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과장 이야기

첫 번째 단편소설

by 가을하늘 추천

김 과장은 오늘도 새벽같이 잠에서 깨어났다. 주말엔 늦잠을 자도 될 텐데 새벽 5시만 되면 자동으로 눈이 떠졌다. 그의 나이는 올해로 51세가 되었다. 몇 년 전부터 갱년기 증상을 겪고 있는 듯 아무리 늦게 잠자리에 들어도 항상 새벽만 되면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습관처럼 스마트폰을 찾았다. 어젯밤 미국 주식시황과 코인 시세를 확인하고는 곧장 화장실에서 소변을 본 후 뒤 베란다에 나가 담배를 피웠다.


남성 갱년기 주요 증상으로는 성욕과 발기기능의 감소, 특히 야간 발기의 감소, 기분의 변화, 지적능력 및 공간 지각력의 감소, 피로감, 우울증을 보이게 되며 신체적으로는 근육량 감소, 내장지방의 증가, 체모의 감소, 골밀도 감소 등이 나타날 수 있다. 네이버(2025.7)


그가 지금 사는 숙소는 15평 아파트다. 혼자 살기에는 딱 적당한 크기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그리고 사택이라 필요한 가구와 가전제품이 비치되어 있다. 안방에는 침대, 벽장, 에어컨, 책상, 텔레비전이 있고, 부엌 겸 거실에는 싱크대, 가스레인지, 냉장고, 식탁, 전자레인지가 있다. 뒤 베란다에는 세탁기도 있다. 화장실 앞 작은 방은 미닫이문으로 되어 있어 문을 제거하면 작은 응접실처럼 쓸 수도 있는 구조다. 그래서인지 작은 평수에 어울리지 않는 소파와 테이블 세트가 있다. 앞 베란다에는 에어컨 실외기와 천장형 빨래건조대가 있는데 (아파트가 오래돼 천장에서 벗겨진 페인트 가루가 수시로 떨어져서 ) 빨래는 주로 베란다 앞 창가에 실내건조대를 사용 중이다. 숙소에서 조금 아쉬운 점이라면 화장실이 작아서 욕조가 없다는 거다. 퇴근하고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서 반신욕을 즐길 수 없다는 점이 조금 아쉽기는 한데, 평소 그는 목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서 (는 아니고 욕조에 받아 놓은 물을 그냥 버리기 아까워서) 미지근한 물로 샤워하는 정도로 만족하고 있다. 좌변기에 개인적으로 비데를 설치하고 싶은 생각이 있긴 한데, 어차피 내년 3월 말까지만 있을 곳이라 그냥 지내기로 했다.


그는 식탁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재즈 음악을 틀어놓고 커피를 홀짝이며 이번 주말에 할 일을 고민했다. 하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 최근 들어 매사에 의욕이 없고, 모든 게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지금 갱년기 증상을 겪고 있는 게 틀림없다.


'토요일인데 오늘은 뭘 할까?'


그는 평소에 음악을 즐겨 들었다. 젊은 시절엔 메탈리카, 라우드니스의 헤비메탈 음악과 잉베이 맘스틴, 게리 무어가 연주하는 전기기타 연주곡을 좋아했었는데, 요즘은 스탄 게츠, 아스트루드 지우베르투, 빌 에반스, 엘라 피츠제럴드, 쳇 베이커, 냇 킹 콜, 루이 암스트롱 같은 오래된 재즈 뮤지션의 조용한 음악 위주로 듣고 있다. 커피는 자주 마시는 편인데 주로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면 오래전부터 깨져있는 오른쪽 윗어금니가 시려서 한여름에도 잘 마시지 않는다. 좋아하는 원두는 썩은 고구마 맛이 나는 에티오피아 예가체프이고, 퇴직 후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고 싶은 생각은 아직 없다.


그의 취미는 배스 낚시다. 주말이 되면 평일에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두었던 포인트를 찾아다니며 하루 종일 낚시를 하곤 했다. 낚시가 너무 재미있어서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 온종일 굶다시피 하며 낚시에만 몰두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최근엔 거의 낚시를 가지 않는다. 오른쪽 무릎의 퇴행성 관절염으로 인해 장시간 서 있기가 불편한 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고, 시기적으로 배스가 잘 안 잡히는 산란기 직후이기도 하고, 점점 더워지는 날씨 탓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낚시로 배스를 잡아야겠다는 의욕 자체가 생기질 않아서다. 그는 이번 주말도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숙소에서 빈둥거리면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게 될 것만 같아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오늘은 그림을 그려볼까?'


