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엉거주춤 식탁에 앉아 숟가락으로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다 이네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호영아 이 닦고 옷 갈아입어야지. 비 온다.”
엄마의 목소에 힘이 실리면서 고음에서 저음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으유~ 만날 잔소리 잔소리. 학교 가기 정말 싫다!”
오만상을 찌푸리고 구시렁거리며 욕실로 들어서서는 칫솔에 치약을 묻히고 질겅질겅~ 물로 우물우물~ 퇴~ 양치질 시늉을 끝내고 나서 가방을 대충 챙겨 등굣길을 나선다.
‘투둑 투두둑’
빗줄기가 제법 굵어 우산 너머 전해지는 소리와 바닥에 튀는 오르는 물줄기가 마치 어제저녁 게임 속 미사일 공격 같다.
‘내 손에 우산 말고 M16이 있으면 지구를 구할 텐데!’ 손으로 총 쏘는 시늉을 하다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나는 학교를 향해 걷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날쌔게 자동차 한 대가 스쳐 지나가더니 물웅덩이에 고인 흙탕물을 고스란히 내 몸으로 던져 놓고 총알처럼 달아나 버렸다. 한 순간에 흙탕물 투성이가 된 나는 놀라 뒷걸음질 치다 중심을 잃고 넘어져 엉덩방아까지 바닥에‘쿵’ 찧어버렸다.
“아이 뭐야~!”
있는 대로 짜증이 오른 나는 우산을 주섬주섬 챙기며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려는데 뭔가 꾸물거리는 느낌이 나는 게 아닌가!
손을 뻗어 엉덩이에 붙은 무언가를 집어 들었더니 거기에 엉덩이에 짓이겨진 흐물거리는 지렁이가 사력을 다해 꿈틀거리고 있었다.
“으이~ 안 그래도 짜증 나는데 징그러운 지렁이까지 오늘 정말 재수가 없네! 아무 필요도 없는 너는 대체 왜 지구에 있는 거냐! 으~ 지렁이 정말 싫어~!”
하고는 흐물거리는 지렁이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말았다.
그날 밤.
엄마는 컴퓨터 게임에 빠져 있는 나를 확인하시고는 방에 들어오셔서 열린 창문으로 튀어 들어오는 빗방울을 보고 창문을 닫으셨다.
“오늘 하루 종일 비가 오네. 비가 오면 창문을 좀 닫아야지~. 이제 게임 그만하고 자자”
'싫어 한판만~더~' 하려다 엄마의 매서운 눈초리에 못 이긴 듯 대답했다.
“네~”
컴퓨터 전원을 끄고, 이불속으로 들어가는 나를 확인하시고 나서야 엄마는 불을 끄고 조용히 방문을 닫으셨다. 하루 종일 젖은 몸으로 학교에 있었던 터라 으슬으슬한 게 감기 기운도 돌았는데 이불속은 늘 그렇듯 포근하다.
“이불 밖은 위험해~”
아침부터 내렸던 비는 좀처럼 빗줄기가 가늘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거기다 이제는 천둥번개까지 보태졌다.
‘우르르 쾅쾅~’
깜깜한 방에 이따금씩 번개가 번쩍이면 무시무시한 그림자들이 등장했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반갑지 않은 그림자놀이를 이어갔다.
“좀 으스스하네. 얼른 자야겠다.”
몇 분쯤 지났을까?
포근한 이불속 침대 언저리부터 차가운 기운이 서서히 밀려들기 시작했다.
처음 느껴 보는 유쾌하지 않은 느낌에 나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주위는 온통 까맣기만 하다. 조금 전까지 번개에 일렁였던 그림자와 빗소리도 자취를 감추었다.
“이상하다 왜 이렇게 깜깜하지? 비도 그쳤나? 번개도 안 치구? 엄마~ 엄마~”
잠꼬대로 엄마~하는 소리에도 부리나케 달려와 주시는 엄마인데 이번엔 어찌 된 일인지 아무리 불러도 엄마는 대답이 없으시다.
덜컥 무서운 마음에 몸을 일으켜 세우려는데 이제는 팔과 다리도 말을 듣지 않는다. 몸에 딱 붙어버린 팔다리는 떨어지지 않고, 일으켜 세워 앉으려는 데도 자꾸만 앞으로 기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몸이 왜 이러는 거야? 엄마! 엄마!”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쓸 때마다 내 몸이 꾸물꾸물 온몸에 흙을 묻히며 앞으로 기어나가고 있었다. 길쭉하고, 축축하고, 움직일 때마다 뒤에서 앞으로 물결치듯 꿈틀거리고 있는 나는. 그렇다. 지렁이가 되어 있었다!
