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입배스

by 가을하늘 김민규
작은입배스(Smallmouth Bass)는 큰입배스(Largemouth Bass)보다 상대적으로 작은 입을 가지고 태어났다. 실제로 보면 입 크기가 그리 작은 건 아니지만, 큰입배스가 사냥하는 먹잇감보다 작은 걸 노린다고 상상하게 된다. 사냥 횟수가 늘어날 테지만, 오히려 힘이 덜 들 테니 입 크기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로 미국 미시시피강에 서식하는 작은입배스는 1973년 우리나라에 큰입배스와 함께 이식되었다. 현재 큰입배스는 생태계 최상위층에 위치했지만, 작은입배스는 적응하지 못하고 전부 폐사했다. 아시아에 서식 중인 배스는 한국의 큰입배스와 일본의 플로리다배스(Florida Bass)가 유일한 줄 알고 있었는데, 최근에서야 작은입배스가 일본에 서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J는 미국 버지니아의 작은 대학도시인 블랙스버그에서 유학 중 처음 작은입배스를 알게 되었다. 그는 학교에서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없었고, 특별히 즐기는 취미도 없었던 터라 수업을 듣는 것 이외에는 거의 집안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어느 순간 만사가 귀찮아지고 의욕이 상실되는 증상을 겪게 되었다.


그를 진찰했던 주치의는 주말 야외활동을 권장했는데, 평소 그 지역 남자들이 즐겨하는 작은입배스 루어낚시를 추천했다. 낚시는 어릴 적 지렁이를 바늘에 끼워 손바닥만 한 붕어 몇 마리를 잡은 게 고작이었던 그에게 배스라는 이국적인 물고기를 루어로 낚아내는 낚시가 매우 흥미로워 보였다. 육식어류 특유의 공격성과 당찬 손맛에 금방 루어낚시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이제는 주말이 되면 캠퍼스 근처 뉴리버 선착장에서 작은입배스를 낚으며 시간을 보냈고, 우울증 증상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하루는 그가 한참 낚시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Excuse me. Can I ask you something?"

"Sure."

"Are you Korean?"

"Yes."

"휴, 살았다. 안녕하세요? 저도 한국사람이에요. Y라고 해요."

"아, 네. 안녕하세요. 전 J에요."

"실례가 안 된다면 핸드폰 좀 빌려주실 수 있나요?"

"무슨 일이시죠?"

"방금 버스에서 내렸는데, 지갑이랑 핸드폰이 없어져서요. 아마도 제가 잠깐 잠든 사이에 소매치기를 당한 것 같아요."

"미국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할 땐 절대 눈을 감으면 안 되죠."

"그러게요. 우리나라랑 분위기가 정말 다르네요. 미국엔 오래 사셨나요?"

"4년 됐어요. 지금 대학교 4학년이고요. 여행 중이신가 봐요."

"네. 친한 언니가 버지니아에 살고 있는데, 잠시 놀러 왔다가 이런 일을 당하네요. 잠시만요."


그녀는 핸드폰을 건네받고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번호를 눌렀다.


"언니. 나야, Y. 나 어떡해..."


통화하는 내내 울먹이는 게 느껴졌다.


"알았어. 언니. 금방 갈게. 이따가 봐."


전화를 끊고 나더니 금방이라도 눈물이 펑펑 쏟아질 것 같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제가 더 도와드릴 일은 없나요?"

"아니요. 충분히 도와주셨어요. 택시비는 도착하면 언니가 내주기로 해서 문제없을 것 같아요. 그만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어떡하죠?"

"얼른 가세요. 언니가 걱정하시겠네요."

"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조심해서 가세요."


그녀는 뒤돌아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벗어났다. 그는 잠깐이었지만 그녀의 연락처를 물어보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했다. 얼굴이 예뻤고, 나이도 얼추 비슷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오랜만에 한국어로 대화를 할 수 있어서 좋았고, 가능하다면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처음 본 사람의 연락처를 아무렇지 않게 물어볼 정도의 성격은 아니었다.


그는 다시 낚시에 집중했다. 하지만 오늘따라 작은입배스의 입질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핸드폰으로 모르는 번호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받지 않았다. 전화벨이 그치고 나서 곧바로 문자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Y에요. 며칠 전에 핸드폰 빌렸던. 덕분에 여행 잘 마치고 한국으로 곧 돌아갑니다. 그땐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감사의 표시도 못 하고 헤어진 것 같아서 연락드렸어요. 시간 되시면 잠깐 볼 수 있을까요?


그녀의 언니 전화에 남겨진 번호를 보고 연락한 모양이었다. 그는 곧바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J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지난번엔 정말 고마웠어요."

"아닙니다. 고작 핸드폰 빌려드린 게 전부였는데요."

"아니에요. 그땐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너무 무서워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는데, 다행히 같은 한국 사람을 만나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어요."

