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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애순

삶은 누구에게나 소설이다

by 레인송

그녀를 애순이라 부르게 된 사연이 있다.

Cafe 'TV session'에서 함께 아르바이트하는 친구 중 정순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70년대 생 이름치고 촌스럽기도 했지만 사내 녀석의 이름에 순자가 붙으니 본인조차 자신의 이름이 크게 불리는 것을 싫어했다.

"정순아!"

"야! 내 이름 작게 부르라고 했지!"

그러고 보니 그의 이름을 외치고, 이내 중저음의 대답이 돌아오면 힐끗 쳐다보는 손님이 제법 있었다. 우리는 동료를 위해 아르바이트생 모두의 이름 뒤에 순자를 붙이기로 했다. 다른 친구들의 이름은 몇 달 부르다 말았지만 애순이는 입에 찰싹 달라붙어 30년 가까이 떨어질 줄을 모른다. 진짜 이름보다 애칭이 더 잘 어울리는 애순이.




우리는 고등학교에서 만났다. 애순이는 피부가 하얗고 동글동글, 서글서글한 미녀 타입이라면 나는 까무잡잡하고 말랐으며 날카로워 보이는 깍쟁이 타입이다. 성격도 외모를 똑 닮았다. 그녀가 매사 급할 것 없이 여유롭고 긍정적인 반면 나는 늘 급하고 후다닥 후다닥 바쁘다. 나는 약속 전 날부터 분 단위로 약속 시간에 맞춰 시간을 보낸다. 그녀는 약속에 늦더라도 한 손에 빵봉투를 흔들며 보름달 같은 환한 미소를 뿜어 대며 걸어온다. 어릴 때는 우리의 다름이 도드라지지 않았다.


그녀 또한 듀란듀란의 팬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서로의 집이 멀고 야간 자율 학습 때문에 붙어 다닐 시간이 없었다. 졸업 후 우리는 단짝이 되었다. 우리는 서로의 소울메이트였다. 우리가 영혼의 단짝이 된 데에는 그녀도 나도 영화라면 사족을 못 쓰는 영화 마니아였기 때문이다. 마니아 단계를 넘어 영화에 깊이 개입하길 바라며 영화 학도를 꿈꾸었다. 만나면 거의 매번 영화를 봤더랬다. 바다 건너 들려온 신작 소식을 공유하고, 고대하는 영화를 기다렸다 개봉일에 맞춰 함께 관람을 했다. '영화 읽기'는 영화를 다 보고 난 후까지 이어져 카페로, 술집으로 옮겨 다니며 계속되었고, 그래도 성에 안 차면 우리 집이나 그녀의 집으로 가 밤잠을 반납하고 이어졌다.


우리가 시네필의 길을 걷고 있을 때 한국은 시네마 천국이었다. 예술 영화 전용관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말로만 듣던 꿈의 영화들이 앞다퉈 국내 개봉을 했다. 영화 잡지 '키노'에서, 영화 심야 라디오 프로였던 '정은임의 FM영화 음악'에서 소개된 국내 미개봉의 수많은 영화들을 마음에 품으며 보게 될 날만을 꿈꾸었다. 애순이와 함께 시네마떼끄를 열심히 찾아다녔다. 사당의 '문화학교 서울'과 '영화공간 1895', 신촌의 'OFIA', 책방이자 미개봉 영화를 상영하던 '오늘의 책', 프랑스 문화원 외에도 시네필의 커뮤니티를 기웃 거리며 말로만 듣던 명작들을 탐닉했다. 그 시절 우리는, 프랑스 문화원을 들락 거리며 장 르누아르 감독의 '게임의 규칙'과 프랑수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 등을 자막 없이 볼 정도로 영화와 열애 중이었다. 시네필이 이 정도는 돼야지.. 하는 마음이 컸다. 우리가 나란히 앉아 스크린 속의 세상 너머의 또 다른 세상을 감싸 안았던 경험은 우리들의 화양연화였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테오 앙겔로플러스 감독의 '안갯속의 풍경'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지그재그 3부작 '올리브 나무사이로'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차이밍량 감독의 '애정 만세'