“이건 꿈일 거야~! 꿈 중에서도 최고의 악몽이야! 꿈 좀 빨리 깨게 해 주세요! 부처님, 하느님, 알라신, 제우스 또 누가 있었더라!”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신들의 이름을 부르며 꿈에서 깨어나게 해 달라 주문을 외워도 축축한 피부와 길쭉한 내 몸은 도무지 변화가 없다.
“왜 나야! 그것도 하필 징그럽고, 아무 필요도 없는 지렁이가 된 거냐고! 으~앙~”
눈물이 막 쏟아지려고 하는 찰나 어디선가. 작은 속삭임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음~ 신선한 나뭇잎이네~ 조금 있다 먹게 점액 좀 발라볼까~”
저 멀리서 들려오는 자그마한 속삭임에 나도 모르게 귀가 쫑긋해서 터져 나오려던 울음이 쏙 들어갔다.
‘어쩌면 나를 구해 줄 은인일지도 몰라!’하는 생각에 ‘나 좀 구해줘~!’하고 소리를 치려다 ‘아니야~!’하는 생각에 다시 입을 막았다. 나는 지금 지렁이의 모습을 하고 있잖아! 지렁이를 누가 잘 먹더라? 새가 먹고, 물고기도 먹고, 또 지렁이보다 큰 곤충이 먹겠지? 순간 지렁이를 날카로운 부리로 사정없이 쪼아 삼키는 새가 문뜩 떠올랐다.
(안돼~~~!! 혹시 나를 잡아먹는 나쁜 벌레일지도 몰라! 도움을 요청했다가 바로 잡아먹힌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그래도 지금 내 주위에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에 한편으로는 도움을 요청해 볼까? 하는 생각도 간절했다. 마음속 말을 할까? 말까? 가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는 사이 조그만 속상임 소리는 자꾸만 가까워져 왔다.
“이곳에도 먹을거리가 많이 있네~ 진작에 와 볼걸 그랬어. 근데 근처에 친구가 있는 것 같네 처음 맡아보는 지렁이 냄새인데? 이 동네 놀러 온 아이인가? 거기 누구 없어?”
갈팡질팡 고민하며 흙더미에 머리를 문지르고 있던 중 먼저 아는 척을 해주는 상대에게‘애라~모르겠다’며 대답을 해버렸다.
“어~. 어~ 안녕?”
흙더미가 조금씩 움직이더니 지렁이 머리 하나가 서서히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다. 다가온 축축한 머리는 나를 머리부터 몸통까지 ‘툭툭 ’ 건드리다 다시 내 머리로 돌아와 한참을 빤히 쳐다보았다. 혹시나 천적일까 한참 고민했는데 같은 지렁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렁이 생애 처음 만난 동족? 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한껏 미소를 지으며 상대방의 행동을 놓칠세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시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생긴 애네”
(뭐? 이상하다고)“어, 어 내가 좀 다르게 생겼지? 우리 동네에선 이런 얼굴이 좀 잘생긴 얼굴로 통하거든”
내가 보기엔 제일 이상하게 생긴 녀석이 나를 보고 오히려 이상하게 생겼다고 하니 기분이 갑자기 확 상해 버렸다. 하지만, 나는 지금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니까 이번 한 번만 참는다.
“아니, 다른 게 아니라 많이 이상하다고”
(많이 이상할 것까지는 없잖아! 확 성질대로 화를 내봐!)
붉으락푸르락 해진 내 얼굴이 깜깜해서 보이지 않는 건지 아니면 눈치가 없어서 모르는 건지 연신 얼굴 보고 이상하다는 이 녀석을 이제는 가만히 둘 수가 없어 한 마디 하려는데 대뜸 그 녀석이 먼저 말을 꺼냈다.
“너 호영이지? 못된 애들은 얼굴도 이상한 게 맞는 것 같아”
(어? 나를 아는 거야? 어떻게 알지? 이렇게 지렁이로 변해버린 나를 알아보는 게 더 무서운 일 아닌가? 제 혹시 지렁이 귀신인가? 으~어떻게~ 나를 잡아먹을 건가? 어떻게 해야 되지?)
나를 도와줄 존재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변해버린 내 모습에 내 이름까지 알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 보통 녀석이 아닌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슬금슬금 뒷걸음질이 쳐졌다. 그런데 처음 가져보는 이 몸이 뒷걸음질을 치면 칠수록 자꾸 앞으로 슬금슬금 다가가서 무서운 그 친구 코앞까지 와버렸다.
