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유난히 글이 써지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쓰려고 하면 자꾸 생각이 흩어졌다.
단어 하나를 적어놓고도 한참을 멍하니 화면만 바라봤다.
퇴직 후에 무엇을 할지, 어떤 글을 써야 할지, 그런 것들이 아니라 그냥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커피를 마시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였다.
내 뒤쪽에서 누군가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깊고, 오래된 숨.
사람의 숨이라기보다는 오래 묵은 공간이 스스로 내쉬는 숨 같았다.
나는 몸을 굳힌 채로 서 있었다.
이 사무실에는 나 혼자다.
경비도, 청소하는 사람도 없다.
엘리베이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설마.”
뒤돌아보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용기는, 대개 후회를 동반한다.
그는 거기 서 있었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으며, 무엇보다 냄새가 먼저였다.
며칠, 아니 몇 달은 씻지 않은 사람에게서 나는 냄새.
젖은 가죽과 땀, 오래된 바닷물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수염은 가슴까지 내려와 있었고, 옷인지 천 조각인지 모를 것을 두르고 있었다.
발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Water.”
그가 말했다.
아니, 외쳤다고 해야 맞았다.
“Coffee.”
이번에는 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 남자를 나는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책 속에서.
“로빈슨 크루소…?”
내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신이 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영국식 발음으로 뭐라 뭐라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너무 빨라서, 너무 길어서, 단어와 단어 사이에 숨 쉴 틈도 없었다.
나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나마 들리는 건 계속 반복되는 단어 몇 개뿐이었다.
“Water.”
“Coffee.”
“Water.”
“잠깐만요. Stop. Stop.”
손을 들어 막아봤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내 책상 위에 올라앉아 주변을 둘러보며 더 크게 떠들었다.
키보드 위로 흙먼지가 떨어졌다.
“여긴 무인도 아니거든요.”
내가 말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대신 창밖을 가리키며 또다시 뭔가를 외쳤다.
마치 내가 이 섬의 주민이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 순간, 창밖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제 봤던 그 고양이였다.
“저 사람 뭐래?”
나는 무심코 고양이에게 물었다.
고양이는 잠시 나를 보더니, 하품을 했다.
아주 길게.
“그래, 너도 모르겠지.”
그때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길고양이와는 이렇게 자연스럽게 말을 섞으면서, 영국 사람과는 단 한마디도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근데 말이야.”
나는 크루소를 보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길고양이랑은 대화하면서, 영국 사람이랑은 왜 이렇게 안 될까?”
그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리고 내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숨 냄새가 그대로 밀려왔다.
“Water.”
그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물 중요하지.”
그날 이후로, 이 사무실은 더 이상 완전히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