빔 벤더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 '파리, 텍사스'

챈 카이거 감독의 '패왕 별희'

제인 캠피온 감독의 '피아노' '스위티'

가브리엘 살바토레 감독의 '지중해'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의 '집시의 시간' '언더그라운드'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레닌 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의 'My Own Private Idaho'

왕 가위 감독의 '춘광사설' '중경삼림' '타락 천사'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감독의 '희생'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쇼트커트'

장 피에르 주네 감독의 '델리 카트슨 사람들' '아멜리에'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

라세 할스트롬 감독의 '개 같은 내 인생'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 감독의 '세 가지 색' 시리즈 등등.


누군가는 평생 보기 힘든 위대한 작품을 우리는 대형 스크린을 통해 볼 수 있었던 행운의 세대였다. 30년 전, 내 수첩과 머릿속에 빼곡히 쌓인 영화들은 내 보석함이다. 애순이도 마찬 가지일 것이다. 극장 안 내 옆자리는 늘 애순이었다.




90년대 카페 풍경 하면 누구나 떠오르는 게 있다. 영화 '그랑 블루'와 '천국보다 낯선'의 포스터, 테이블 위 전화기와 재떨이다. '천국보다 낯선'은 본 사람은 없지만 포스터는 누구나 한 번은 봄직한 영화였다. 시네필에게 짐 자무쉬 감독의 영화 '천국보다 낯선'은 통과의례였다. 보고 싶어 미치겠는 그 영화가 드디어 동숭 시네마텍에서 개봉을 한다. 서둘러 퇴근을 하고 혜화동으로 갔다. 우리는 극장에 들어서기 전부터 설렜다. 소문만 무성하던 독립 영화의 진수를 보기 위한 사람들로 극장은 만석이었다.


불이 꺼지고 이제 시작이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짐 자무쉬 감독의 단편 '커피 앤 시가렛(Somewhere in California)'를 보여준다. 가수 톰 웨이츠와 이기 팝이 바에서 커피와 담배에 관한 담론을 나눈다. 흑백 영상 속 위대한 필모그래피의 두 아티스트가 시종일관 담배 연기를 뿜으며 서로에 대한 독설도 서슴지 않는 자유분방한 연기가 맘에 들었다. 이제 본진이다. 음악이 인상적이다. Screamin' Jay Hawkins의 'I Put a Spell on You'는 익숙한 곡이지만 짐 자무쉬의 흑백 롱 테이크와 만나니 어딘가 낯설다. 영화는 이미 중반을 향해 가고 있는데 집중이 안된다. 'I Put a Spell on You'가 나올 때마다 자꾸 웃음이 났다. 애순이도 마찬 가지다. 어깨를 들썩이며 키득 거린다. 성당에서 미사 도중 불경스러운 생각을 하는 것 마냥 죄책감이 들었다. 시네필이 이래도 되는 건가, 나는 왜 자꾸 웃는 건가.


극장을 나서며 우리는 깨달았다. 시네필에게도 때로는 입맛에 맞지 않은 수작이 있음을.

오히려 단편 영화가 매력적이었다.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오른 톰 웨이츠와 펑크의 대부라 불리는 이기 팝, 중년의 두 가수가 맨 얼굴로 마주 앉아 허스키하고 걸걸한 목소리로 커피와 담배를 예찬하니 나도 당장 진한 커피가 마시고 싶어졌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혜화동에서 커피라니, 생각만 해도 행복했다.

"카페 갈까?"

"야, 우리 맥주 사서 걸을까?'

"너무 좋지"

혜화동 밤 골목을 산책하며 마시는 맥주는 낭만적이다. 이기 팝과 톰 웨이츠를 이야기하며 공기 속에서 춤추듯 아른 거리던 그들의 담배 연기가 떠올랐다.

"우리 담배 피울까?"

