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네 살 쌈닭아줌마.

조금씩 철드는 딸.

by 발돋움

한순간. 그냥 훅... 하고 꼭지가 돈다.

그럼, 그때부턴 뇌에 자리하던 이성은 서둘러 퇴장을 하고, 감성들 중 분노, 짜증에 버물어진 독설이 입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너네 해도 해도 너무하다. 엄마가 늘 얘기하지. 의무를 다하고 권리를 찾으라고! 너네 방학 때 엄마가 사준 학습지 하나라도 풀어본 사람 있어? 읽기로 한 책은 읽었어? 운동은 숨쉬기 말고 꾸준하게 한 게 있긴 해? 그러면서 게임은 주구장~창! 휴대폰은 허구한~날! 엄마는 더 이상은 안될 것 같아. 너네 이렇게 가만 두는 건 아동학대에 방치야. 확 그냥 휴대폰이랑 컴퓨터를 부숴 버릴까 보다! "


밥 먹던 중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린 독설은 머릿속에 준비해 둔 양만큼 모두 쏟아져 나오고 나서야 꼭지가 스르르 잠겼다.

묵묵히 밥을 먹던 2호는 먹은 욕이 많아 더 이상 밥이 들어갈 곳이 없는지 숟가락을 놓고 조용히 자리를 떴고, 1호는 머리를 파묻고, 뭘 먹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뭔가를 씹고 있었다.


또... 선을 넘어버렸다.

찌르르. 위에서 신호가 왔다. 나는 늘 다 쏟아내고 나면, 위에서 파업을 선언한다. 마치 머릿속에 든 생각들이 위를 움직이게 하는 연료인 것처럼 다 쏟아내고 나면 오히려 무언가를 먹을 수가 없다.


나는 내가 '분노조절장애'가 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의 기분을 관장하는 것도 뇌가 시키는 일이란 걸 알고나서부턴 더 이해가 됐다. 나의 아버지도 '분노조절장애'가 있으니, 어떤 복잡한 뇌의 회로에서 기분을 조절하는 영역을 내가 닮은 듯하다.


세상사 내가 이해되는 일이 얼마나 될까? 그런데, 나는 전쟁에 참여하는 여전사처럼 내 기준에 부합되지 않은 모든 상황들과 열심히도 싸워댔다.

초등학교땐, 동생을 때린 나보다 큰 동급생 남자아이와 맞짱을 떴고, 중고등학교땐 나를 왕따 시킨 아이들 앞에서 보란 듯 만족스런 학교생활을 하는 척 온몸으로 싸웠고, 병원 다닐 땐 '인사 좀 하고 삽시다!'란 방사선사에게 '인사받고 싶으면 먼저 인사하는 게 기본인 거 몰라요?'라며 날을 세웠다. 그리고 지금 다니는 이 회사에선 '견학하면 정규직 될지 알아?'라는 공장장에게 8개월 동안 견학을 하고도 바뀐 게 뭐가 있냐며 회사 로비에서 공장장에게 언성을 높였다. (지금 생각하면 안 잘린 게 다행이다 싶다.)


늦은 저녁 깜깜한 거실소파에 혼자 우두커니 앉았다.

온 집안이 고요하다 가끔, 결혼기념일과 같은 나이의 냉장고만 한 번씩 '윙'하고 돈다.

아이들은 벌써 곯아떨어진 지 오래다.

역시 때린 놈은 못 자도, 맞은놈들은 잘도 잔다.

눈을 감고 앉아 엄지와 검지 사이를 쉼 없이 눌러댄다. 이번엔 위의 파업이 길어질 모양인지 지압통증이 쉽사리 사그라들지가 않는다.

"많이 힘들어? 내가 손좀 만져 줄까?"

그래도 신랑 밖에 없는지, 소파에 기대 있는 내게 그가 어둠 속에서 성큼성큼 다가와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나 분노조절장애 있는 것 같아. 자기가 봤을 때 좀 심하다 싶음 얘기해 줘. 상담하고 약 먹게."

"무슨 분노조절장애냐?. 나도 애들 하는 짓 보면 속에서 천불이 나는데. 괜찮아."


어둠 속에서 신랑은 내손을 가져가 한번에 용케도 합곡혈을 찾아 꾹 꾹 지압을 시작했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드는 걸까...

이 상황에서 아버지 생각이 왜 그리 나는지...

싫다 싫다며 그렇게 진절머리 났던 아버지가 요즘따라 측은하기만 하다.

좀 빨리 병원에 모시고 가 볼 걸... 딸이 간호산데...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외롭게 혼자 견뎌 냈을 것이다.

그리고, 분노가 쓸고 간 후에 몰려오는 죄책감을 그는 술과 함께 집어삼켰겠지.


다음날, 나는 아이들 빵 사러 베이커리에 들른 김에 찹쌀도넛과 꽈배기도 넉넉하게 사들고 친정으로 향했다.

우울증 약을 복용하시며, 금주상태인 아버지는 입맛이 도통 없으신지 점심을 거르셨다고 했다.

"아빠, 이거 하나 먹어바. 찹쌀도넛이야. 아빠 이거 좋아하잖아."

도넛을 한입 베어문 아버지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도넛이 맛이 있어서인지, 오랜만에 들른 막내딸의 따뜻한 시선이 좋아서인지

아버지는 오랜만에 기분이 찹쌀 도넛처럼 쫀득해진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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