그가 중학생 때 미술에 소질이 있다는 걸 발견한 미술 선생님으로부터 전문적인 미술공부를 제안받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 미술을 포기했다. 미술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려면 미술전공대학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려면 입시 준비를 위해 미술학원도 다녀야 하고, 미대에 입학하더라도 많은 돈이 들 거란 생각에, 집안 형편상 화가가 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후론 그림을 그린 적이 없었는데, 나이가 쉰 살이 넘어서 다시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다. 화가가 되려는 게 아니라 그냥 하얀 도화지 위에 뭔가를 그리고 싶다는 욕구가 나도 모르게 생겼다. 미술을 그만둔 지가 너무 오래된 탓에 자기가 의도한 대로 되지가 않아 매번 그릴 때마다 부족한 그림 실력에 속상해하지만, 그래도 뭔가를 그리고 싶다는 욕구를 참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요즘 수채물감으로 풍경화를 그리고 있다. 파란 하늘이 있고, 하얀 구름이 있고, 초록색 산과 들, 나무들이 있는 (그가 항상 일과시간에 마주하는 컴퓨터 모니터 화면보호기 같은) 풍경이다. 가끔은 주황색 노을이 물든 저녁 하늘을 그리기도 하고, 칠흑 같은 어두운 밤을 그리기도 하지만, 항상 그리는 주제는 하늘과 구름과 산과 들과 나무였다. 그의 숙소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주로 그러하였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만큼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서, 2년 뒤 퇴직 후 뭘 하면서 살아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그는 1~2년마다 근무지를 옮겨 다니며 일하는 직장을 다니고 있다. 자녀들이 점점 커가면서 집을 사서 가족을 정착시키고는, 8년째 혼자 떨어져 주말부부를 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직업군인이셨다. 어렸을 적부터 자주 이사 다니던 게 몸에 배서 그런지 지금의 상황이 당연한 숙명(宿命)처럼 느껴졌다. 한 군데 정착하지 않고 주기적으로 옮겨 다니며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는. 그런 그의 주변에 사람들이 남아 있을 리 없다. 그래서 그는 혼자만의 생활에 익숙해져 있다. 늘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산책을 하고, 혼자 낚시 가고, 혼자 술을 마시고, 혼자 잠들고.


지금 직장에 취직하기 전에는 그에게도 친구가 있었다. 초등학교 땐 만화를 잘 그리던 짝꿍이 있었고, 중학교 땐 도시락 반찬으로 맨날 김치만 싸 오던 녀석도 있었다. 고등학교 땐 여자친구도 있었는데,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헤어졌다. 헤어질 당시에 대학교 합격발표가 나면 다시 만나자고 약속을 했는데, 막상 대학에 떨어지고 나니 다시 연락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리고는 그의 기억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대학교 땐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만 하던 친구(그 친구는 지금 대학교수가 되었다)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은 없다. 그에게 지금 유일한 친구는 아내가 전부다. 그래서 그는 아내에게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항상 하지만, 막상 주말에 아내를 만나면 마음과는 다르게 말과 행동을 하게 되고, 아내가 돌아가고 나면 늘 후회했다.


아내를 만나 결혼하기 전, 그에게는 사귀던 애인이 있었다. 그의 애인은 키 165센티미터에 몸무게가 43킬로그램 정도 나가는 마른 체형에, 검고 긴 생머리를 하고 다녔다. 얼굴은 갸름하고 턱이 뾰족한 스타일이고, 눈엔 쌍꺼풀이 없는, 애니메이션 <포카혼타스>에 나오는 캐릭터 같은 느낌의 여자였다. 나이는 그보다 한 살 어렸고, 생일이 성탄절 전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가 생일을 아직도 기억하는 이유는 그날 애인과 크게 다툰 일이 있어서다. 근데 무엇 때문에 다퉜는지는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첫사랑은 대부분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는데 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가 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동안, 애인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우연히 만난 남자와 눈이 맞아 그에게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했다. 애인은 고등학교 때 사귀었던 여자친구처럼 그의 기억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그는 요즘 자신이 월급 루팡이란 생각이 든다. 그도 한때는 직장에서 잘 나간 적도 있었고, 늦게까지 야근하면서 열심히 회의자료를 만들고, 발표준비를 위해 새벽같이 출근한 적도 많았었는데, 지금은 직장에서 뒷방 늙은이, 퇴물 취급받으며 한직으로 물러나 하루하루 월급만 축내고 있는 것 같아 동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 일하는 부서는 그가 자원(自願)해서 온 것이지만, 설령 열심히 일할 수 있는 다른 부서를 지원했다 하더라도 이제 내일모레 퇴직할 사람에게 굳이 요직을 맡길 이유가 전혀 없었다. 열심히 일할 자리, 일한 만큼 인정받고 승승장구할 자리는 당연히 잘 나가는 후배들에게 양보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움도 많이 남았다.