“너, 내가 널 알고 있어서 놀랬지?”
지렁이의 말과 동시에 나는 얼음이 되었다.
“아... 니?”
내가 놀랜 걸 눈치챘는지 지렁이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내가 널 어떻게 아냐고? 너 오늘 내 친구 토민이를 너의 그 큰 엉덩이로 깔아뭉갠 것도 모자라 내동댕이쳤다며?”
지렁이 세계는 인간세상보다 네트워크가 더 발달되어 있는 게 분명하다.
아무튼, 나는 이제 죽었다! 친구를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죽였는데 이 녀석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잖아?
이렇게 지렁이로 다시 태어날 줄 알았으면 지렁이를 좀 잘해주는 건데 비만 오면 징그럽다고 일부러 가서 밟아버리고, 아빠랑 낚시하러 가서도 물고기 미끼로 사용하려고 무자비하게 잘라댔던 내 모든 과거가 후회스러웠다.
“미안해, 나는 진짜 지렁이가 징그럽고, 필요도 없는 것 같아서...”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하는 거야! 정말 지렁이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모르는 거야?”
마치 팔짱을 끼고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을 것 같은 지렁이 앞에서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지렁이가 조금은?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도무지 왜 중요한지를 알 수가 없어 나는 답답하기만 했다.
“솔직히 정말 모르겠어. 징그럽기만 한 것 같고...”
“너는 지금 지렁이를 너무 미워하고 괴롭힌 벌로 지렁이로 살아가도록 다시 태어난 거야. 우리가 땅속에 있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지만 땅 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거의 대부분 알거든. 특히 비올 때 땅으로 순찰 나간 아이들이 소식을 전해주지. 물론 순찰 나갔다가 너 같은 애한테 죽음을 당하거나 바깥세상이 너무 신기한 나머지 돌아오는 시간이 늦어져 피부가 말라죽어버리는 일이 일어나긴 하지만”
나는 나를 매섭게 째려보는 지렁이의 눈빛을 애써 외면하느라 고개를 연신 두리번거렸다.
“나는 솔직히 지렁이로 살아가게 하는 게 왜 벌였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넌 진심으로 지렁이의 고마움을 느끼게 되면 다시 돌아갈 수도 있고, 뭐 때에 따라 못 돌아갈 수도 있고”
성의 없는 말투에 나는 조바심이 났다.
“돌아갈 수도 있고, 못 돌아갈 수도 있고 가 뭐냐? 진짜 돌아갈 수 있긴 한 거야?”
“그건 너 하기 나름이겠지. 저기 저 하늘에 계신 분이 결정하시는 거니깐.”
손이 없어서 인지 머리로 퉁퉁 하늘을 가리킨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할 일이 많아서 말이야.”
“저기, 야~ 나만 두고 가면 어떻게! 나도 같이 가면 안 될까?”
“그럼 그러던지.”
귀찮다는 듯이 대꾸하며 나를 가로질러 앞으로 꾸물거리며 지렁이 친구는 기어갔다. 나도 놓칠세라 뒤따라가며 말을 건넸다.
“저기, 너 이름은 뭐야? 내 이름은 알고 있으니까 나도 네 이름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토룡이.”
‘아... 토룡이...’
토룡이란 이 녀석은 자신이 지렁이인 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것 같아 벌써 지렁이를 하찮게 생각한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한편으로는 정말 지렁이가 어떤 이로운 일을 하는지 알고 싶다는 생각도 샘솟았다.
한참을 그렇게 토룡이는 꾸물꾸물 기어만 다녔다.
“토룡아 너 어디 가는 거야?”
“어딜 가긴 지금 일하고 있잖아.”
“지금 일하고 있다고? 그냥 계속 기어 다니기 만하잖아.”
“바보야, 이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기어 다니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니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의아해하는 나를 이해한다는 듯 천천히 토룡이는 말을 이어갔다.
“너 지렁이가 왜 지렁이인지 아냐?”
“그거야 징그러우니까 지렁이 아냐?”
“아니거든! 네가 그러니까 벌을 받는 거야. 잘 들어봐. 우리 지렁이들은 '토양의 신'이야.”
“풉! 징그럽게 생긴 게 신은 무슨.”
자부심이 대단한 건 알았지만, 토양의 신은 좀 과 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삐져나왔다.
