 함께.
젊은 시절이 그만 들여다보고 싶어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