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불륜이라는 주제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는, 소위말하는 사랑과 전쟁에서 보여주는 불륜이랑은 다른 결을 취한다.
일반적으로는 두 사람이 서로 사랑을 하고, 그것을 남편한테 안 들키는 그런 플롯으로 진행이 된다면, 이 책은 비교적 빨리 카레닌이 안나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되고, 그것이 걸린 후의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한 과정에서 안나카레니나가 보여주는 심리 변화를 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관전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처음 브론스키를 만나고, 브론스키에게 사랑에 빠진 것을 알지만 그것을 거부하려 하고, 결국에는 좋아하는 것을 인정하고, 그 후 죄책감에 빠지면서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 이 책에서 보인다.
5-2) 안나의 심리 변화(상)
브론스키를 처음 만나고 그에게 관심이 간다는 것을, 톨스토이 특유의 서술체로 복잡한 심리묘사를 보여주는데 정말 탁월하다... 금단된 사랑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을 예전에 롤리타에서도 봤었는데 오랜만에 그때 느낀 감정을 또 느낄 수 있었다.
잘못된, 분명히 금단의 영역인데 역설적으로 그것을 아름답게 보는 독자... 롤리타 이후로 만난 사랑 내용이었다. 이때 이 둘이서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느냐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되느냐는, 당신에게 달려있습니다."라는 말을 보면서 '진짜 올인을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이러한 심리는 그 이후 그녀는 죄책감을 느끼는데, 자기 자신이 큰 죄악을 저질렀다는 것을 할고 후회하면서 브론스키 앞에서 우는 장면에 서 그것이 드러난다. 그리고 브론스키가 자기 입으로"당신의 인생이 파멸로 몰아갈 수어요"라고 걱정하는 장면을 보면서 이 관계의 불안이 보였다.
5-3) 카레닌의 반응
사실 저렇게 두 사람 간의 사랑과 그들의 감정 변화를 말했지만 여기서 빠진 인물이 있다, 바로 안나카레니나의 남편 카레닌이다. 카레닌은 불쌍하다 or 저걸 몰라?라는 생각이 절로 들면서 읽게 된다. 하지만 이 궁금증과 의문은 정말 단순하게, 톨스토이가 정리해버리는데 바로 "신뢰"라는 키워드이다.
내가 상대방, 안나카레니나를 의심하는, 질투하는 것은 결국 그녀를 신뢰를 안에서 의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렇게 신뢰라는 측면에서 이 사태를 바라본다는 것에서, 카레닌의 안목에 놀랐고 이것까지 생각한 톨스토이에게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물론 이렇게 이야기는 했어도 결국 불륜은 사실이었고. 카레닌은 점점 그 신뢰를 잃어가면서 의심을 한다. 그렇게 그의 심리가 바뀌는 모습도 인상 깊었다.
이 의심이라는 키워드는 사실 레빈의 파트에서도 나온다. "의심은 인간의 연약함에 깃든 고유한 특성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자비하신 하느님이 우리를 강하게 해 주시길 바라며 기도해야 합니다. 당신은 특별히 어떤 죄를 지었습니까?"라는 사제의 말에 그는 "저의 가장 큰 죄는 의심입니다 저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의심 속에서 살아갑니다"라는 말을 한다.
무언가를 믿을 수 없는 연약한 인간은 늘 의심을 하고 그것은 곧 죄를 만든다는 것, 개인적으로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파트였다. 우리는 왜 의심을 하는 것일까? 100개의 의심을 해도 이중 0~5개가 이뤄질까 말까 한데 우리는 그 0~5개를 두려워할 정도로 나약한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5-4) 안나카레니나의 심리 변화(중)
이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브론스키와의 사랑을 위해 달려고 안나 카레니나가 점점 고통받은 것이 있으니 바로 그녀의 아들"세료자"이다. 안나카레니나는 브론스키와의 사랑을 유지하면서도 그의 아들 세료자의 대한 사랑은 멈출 수가 없었고 그녀는 계속 세료자를 보고 싶어 한다. 우리가 보기에는 정말 미친 사람처럼 보일 수 있는 요구 "세료자는 내가 키우겠다"라는 말도 하는 것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자식을 사랑했는지, 또 한편으로는 사랑이라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이 자식 사랑이라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게 된다. 그리고 이 갈등의 클라이 맥스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안나카레니나와 세료자의 상봉이야기다.