"저라도 아마 그 상황이었으면 마찬가지였을 거란 생각이 드네요."

"정말 큰 도움이 되었어요. 그래서 말인데요. 시간 되시면 잠깐 볼 수 있을까요?"

"네. 그러시죠. 어디서 볼까요?"

"지난번에 만났던 곳은 어떠세요? 제가 아직은 이곳 지리에 익숙하지 않아서요."

"네. 그렇게 하시요. 뉴리버 선착장으로 오시면 됩니다."

"네. 그럼 30분 뒤에 봐요."

"네."


그는 전화를 끊고는 곧바로 샤워하러 욕실로 들어갔다. 아침에 샤워하긴 했지만, 그녀에게 좀 더 잘 보이고 싶었다. 샤워하는 내내 입고 나갈 옷을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생각이 점점 많아지니 더 허둥지둥했다. 출입문을 잠그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는 기숙사 밖으로 뛰어나가 택시를 잡았다. 선착장까지는 차를 타면 십 분 정도 거리로 그리 멀지 않았지만, 오늘따라 멀게만 느껴졌다.


그녀는 이미 선착장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웨이브가 들어간 갈색 머리에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굽이 조금 있는 샌들을 신고 있었는데, 가늘고 흰 발목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며칠 전 봤을 땐 그냥 예쁘다 정도였는데, 오늘 자세히 보니 상당한 미인이었다. 작고 갸름한 얼굴에 쌍꺼풀 있는 눈과 뾰족한 콧날, 언뜻 보면 연예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대학교 4학년이라고 하셨죠?"

"하하. 기억하고 계셨네요."

"네. 그땐 정말 경황이 없어서 못 물어봤는데,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스물다섯 살입니다."

"어머, 저랑 동갑이시네요."

"대충 저와 비슷해 보였는데, 제 느낌이 맞았네요."

"전공은 뭐예요?"

"영문학입니다. 그쪽은 뭐 하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호호. 제가 질문이 많았죠? 궁금한 게 생기면 못 견디는 성격이라서요. 전 OO대학교 대학원에 다니고 있어요. 전공은 국문학이고요."

"저랑 비슷한 점이 많네요. 나이도 같고, 같은 문학을 전공하고요. 하하하."

"그러네요. 알면 알수록 공통점이 자꾸 생기네요. 신기해요."

"한국엔 언제 돌아가세요?"

"내일이요. 오후 2시 비행기로요."

"그럼 아직 하루 정도 시간이 있네요. 다행입니다."

"아 참, 깜빡했어요. 도와주신 감사의 표시로 작은 선물을 준비했어요."


그녀는 가방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대단한 건 아니니깐 너무 기대는 하지 마시고요. 나중에 돌아가서 풀어보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근데 제가 대단한 걸 한 게 아닌데 받아도 될까 모르겠네요."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으세요."

"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는 그녀를 선착장 근처 식당으로 안내했다. 맛있는 음식과 감미로운 재즈 음악, 그리고 적당한 음주가 둘 사이의 대화를 더욱 즐겁게 해 주었다. 만난 지 몇 시간밖에 안 지났는데도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처럼 친밀감이 생겼다.


"대학교를 졸업하면 뭘 할 계획이야?"

"아직은 특별히 하고 싶은 건 없는데, 기회가 된다면 초등학생을 가르치면 어떨까 생각 중이야."

"오, 영어 선생님.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해?"

"낯선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고, 목소리도 듣기 좋고, 잘 생겼고. 호호호."

"너 좀 취한 것 같은데. 하하하."


마감 시간이 다 되어간다는 웨이터의 안내를 받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계속해서 밤새 이야기할 분위기였다. 아쉽지만 이제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우리 다시 볼 수 있을까?"

"그럼. 한국에 오게 되면 꼭 연락해 줘."

"졸업 이후에 잠시 귀국할 생각이었으니까 내년 봄쯤 볼 수 있겠다."

"그때까지 내가 결혼하지 않으면."

"결혼?"

"농담이야. 농담! 호호호."

"그래. 그때까지 네가 결혼하지 않으면. 하하하."


식당 앞에서 택시를 잡아 그녀를 먼저 보내고는, 한동안 그는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 그녀와의 대화 내내 풍겼던 향수 냄새와 깔깔거리며 웃던 웃음소리, 웃을 때마다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가 또렷하게 떠올랐다 사라졌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술기운을 없앨 겸 잠시 선착장 주변을 혼자 걷기로 했다. 한밤중에 뉴리버에 와 본 적은 처음이었다. 아직은 3월이라 밤공기가 차가웠지만, 술을 마셔서인지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두워서 정확하게 잘 보이진 않았지만, 간간이 물 위를 뛰어오르는 작은입배스의 첨벙 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따라 물비린내가 유난히 짙게 느껴졌다.

그의 손에는 작은 상자가 꼭 쥐어져 있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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