"그럴까?"

담배를 한 개 사서 인적 드문 곳으로 갔다. 한 손엔 맥주, 다른 한 손엔 시가렛. '이런 게 멋이지' 하며 자아도취에 빠질 때쯤 애순이가 자기 집에서 자고 가라고 한다.


영화 'Coffee & Cigarette' 의 이기 팝과 존 웨이츠




이미 늦은 밤이라 식구들은 모두 자고 있었다. 얼른 씻고 잠을 청하려는데 애순이가 유혹을 한다.

"우리 아빠 취미가 술 담그는 거거든, 너 솔방울 술 먹어 봤어?"

"아니, 탱자주는 먹어 봤는데 향 끝내주드만"

"솔방울 술도 끝내줘"

애순인 작은 컵 두 개를 들고 왔다. 솔향이 알코올에 진하게 배어있었다. 달콤했다. 맛만 보자던 애순인 빈컵을 들고나가 다시 채워왔다. 그러기를 두세 번 하다 보니 취기가 슬슬 올라온다. 애순이가 이번에는 술통을 통째로 들고 왔다. 홀짝이다 보니 통 안의 술은 점점 줄어 어느새 반으로 줄었다. 피우다 남은 88 담배를 들고 옥상으로 살금살금 기어올라갔다. 옥상 벽에 기대어 담배 연기를 한 모금 뿜었다. 영화 속 그들의 연기는 아티스틱했는데 우리의 것은 그 맛이 안 났다. 속닥이며 키득 거리는 중에 어디선가 애순이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놀라 눈을 번쩍 뜨니 이불 속이다. 어느새 아침이다. 분명 조금 전까지 옥상에 있었는데 지금 우리는 이불속에 있다. 아버님의 역정난 소리가 들렸다.

"누가 우리 옥상에다가 담배꽁초를 던진 거야? 화분 안에도 들어갔네, 도대체 어떤 놈이 남의 옥상으로 꽁초를 던졌어!"

우리는 다시 이불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애순이가 결혼하던 날, 나는 많이 울었다. 하필 신랑 가족석 뒤에서 엉엉 우는 바람에 오해를 살 뻔했다.

애순이는 내 눈물의 의미를 몰랐을 것이다. 그녀는 행복해 보였고 미래를 기대하는 벅찬 감정이 느껴졌다. 그녀의 행복을 빌었다.


결혼하고 한동안 애순이는 연락이 없었다. 이제 우리가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아 씁쓸하던 즈음 애순이에게 연락이 왔다. 오랜만에 명동에서 만나 회포를 풀었다. 10시가 넘었는데도 그녀는 일어날 기색이 없었다. 시부모님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내가 더 신경이 쓰였다. 술기운이 뭉근히 올라오자 애순이는 결혼 생활의 푸념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 결혼이 쉽지 만은 않지, 하며 공감을 하고 있는데 애순이가 덤덤하게 뱉어낸 한 마디.

"결혼 비용 돌려받을 수만 있다면 이혼하고 싶다니까"

친구의 농담 같은 푸념에 웃음도 나고 속도 상했다. 이혼하고 싶을 만큼 힘든 건가 하는 걱정과 결혼 비용이 아까워 이혼 못하는 친구가 귀여웠다.


그 후 애순이는 한동안 다시 연락이 없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겠거려니 하며 차츰차츰 나의 소울메이트의 자리를 비워냈다. 나 또한 회사 업무와 유흥으로 정신없이 몇 년을 보냈다. 우린 가끔 만나 영화도 보고 그간 못 나눈 시간을 공유했다. 장 국영의 죽음을 같이 애도했고 리버 피닉스의 생일이나 기일엔 서로의 알람처럼 연락을 오갔다. 애순이는 유독 힘들고 기운 없어할 때가 있었다. 그녀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사하는 날 도우러 오겠다던 그녀는 연락도 없이 오지 않았고, 이후 5년 동안 우린 서로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찾지 않았다. 시간은 도망가듯 빠르게 흘렀다.