2011년경부터 유행한 신조어로, 맡은 직무는 제대로 안 하면서 월급이나 축내는 직원을 말한다. 월급 도둑, 월급 벌레라고 부르기도 한다. 네이버(2025.7)


사실 그에게는 고등학생 때부터 하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소설을 쓰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 부모님께 말할 용기가 없었다. 하는 수없이 그는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그 당시 취직이 잘 된다는 전공을 선택해 대학에 들어갔고, 대학을 졸업한 뒤 무난하게 직장에 취직했다. 아내를 만나 결혼했고,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소설을 쓰고 싶다는 꿈은 고등학교 때 사귀었던 여자친구처럼, 아내를 만나기 전 애인처럼, 그의 기억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평범한 일상을 이어가던 그에게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건 한밤중에 걸려온 발신자 표시제한 전화 때문이었다.


"여보세요? 누구십니까?"

"오빠 나야, 은주."


그는 순간 머리가 하얘지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 은주?"

"그래 나야. 내 목소리 벌써 까먹었어?"

"...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근데 어떻게 내 전화번호를 알았지?"

"얼마 전에 우연히 세환 선배를 만났는데, 오빠 안부를 물어봤더니 전화번호를 순순히 알려주던데?"

"지난번처럼 세환이를 또 괴롭힌 건 아니고?"

"......"


그는 애인이었던 은주와 헤어지고 아내를 만나면서 전화번호를 바꿔버렸다. 결혼하고 아내가 둘째를 임신한 즈음에 그녀가 전화번호를 알아내 그에게 연락해 온 일이 있었는데, 그 당시 그녀는 과대표였던 세환을 찾아가 소동을 피웠다. 세환은 잘살고 있는 그의 가정에 분란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녀에게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지 않으려 했었다.


"그랬구나. 결혼은 했어?"

"아직. 나한테 딱 맞는 사람을 못 만났어. 오빠 애들은 많이 컸겠네?"

"그럼. 시간이 벌써... 한 25년쯤 지난 것 같은데."

"그렇구나. 오빤 아직도 직장 다니고 있고?"

"응. 이제 2년 뒤면 퇴직해. 너는 지금 어디서 뭐 하면서 지내?"

"나야 뭐..."


한밤중에 걸려온 전혀 예상치 못한 그녀와의 25년 만의 통화로 그는 잠시 예전 대학생 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날 이후로 그의 일상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새벽같이 깨어나던 수면습관이 바뀌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알람 소리가 울리기 전에 이미 깨어 있었는데, 지금은 알람 소리를 듣고도 금방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주말에는 늦잠까지 잤다. 몇 년 전부터 겪고 있는 갱년기 증상도 조금씩 호전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증상은 성욕과 발기기능이었다. 특히 야간 발기가 증가했다.


그는 그녀와 밤마다 전화통화를 했지만, 아내는 그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아내는 거의 일정한 시간(밤 10시 30분에서 11시 사이)에 그와 마지막 전화통화를 하고 잠이 들었는데, 신기하게도 그녀의 전화는 아내가 잠든 이후인 밤 11시 30분에서 12시 사이에 걸려왔고, 스마트폰 화면에는 발신자 표시제한 문자가 떴다. 그 점이 좀 이상해서 물어보려고 했지만, 과거 안 좋았던 기억이 있었던 사람이라 개인정보보호를 위해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물어보지 않았다. 그녀와 통화하는 동안만큼은 마치 30년 전 풋풋한 대학생이 된 것 같았고, 그는 평범했던 일상에서 조금씩 활기를 되찾았다.


"여보세요?"