“너는 한~참 멀었다. 아무래도 너는 평생 지렁이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할 것 같구나. 그냥 나랑 이 흙에서 뼈를 묻자.”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웃음에 토룡이는 적잖게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그래도 뼈도 없으면서 뼈를 묻으라는 건 좀 과하지 않나?라고 빈정거리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사실 엄마 아빠도 없이 이런 곳에서 지렁이로 살아가다가 죽는 건 정말이지 생각조차 하기 싫으니 말이다.
“미안, 다신 그런 얘기 안 할게.”
“좋아, 그럼 한 번만 봐준다. 잘 들어라. 우리 지렁이들은 징그러워서 지렁이가 된 게 아니야. 예부터 ‘지룡’ 즉, ‘땅 속에 사는 용’이라고 해서 ‘지룡’이었다가 서서히 지렁이로 바뀌었어. 지렁이가 사는 땅은 어떤 농사를 지어도 모두 풍성한 열매를 맺는 땅이야 즉, 비옥한 땅으로 인정받은 땅이나 마찬가지란 거지. 우리 지렁이들은 매일 땅 속을 기어 다니며 식물들이 자라는데 필요한 산소와 수분을 공급하기 위한 땅 속 길을 만들어 주고, 우리가 떨어진 나뭇잎에 점액을 발라 놓으면 그 잎은 쉽게 분해가 돼서 땅의 영양분을 높여 주게 돼. 그러니 토양의 신이란 게 허투루 나온 말이 아니란 게 맞지?”
토룡이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지난번 시골 할머니 집에 갔을 때 있었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할머니 밭에서 무를 뽑다 튀어나온 지렁이에 놀란 나를 보며 할머니께서
“놀라지 말아~ 지룡님이 나오셨네.”하며 웃으셨었다.
“아. 할머니가 그래서 지룡님이라고 말씀하셨구나......”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는 나를 보며 토룡이가 말했다.
“뭐라고 중얼거리냐? 형아가 지금 열심히 설명을 해 주고 있는데 딴생각이나 하고, 너 학교에서도 선생님 말씀하시는데 딴짓하고 놀지?”
“아닌데...”
'아니 거든!'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매일 수업시간에 떠들고 놀았던 기억밖에 없어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그런데 요즘 우리도 땅을 지키기가 굉장히 힘들어.”
방금까지 자신 있게 호통 치던 녀석이 갑자기 목소리에 힘을 잃었다.
“왜?”
“열심히 일을 해도 쓰레기가 가득한 땅은 당해 낼 수가 없거든. 너 플라스틱이 썩는데 몇 년이 걸리는 줄 알고 있니?”
“글쎄, 한 1년?”
“아니야 50년에서 100년 정도 걸리고, 특히 스티로폼은 500년, 낚싯줄은 600년까지도 걸린데.”
“정말!”
이제까지 음료수 병이며, 과자봉지도 아무 생각 없이 마구 버리고, 양치도 제대로 하지 않고 질겅질겅 씹어 일주일에 한 번은 버렸던 칫솔도 생각해 보니 플라스틱이었다. 아빠와 낚시 갔다가 끊어진 낚시 줄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대체 내가 사는 동안 버린 플라스틱과 쓰레기는 얼마나 될까? 그것들이 내가 지구에서 사라지고 나서도 계속 썩지 않고 남아 다른 동물들이며 생태계를 위협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순간 아찔해졌다.
“응, 버려진 봉지며 플라스틱 사이에 끼어서 죽어간 친구가 한 둘이 아니야. 더 이상 그곳에선 살 수가 없는 거지. 그렇게 되면 우리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살아갈 수 없는 땅이 되어버리게 되는 거야.”
‘퍽’‘스르르’‘퍽’‘스르르’
토룡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 갑자기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땅과 하늘이 울리더니 거대한 포클레인 같은 물체에 실려 흙더미와 함께 토룡이와 내가 하늘로 솟구쳤다 땅으로 다시 곤두박질쳤다.
“엄마야~~~~”
깜깜한 땅속 세상에 있다 갑자기 밝은 세상 밖으로 나가니 눈이 부셔 뜰 수도 없고, 숨도 막혀오기 시작했다.
“토룡아~흑. 숨이 막혀~.”
숨이 막혀 오는 고통과 밝은데 보이지 않는 이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바깥세상에서 온 힘을 다해 허우적거리고 있는 내 모습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니 이내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이런 지룡님이 행차하셨네. 미안합니다~ 갑작스러운 외출에 놀라셨겠어요~ 어서 다시 땅속으로 들어갑시다~”
‘어~! 이 목소리는 우리 할머니! 할머니 저예요! 호영이~ 호영이라고요~!’
할머니는 내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으신지 나를 흙 속에 놓고 다시 흙으로 덮어 주시며 말씀을 이어가셨다.