2006년 결혼을 하고 2008년 딸을 낳았다. 어느 가을밤, 문득 그녀의 친정집 전화번호를 입속에서 우물거렸다. 애순이와 나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애순이도 나도 힘든 상황이었다. 힘들 때일수록 친구의 다정한 말 한마디가 힘이 되는 그런 때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우리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애순이는 참아내고 순응하는 사람이다 보니 속병이 깊다. 그녀의 삶이 힘에 부쳐 피폐해진 모습이 역력했다. 나는 그저 친구의 목소리 들으며 서로의 사는 얘기 나누는 일이 좋았지만 그녀는 나누기 버거울 정도의 상실감을 안고 있었던 듯 세상으로부터 잠적했다. 회복이 안 될 정도로 삶의 고난이 거세게 몰아붙일 때, 우정은 동상이몽이다. 우린 또다시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애순이는 잠적해 버렸다. 이번에는 절대 다시 찾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녀의 번호와 흔적을 모두 차단했다.



8년이 흐른 어느 날, 낯익은 번호로 전화가 왔다. 외출 준비로 바쁜 탓에 생각 않고 받아버렸다. 애순이었다. 그녀는 담담히 그간,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감격 섞인 어조로 혜화동, 우리의 아지트였던 릴리 마를렌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고 했다. 우연히 그곳을 지날 때 나에게 연락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잊지 못한 이름 릴리 마를렌, 우리가 사랑한 장소가 여전히 그곳에 있다. 다시는 그녀를 받아주지 않기로 맹세했지만 '릴리 마를렌'이라는 이름이 절대 그럴 수 없음을 일깨워주었다.




8년 만에 만난 그녀는 예전의 애순이 처럼 헐레벌떡 걸어와 인사를 건넸다.

"넌 그대로다. 변함없이 똑같아"

곱던 애순이도 나처럼 나이 들고 있었다. 흰머리가 나고 살이 더 찌고 눈 밑이 불룩해진 친구를 보니 세월이 얄궂기 그지없다. 정갈하게 다듬어진 혜화동 소나무길에서 그녀를 사진에 담았다. 그동안 못 지켜본 우리의 세월만큼을 묶어 두고 싶었다. 예전처럼 커피를 마시고 빵맛에 감탄했다. 릴리 마를렌 앞에서 전과 같은 포즈로 사진도 찍었다.


애순이의 현실은 녹녹지 않았다. 오랜 시간 유아를 돌보는 일을 해온 그녀의 손끝은 나이에 맞지 않게 휘어있었다. 그녀는 이상과 다른 현실 앞에서 좌절했으며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쩔 도리 없음을 탄식했다. 그래도 살아야 하기에, 아이들을 위해 현실과 맞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약 없이는 잠들 수 없는 밤이 벌써 10년이 되었다고 했다. 등만 붙이면 자던 애순이었다. 눈이 부어 눈밑 살이 불거진 친구의 얼굴을 마주하며 내심 속이 아렸다. 내 친구 애순이 관상은 영부인감인데..


그녀를 만난 날,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 결국 일어나 앨범을 뒤졌다. 그녀의 사진뿐 아니라 나의 젊은 시절 사진을 찾아내 한 참을 들여다보았다. 참 예뻤다. 사진 속 애순이의 해사한 미소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 미소를 잘 지켜온 친구에게 고맙다.


왜 내 친구들은 약지를 못할까. 결혼도 인간 관계도 요망지게 할 법도 한데 어째 내 친구들은 그저 좋은 감정 하나만 믿고 마음을 덥석 내어준다. 20대, 내가 숱한 연애사를 만드는 동안 주위에 연애 중인 친구가 하나도 없었다. 숙맥인 건지, 어디가 모질라 그런지 하나같이 어린 소녀들처럼 순진하기만 했다.