"나야. 오빠 뭐 하고 있었어?"

"그냥 뉴스 보고 있었는데. 이제 자야지."

"오빠, 요새는 글 안 써?"

"글?"

"오빠 꿈이 소설가라고 했었잖아."

"... 그랬었나?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나를 모델로 하는 소설을 써준다고 했었는데, 기억 안 나?"

"내가 그랬었나?"

"다시 예전처럼 소설을 써보는 건 어때?"

"글 쓰는 걸 너무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살았는데 될까? 요즘은 책도 잘 안 읽는데..."

"오빠 목표가 신춘문예 당선되는 거였잖아."

"그땐 내가 철이 없었지."

"아니, 내가 볼 땐 오빠는 충분히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 지금은 사는 게 바빠서 잠시 잊고 있었던 거고, 오빠가 슬슬 써 볼까 하고 시작만 한다면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리고 뭐?"

"오빠가 글 쓰고 있는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막 흥분돼."


대한민국에서 일간 신문사가 주관하여 새해를 맞이해, 상금을 걸고 문학 작품을 공개 모집하여 새내기 문학 작가를 등단시키는 제도이다. 공모 분야는 소설, 시, 동시, 시조, 희곡, 동화, 평론 등이며, 매년 1월 1일 자 일간 신문 지면에 당선자를 발표하고 당선작을 싣는다. 네이버 위키백과(2025.7)


그는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피가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면서 손끝까지 찌릿하게 저린 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발기했다. 그날 이후부터 그는 퇴근 후 숙소 근처 도서관에서 밤늦게까지 책을 읽었다. 대학생 때는 좋아하는 일본 작가의 소설 위주로만 독서를 했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신춘문예에 당선될만한 소설을 쓰려면 개인 취향이 아닌 다양한 주제의 책을 읽어야 한다고. 정치, 경제, 문화, 예술, 역사, 철학, 과학, 수학... 그는 도서관에 꽂혀있는 모든 책을 읽겠다는 각오로 독서를 시작했다. 책을 읽으면서 본인의 소설에 인용할만한 문구를 노트에 필기하고, 틈틈이 신춘문예 응모작의 시놉시스도 몇 개 작성해 봤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체력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새벽에는 숙소 근처 수영장에 나가서 자유형으로 체력을 단련했다. 체중도 5킬로그램 정도 감량했다. 그리고 책상에 한 번 앉으면 5시간 정도는 쉬지 않고 컴퓨터 워드 작업을 할 수 있는 체력과 집중력을 갖게 되었다.


"뭐 해?"

"소설 쓰고 있었지."

"그럼 주인공은 지금 어떤 상황이야?"

"자취방에서 엄마의 남자친구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자살하려고 어딘가로 가고 있어."

"그렇구나. 그게 어딘데?"

"글쎄. 아직 고민 중이라 결정을 못 했어."

"그래? 그럼 옛날에 오빠랑 세환 선배랑 셋이서 갔었던 해운대 콘도가 어떨까? 주인공이 바다를 좋아하잖아. 아마도 죽기 전에 바다를 꼭 보고 싶어 했을 거 같은데."


그녀에게는 불행한 과거가 있었다. 아버지가 젊은 여자와 바람이 나서 그녀가 중학생 때 부모님이 이혼하셨고, 어린 두 동생은 아빠와 계모(繼母) 밑에서 자라야만 했다. 그녀는 그런 아버지와 같이 살기 싫어서 친척 집을 전전하다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 혼자 자취를 시작했다. 어머니는 이혼 후 혼자서 다방을 운영하셨는데, 그녀가 고등학생이 되던 해에 어머니에게 열 살 연하의 남자친구가 생겼다. 그녀의 어머니는 가끔 그녀를 보기 위해 자취방에 오셨는데, 그때마다 그 연하의 남자친구도 함께 왔다. 그러다 그 좁은 자취방에 셋이서 자는 경우도 종종 생겼다.


어느 날 한밤중에 어머니의 남자친구가 혼자 술에 취해 나타나서는 자취방에서 자고 가겠다고 막무가내로 동네에서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재워줬는데, 다음날 새벽 그녀는 어머니의 열 살 연하의 남자친구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그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그 남자를 진심으로 사람하고 있었고, 아버지와 이혼 후 혼자 다방을 운영하면서 연하의 남자친구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성폭행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머니가 받을 충격이 너무 클 것 같았다. 본인만 입 꼭 닫고 있으면 되는데 일부러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말수가 적고 어두운 아이로 변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친하게 지낸 친구가 거의 없었고,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과대표인 세환을 제외하고는 연락처를 알고 지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그와 연애를 할 수 있었던 건 정말 신기한 일이다.