카레닌은 아들 세료자에게 안나카레니나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쳤다. 그러나 아들은 안 믿었고 그러다가 안나카레니나와 세료자가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참 뭐라 할까 "자업자득:, 자신이 불륜이라는 죄악을 선택한 대가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악역인 것을 알면서도 같이 마음이 아파지는 장면이었다.
대체 자식과 부모의 사이는 무엇일까.. 그리고 사랑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끈끈하고 소중한 자식과 부모의 관계를 망가트릴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5-5) 카레닌은 과연 안나카레니나를 용서할 것인가?, 카레닌의 울분
사실 우리가 보기에는, 어찌 보면 당연하지만 용서라는 것이 굉장히 웃긴 것이다. 자신은 그저 열심히 일하면서 자식을 키우고 있었는데 아내라는 여자가 딴 남자랑 사랑을 하고 애까지 임신하면서 그래놓고 자식은 보고 싶어 하는, 제3자의 입장에서는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할 정도로 화가 나는 악역의 모습을 보여준다.
실제로도 카레닌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아요. 그리고 그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난 그 여자를 위해 모든 걸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진흙탕에 내던졌습니다. 진흙탕이야말로 그녀의 타고난 본성이죠. 난 악한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미워해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녀가 죽도록 밉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내게 한 그 모든 사악한 짓들이 너무나 미워서 이제는 그녀를 용서할 수조차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독자들 모두 이 카레닌의 울분에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5-6) 카레닌은 그러나 용서를 한다, 용서의 가치
그러나 카레닌은 안나 카레니나가 출산을 하다가 죽을 뻔하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게 된다. 그는 죽어가는 안나카레니나를 보면서 그녀를 용서한다. "하지만 난 아내를 본 후 그녀를 용서했습니다. 그리고 용서의 행복이 내게 나의 의무를 보여 주었습니다. 난 완전히 용서했습니다. 나는 다른 빰까지 내밀고 싶습니다. 내게서 카프탄을 앗아 가는 사람에게 루바슈카까지 건네주고 싶습니다. 난 하느님에게 그저 그분이 내게서 용서의 행복을 빼앗지 않기만 기도할 뿐입니다!"라는 말을 한다.
사실 이것을 읽으면서도 나는 카레닌이 말하는 용서의 행복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전에 카레닌의 내적갈등을 좀 봐야 한다. 안나카레니나가 자신이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자책하는 것을 보고 카레닌은 큰 혼란에 빠진다. 결국 그는 너무나도 큰 내적갈등으로 인해서 그러한 내적갈등과 갈등하는 것을 포기하는 지경이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되니 그는 새로운 감정이 생겼다. "그러자 불현듯 그는 정신적 혼란이라고 생각한 것이 오히려 자신에게 지금까지 맛보지 못한 새로운 행복을 느닷없이 안긴 정신적 행복임을 꺠달았다. 그는 자신이 평생 따르고자 했던 그리스도교의 율법이 그에게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라 명령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수에 대한 사랑과 용서라는 기쁜 감정이 그의 영혼을 채웠다" 결국 모든 내적갈등을 포기하니 행복이 찾아오고, 용서라는 것이 그의 영혼을 채운다는 것.... 이점은 사실 개인적으로는 납득이 안 되는 부분이어서 독후감을 쓰면서 처음으로 여러 사람들과 "용서의 가치"라는 것에 대해서 토의를 했다
5-7) 용서라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
&여기서부터는 다양한 분들과 이야기하면서 나온 이야기를 저의 방식대로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냥 그렇구나~ 하면서 넘겨주셔도 좋습니다
책을 읽은 분, 혹은 책을 안 읽고 대략적인 설명을 하고 나서 몇 분 들과 이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과연 그가 용서를 하면서 행복을 느낀 점과 그가 용서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이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보다 더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였는데 바로 안나카레니나가 사과를 하는 것이 과연 용서를 구하기 위해 한 말인가?라는 생각이었다.