몇 달간 일을 하지 않던 애순이는 다시 취업을 했다. 예전만 못한 체력과 달라진 요즘 업무에 시달린 그녀는 얼마 못 가 일을 관두었다. 힘에 부쳐 다시는 아기 돌보는 일을 못 할 것 같다던 그녀가 쿠팡 물류센터로 일을 하러 갔다. 쿠팡의 악명 높은 노동 강도와 환경을 이미 지인들로부터 들은 터라 말리고 싶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수당이 더 나오는 휴일과 야간에 일을 한다고 했다. 에어컨 없는 실내에서 한 시간 버티기도 힘든 한 여름에 뜨거운 선풍기 바람 만으로 버티며 10시간 서서 일을 하고 온 애순이가 이런 말을 한다.


"땀이 하도 나서 옷에 소금물 쏟은 것처럼 하얀 얼룩이 번지더라. 물을 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았어. 그곳에선 마치 내가 동물이 된 기분이 들더라"


애순이가 품은 꿈이 있다. 이다음에 나와 유럽 여행을 가는 것이다. 나 역시 내가 본 아름 다운 곳을 그녀와 함께 걷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곳을 그녀 역시도 좋아할게 뻔하다. 지금도 우리는 만날 때마다 길을 찾아 음미한다. 파란 대문이 줄 지어 서있는 서촌의 어느 골목, 삼청동 오래된 목욕탕 옆에 나있는 나선형의 돌계단, 담장 위로 탐스럽게 핀 능소화를 보면서 우리는 감탄하며 행복을 느낀다. 한마디로 감성 터지는 하루를 만끽한다. 봄에 그녀와 동해 바다 여행을 했다. 자가용으로 속초, 고성 여행은 처음이라는 애순이를 데리고 나만의 핫 스폿을 보여주었다. 바다가 코 앞인 카페에 앉아 "좋다, 너무 좋다"를 연신 내뱉는 친구 옆에서 나도 너무 좋았다




이번 가을, 애순이와 춘천에 가야겠다. 가평과 강촌을 지나 의암댐, 애니메이션 박물관으로 이어지는 코스는 기가 막히게 아름답다. 애니메이션 박물관을 지나면 내가 좋아하는 산책로가 있다. 강 위로 조용하게 나있는 데크길은 사람이 없어 특히 좋다. 가을에 그 길은 도토리 열매와 상수리나무 잎으로 뒤 덥힌다. 가는 길에 대성리 스타 벅스에서 커피를 사서 산책할 때 마시면 딱이다.


9월, 산책로에서



산책으로 배가 슬슬 고플 때 식당 '해가빛'에서 연잎밥 정식을 먹은 후, 카페 'Soul Roastery'로 그녀를 데려갈 것이다. 그곳에 발을 들이자마자 온갖 감탄사를 늘어놓을 애순이를 떠올리니 벌써 행복하다.


카페 소울 로스터리, 사계절 언제나 아름답지만 눈 오고 비 오는 날은 천국이 따로 없다.

계절이 좋으니 10월에는 두 번 만나기로 했다. 한 번은 춘천, 한 번은 인왕산을 산책해야겠다. 오랜만에 영화도 볼 계획이다. 스크린 앞에 나란히 앉아 예전처럼 속닥이며 영화 속으로 뛰어들겠지. 우리는 유럽 여행을 위한 저축을 하고 있다. 인원도 둘이고 소액이다 보니 좀체 불어 나는 기미가 안 보인다. 이대로는 80살에 갈 판국이다. 일 년 치 모을 돈을 미리 내 돈으로 당겨와 주식을 샀다. 어차피 손해 보면 내가 메꾸면 될 정도의 금액이다. 제발 뻥튀기처럼 불어나 애순이와 내 무릎이 성할 때 갈 수 있기를!


Don't Dream It's Over … Crowded House

Sunday Morning …… The Velvet Underground

For My Lady ... The Moody Blues

The Winner Takes It All ... ABBA



2025,10,17 애순이와 춘천.

구름이 참 예뻤다. 애순이도.

그리고 주식은 12% 수익중.

애순아, 또 떠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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