그는 오늘도 새벽에 일어나 숙소 근처 수영장에서 자유형 25미터 왕복 20바퀴를 돌고, 일과 중에는 사무실에서 틈틈이 도서관에서 빌려 온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숙소에 돌아와 신춘문예 응모용 단편소설을 썼다. 그리고 잠들기 전에는 항상 그녀의 전화를 기다렸다. 전화벨이 울리면 두 사람은 그날 있었던 일들을 마치 대학생 때 연애할 때처럼 귓불이 빨개질 때까지 밤늦도록 수다를 떨다 잠이 들었다.


드디어 신춘문예 마감일인 11월 29일이 다가왔다. 당선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 같은 원고를 다른 기관에 중복 투고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의 성격상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최종적으로 문맥을 점검하고 오타를 확인했다. 인쇄 버튼을 눌렀다. 몇 달간의 노력이 에이포 용지에 출력되어 나오는 시간은 허무할 정도로 금방이었다. 하얀 종이 위에 까맣게 빼곡히 들어차 있는 글자들을 보고 있는 그의 검정 뿔테안경에 뿌옇게 김 같은 것이 서렸다. 그리고 어김없이 그녀의 전화가 걸려왔다. 밤 11시 30분에서 12시 사이에.


신춘문예는 중복 투고 시 심사에서 제외되며, 사후 확인될 경우에는 무효 처리됨. 또한 생성형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사실이 확인될 경우 당선이 취소됨. 동아신춘문예 공모요강(2025)


"오빠, 나야."

"그래, 기다리고 있었어."

"그럼 혹시 다 쓴 거야?"

"응. 다 썼어."

"그럼 결말이 어떻게 됐는지 물어봐도 돼?"

"너를 모델로 해서 쓴 글인데 당연히 알려 줘야지. 주인공은 자살하려고 해운대 콘도 옥상으로 올라갔는데, 옥상에서 주인공처럼 자살하려고 올라온 남자를 만났어. 처음엔 무시하려고 했는데, 자꾸 신경이 쓰여서 옆에 가서 말을 걸었지. 남자는 주인공을 경계하면서 계속 무시했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옆에 서 있으니까 그제야 자기가 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어. 주인공도 그 남자에게 자신이 왜 죽으려 하는지 말했지. 한참을 얘기하고 났더니 죽고 싶지가 않은 거야. 그 남자도 마찬가지로 죽고 싶다는 마음이 다 사라지고 주인공이 예쁘다고 생각했어. 주인공도 남자가 꽤 잘 생겼다고 생각했고. 두 사람이 그렇게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에 어김없이 아침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는 거지. 해운대 콘도 옥상에서 바라보는 부산 앞바다 일출 장면이 펼쳐지는 거야. 기억나지? 우리가 옛날에 같이 봤던 그 장면! 실눈을 뜨고 겨우 쳐다봐야 할 정도로 눈이 부신... 두 사람은 부산역에서 서로의 연락처를 교환하고는 각자의 집으로 가는 케이티엑스에 오르는 장면으로 끝이 나."

"다행이다. 주인공이 죽지 않아서."

"응. 그리고 너 해피엔딩 좋아하잖아."

"고마워, 오빠."

"내가 고맙지. 그동안 잊고 있었던 걸 네가 기억나게 해 줬잖아. 네가 아니었으면 아마 난 평생 소설 따위 쳐다보지도 않았을 텐데."




한 해가 마무리되었다. 비상계엄을 외치던 대통령은 탄핵되어 구속수감 되었고,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어수선했던 세상은 제자리를 되찾았고, 그의 일상도 예전처럼 평범해져 갈 즈음, 신문에 신춘문예 결과가 발표되었다. 조마조마하며 결과를 확인해 봤는데... 그의 단편소설이 당선되었다. 상금이 무려 700만 원이다. 그는 그 순간 그녀를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 밤 11시 30분에서 12시 사이에 전화가 오면 해운대 콘도에서 만나자고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눈물이 찔끔 났다. 그는 올해로 만 52세가 되었고, 퇴직이 1년 남았다. 그리고 그가 쓴 소설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그는 퇴직 후에 죽을 때까지 남은 일생을 바칠만한 일을 드디어 찾았고, 주말마다 뭘 해야 할지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 모든 결과가 모두 그녀 덕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소설을 다시 쓸 수 있도록 격려해 주고, 소설의 내용도 어느 정도 제공해 준 셈이니까. 그리고 밤 11시 30분이 되었다.


