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대심문관 해석해 보기
제목이 너무 자극적이라서 놀라서 들어오신 분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 글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나오는 에피소드 "대심문관"편만을 해석하는 글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대심문관의 해석은 정답이 아니며 각종 해석을 보면서 저만의 답을 내린 것이라는 것을 참고 부탁드립니다. 의견에 동의하지 못하거나 아쉬운 점이 있으시다면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1. <대심문관> 앞 줄거리
대심문관파트를 이야기하기 전 간단하게 등장인물에 대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무신론자인 이반과 수도승인 알료샤라는 캐릭터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반이 알료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대심문관인 것이죠. 대심문관이야기 하기 전 이반은 알료샤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신이 존재한다면 왜 무고한 아이들의 죽음이 있는가? 대체 왜 아이들은 죽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설사, 이것이 고귀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일어나는 희생이라고 해도 어찌 그러한 순수한 아이가 죽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점은, 일반적으로 크리스트교에서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가 있다고 하는 것을 이반은 그것을 동의하지 않은 걸로 볼 수 있죠. 이에 대해 알료샤는 그러한 아이들의 희생이 예수님과 같이 희생을 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것을 보고 이반은 그것에 대한 반박으로 대심문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2. 대심문관
&본 글은 최대한 이야기를 압축해서 해석에 중점을 둔 글임으로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한번 읽고 오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이반은 16세기 마녀사냥이 가득한 세상에 예수가 재림한 것으로 설정을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재림한 예수가 사람을 살리고 눈을 뜨게 하는 것을 보고 진짜 예수가 재림했다고 생각하죠, 그것을 본 대심문관은 재림한 예수를 잡아넣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재림한 예수는 감방에 들어가고 나이가 아흔 살 먹은 대심문관은 그를 바라보며 추궁을 합니다
3) 대심문관의 주장.
대심문관이 해심적으로 예수에게 주장하는 것은 바로 그가 인류에게 준 "자유"라는 것에 대한 비판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대심문관은 광야의 유혹으로부터 지켜낸 자유의지에 대해서 비판을 하는 것이죠.
3-1) 광야의 유혹 1. 기적
먼저 그는 광야의 유혹 중 기적이라는 항목에 대해서 지적합니다. 40일간 금식을 한 예수에게 악마는 빵을 돌로 바꾸라는 임무를 내리지만 그것을 예수는 거부하죠, 여기서 대심문관은 돌을 빵으로 바꾸는 기적을 보여줘서 사람들이 너를 믿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너무 나약해서 그러한 기적을 안 보여주면 믿지 않는다는 것이죠, 설령 그 기적을 행하지 않아도 믿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러한 사람들은 소수인데 그 소수가 그 외에 다수보다 더 소중하냐고 지적합니다.
3-2) 광야의 유혹 2. 신비
그다음 악마는 예수를 성전 위로 올려서 네가 만약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서 떨어져 보라고 시험합니다. 이때 예수는 아무런 행동을 하지도 않고 그것을 거부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대심문관은 여기서 "신비"를 이야기합니다. 신비랑 기적이 개인적으로는 너무 헷갈려서 여기서 구분을 하자면, 기적은 1번에서 말한 돌이 빵으로 바뀌는 것, 신비는 그것이 기적이 눈앞에서 보이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다시 돌아가서 대심문관은 먼저 예수가 그 시험을 거부한 것을 칭찬을 합니다. 만약 거기서 네가 뛰어내린다면, 하려고 한걸음이라도 앞으로 나갔다면 그것은 네가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임으로 모든 신앙을 잃기에 그 행위는 올바른 것이라고 칭찬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그러한 굳은 신념이 없고 기적이 앞에서 보이는 신비를 원한다고 설명하며 비판합니다.
3-3) 광야의 유혹 3. 권위
3-1,3-2에서 말한 것을 다시 요약하자면, 자유대신에 기적, 그리고 그것을 앞에서 보여주는 것을 신비, 이것을 우리한테 줬어야 한다. 그리고 대심문관은 만약 네가 이 두 가지 기적과 신비를 행했다면 인류에게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고민을 해결시킬 수 있을 텐데 바로 "누구한테 경배할 것인가"라는 권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3번째 유혹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3번째 유혹은 악마가 예수에게 자기 앞에서 경배하면 온 세상을 주겠다는 것을 거부한 것인데 대심문관은 여기서 네가 경배를 해서 권위를 챙겼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안 하고 인류가 얻은 자유라는 것을 인류는 감당 못하고 그들은 숭배할 사람에게 자신의 자유를 반납하고 복종해야지 그들은 비로소 자유롭게 된다. 왜냐하면, 인류에게 자유는 큰 혼란에 빠지고 혼란스러운 상태를 만들기 때문이다. 선택의 자유라는 것으로 인해 인간은 계속 큰 혼란에 빠지고 누구한테 경배해야 하지? 하는 점 때문에 혼란스러운 상태가 계속되니 네가 거기서 경배를 해서 그 자유를 막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4) 예수의 대답
얼핏 보면 완벽한 논리이고 이것을 반론할 여지는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마치 그것을 동의한 듯 예수는 아무 말도 없다가. 반응을 합니다(이 부분은 너무 중요해서 처음으로 강조를 해보겠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죄수는 말없이 노인에게 다가오더니, 90 나이의 그 핏기 없는 입술에 조용히 입을 맞췄지."
라는 대답만 보여줍니다... 논리적으로 그렇게 반박을 해도, 결국에 그것은 인류를 사랑하기 때문이 그랬다고 해석되는 것이죠.
5)개인적인 감상
사실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처음 읽었을때 이해가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저도 이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 kci 논문과 이 책을 번역한 김연경 작가님의 영상을 보면서 겨우 이해했지만 지금도 이해안되는 부분이 드문드문 있습니다. 이반의 <반역>에서 <대심문관>으로 넘어가는 과정이나 광야의 유혹의 신비 파트가 개인적으로는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해석하게된 이유는 마지막 예수님의 답변 때문입니다.그렇게 논리적으로 하나하나 비판을 하면서 왜 그랬냐고 물어봐도 결국에는 사랑이라는 예수의 답변이 저는 정말 인상깊은 대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해석하면 할수록 도스토예프스키의 위대함이 들어나는 책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대심문관 해석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