실제로 안나카레니나는 카레닌에게 "당신은 용서하지 못할 거야! 나도 알아요, 그런 짓은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 아냐, 아냐, 가 버려요, 당신은 정말로 착한 사람이에요!"즉 그녀는 자신이 용서를 받기 위해 하기 위해 사과를 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잘못을 말하면서 참회하는 것이다.
이것을 정의한 이유는 왜 카레닌이 안나카레니나의 사과를 받아줬냐의 대한 의문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용서를 받기 위한 사과와 그냥 사과를 나누어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잠깐 눈을 돌려 현대 사회에서 용서라는 것을 바라보는 인식을 본다면,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와 같은 말들이 돌아다니고 반성문도 그냥 소설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위에서 이야기한 사과를 두 가지 종류로 구분하는 않고 묶어서 봤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용서를 구하면서 하는 사과, 이것은 진심이라고 보기도 어렵다는 것이고 그것을 용서해 줬을 때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용서라는 것을 바라는 것은 "사과"를 거래라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과했으니 이제 당신 차례야 받아줘" 이렇게 생각하면서 하는 사과는 지금 현대 사회에서 말하는 사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본론에서 말하는 용서를 구하지 않는 참회는 그것과 결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내가 한 잘못을 참회하면서 벌을 받겠다는 수용, 이런 자세의 참회, 사과가 카레닌이 용서를 한 이유라고 생각할 수 있다.
5-8) 다른 시각에서는...
솔직히 그냥 카레닌이 그냥 엄청난 현자, 부처라고 생각하면서 넘어갈 수도 있지만 이렇게 넘어가기에는 이 용서라는 카테고리를 갖고 이야기할 부분이 너무 많다.
그리고 (5-7)에서 이야기한 것과는 다르게 다른 시각에서는 그저 카레닌이 용서를 한 이유가 그러한 진심 어린 사과여서 그런 것이 아닌 철저한 계산을 해서 사과를 했다는 시각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카레닌은 일단 무고한 피해자다, 가정에 헌신했지만 아내가 외도한 상황이고 그것으로 인해 어느 정도 사회적인 평판에 흠이 생기면서, 혹은 동정하는 여론이 생겼을 수 있다. 이때 그가 만약에 안나카레니라를 용서한다면, 사회적 평판에 도움이 될 수 있고, 카레닌에게 우호적인 여론이 많아질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카레닌의 용서라는 것은 철저한 계산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카레닌의 용서의 가치가 낮아지는 것이 아니다. 결국 용서라는 것을 한다는 것,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기에 말이다.
5-9) 안나카레니나의 심리 변화(하)
이렇게 혼란스러운 와중에 또다시 흔들리는 계기가 되니 바로 블론스키를 의심하는 순간부터이다. 안나는 브론스키가 사랑이 식기 시작했다는 것을 확신하기 시작했는데 그러면서 점점 정신적으로 피폐해진다. 브론스키가 무엇을 하든 심지어 가끔 다정한 순간이 있더라도 그는 계속 질투를 하면서 분개를 한다.
그걸 인지한 브론스키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온갖 짓을 다했다. 그러나 그녀는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딸이 자신의 딸이 아니라고 의심하면서 광란을 이르기는 단계까지 왔다. 그렇게 혼자 생각을 하며 혼자 만의 세계관에서 고통받던 그녀는 결국 혼자 기차에 몸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