'오늘은 전화가 늦네.'


평소 같으면 밤 12시가 넘기 전에 전화벨이 울렸는데, 오늘은 자정이 넘어서도 울리지 않았다.


'기회가 있을 때 전화번호를 물어볼걸!'


아쉬움이 남았지만, 내일은 전화가 꼭 올 거라 믿고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몇 시간을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든 것 같았는데, 꿈인지 생시인지, 침대 머리맡에 누군가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검은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 새벽에 잠에서 자주 깨는 갱년기 증상이 있은 뒤로 창문에 암막 커튼을 설치해서 숙소의 침실은 무척이나 어두웠는데도, 그의 눈에는 그 그림자가 그녀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이름을 불러 보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마치 가위에 눌린 듯 가슴이 답답하고 슬픈 영화장면을 보고 있는 것처럼 울컥했다.


'이건 분명 꿈일 거야.'


다음날 밤에도 전화는 오지 않았다. 며칠을 기다려도 전화벨은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발신자 표시제한이 되어 있어서, 전화국에서는 발신자 정보를 확인해 줄 수 없다는 답변밖에 돌아오지 않았다. 유일하게 알고 지내던 세환에게 그녀의 연락처를 물어봤지만, 세환도 그녀와는 예전 그 소동 이후로는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고 했고, 저장되어 있던 전화번호도 너무 오래전이라 이미 사용하지 않는 번호였다.


'이런 제길!'


허탈했다. 몇 달 동안 밤마다 통화하면서 이런 상황이 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 올 것을 미리 대비하지 못한 자신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그녀가 왜 갑자기 연락을 끊어버렸는지, 그는 아무리 생각해 봤지만 그럴만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30년 전 그녀와 헤어질 때도 일방적으로 이별 통보만 받았을 뿐 왜 헤어져야 하는지 한마디도 설명을 듣지 못했다. 아르바이트하면서 우연히 만났던 그 남자의 어디가 그렇게 좋았었는지. 나와 헤어져야 할 만큼 그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했었는지.




그가 그녀의 소식을 듣게 된 건 그로부터 몇 달 뒤 대학 동창회 모임에서였다. 신춘문예에 당선이 된 이후 몇몇 매스컴에 그의 소설이 소개되면서, 여러 출판사로부터 새로운 소설에 대한 출간의뢰가 들어와서 직장생활과 병행하기가 조금은 버겁게 느껴지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내년 2월 말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당장이라도 직장을 그만두어도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뭔가를 시작하면 본인의 의지로 중간에 관두는 법이 없었다. 매일매일 버티기로 일관하는 직장생활도 그렇고...


"김 작가님!"

"누구...?"

"나 기억 못 해? 머리가 많이 빠져서 몰라볼 수도 있겠네. 나 시열이야. 도서관에서 항상 네 옆자리에 앉아 공부하던."

"아! 미안. 몰라봐서."

"괜찮아. 그럴 수 있지. 암튼 신춘문예 당선으로 작가가 되었다는 소식 들었어. 늦었지만 축하해!"

"고마워."

"네가 쓴 소설 읽어봤는데 재미있더라. 근데 소설 주인공이 혹시 그 아이를 모델로 한 거 아니야?"

"누구?"

"왜 우리 과, 항상 과방 구석에 앉아있던, 이름이 은주였지? 어쨌든 그 녀석 참 불쌍하게 죽었지."

"죽다니? 언제?"

"넌 몰랐구나. 나도 전해 들은 얘긴데, 우리 졸업하고 몇 년 뒤에 해운대 콘도에서 뛰어내렸다고 들었어. 한 5년 뒤였었나? 소문으로는 계부(繼父)한테 상습적으로 성폭행을 당했나 봐. 근데 신고도 못 하고 계속 혼자 끙끙 앓고 있다가 결국엔 자살을 선택한 거래. 뱃속엔 그 남자의 아이까지 임신하고 있었다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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