“이번 주말에 우리 호영이가 오면, 호영이가 좋아하는 고구마를 좀 삶아 주려고 캤더니 지룡님이 올라오셨네. 다시 들어가셔서 우리 밭 좀 잘 가꿔주시고 열매도 주렁주렁 맺히게 해 주세요~ 우리 손자가 고구마를 참 좋아한답니다~”
할머니에게 호영이가 여기 있다고 애타게 불러도 할머니는 들리지 않으신지 자꾸 우리 손자 호영이가 좋아하는 고구마 말씀만 하신다.
할머니가 옆에 계신데 보지도 못하고, 할머니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 상황이 갑자기 너무 서럽고 무서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으~~~ 앙~~”
내 울음소리를 듣고 저 멀리서 토룡이가 꿈틀꿈틀 다가왔다.
“너는 수업시간에 공부도 안 하고, 지렁이도 막 죽이고, 거기다 완전 울보이기까지 하구나. 참 대~단하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친구라도 명색이 처음 만난 지렁이 친군데 이 녀석은 나 놀리는 재미로 사는 지렁이인 것 같다. 더 놀림받기 싫어 훌쩍거리며 울고 싶은걸 꾹 참아본다.
“그래, 울지 마. 근데 저 할머니가 네 할머니야?”
“응 우리 할머니”
“넌 진짜 훌륭한 할머니가 있어서 좋겠다. 늘 유기농으로 농약 한번 치지 않으시고 농사짓는 분으로 유명하신 분인데 마음씨까지 고우셔서 우리도 도움을 더 드리려고 노력하고 있지.”
어렸을 때부터 먹었던 삐뚤빼뚤 모양은 얄궂지만 꿀맛이었던 고구마, 토마토, 당근이 다 이 비옥한 땅에서 만들어졌고, 또 그 비옥한 땅을 만든 장본인이 지렁이 라니...
이제야 정말 지렁이가 중요한 존재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렁이는 정말 중요한 일을 하고 있었구나...”
“이제야 알았냐? 그래도 빨리 깨달았네. 영영 나랑 같이 여기 있을 줄 알았더니. 이제 갈 때가 된 것 같네. 다음부턴 지렁이 밟지 말고! 그럼 잘 가라.”
“뭐? 어딜 잘 가?”
토룡이에게 질문을 하는 동시에 내 주위를 감싸고 있던 차가운 기운이 서서히 따뜻해지더니 몸에 붙어 있던 팔과 다리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 토룡아 이제 팔다리가 움직여!”
토룡이를 부르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방금까지 이야기를 나누던 토룡이는 온데간데없고 깜깜한 어둠 저 끝에서부터 밝은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하더니 이네 빛 속으로 몸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으~~~~~아~~~~~~~~!”
“호영아, 왜 그래? 오늘 할머니 집에 가기로 했잖아. 얼른 일어나자. 꿈꿨어?”
엄마는 내가 지르는 소리를 듣고, 내방으로 얼른 달려와 나를 흔들어 깨우셨다.
“어? 우와! 돌아왔다!”
나는 눈을 비비며 주위를 둘러본다. 내 방, 내 침대, 돌아왔다고 외치는 내 눈앞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우리 엄마까지 다시 다 돌아왔다!
“엄마 사랑해요~ 다음부턴 엄마 말 진짜 말 잘 들을게요~.”
다시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나는 엄마를 와락 끌어안았다.
한 번도 안 하던 짓을 하는 내가 엄마는 의아하신지,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등을 톡톡 두드려 주신다.
“얘가 꿈을 너무 심하게 꿨나? 엄마도 사랑해요. 얼른 준비하자~.”
“네~~~!”
오랜만에 들어보는 명쾌한 대답과 함께 튕기듯 침대에서 일어나는 나를 보며 엄마도 연신 고개를 갸우뚱하셨다.
소똥 냄새만 가득한 시골길이라며 짜증을 냈던 할머니 집으로 가는 길이 오늘따라 모두 아름답고 고맙기까지 하다.
“여보, 제 어젯밤에 꿈을 심하게 꾸더니 좀 이상해 진 것 같아요. 어떻게 저렇게 하루아침에 행동이 바뀌죠?”
“그러게, 그렇게 말도 안 듣고, 청개구리 짓만 골라하더니 철이 갑자기 들었네. 허허.”
손주가 보고픈 할머니는 도착하기 벌써부터 동구 밖으로 호영이를 보러 나와 계시다 우리 가족 차를 확인하시고는 반갑게 손을 흔드셨다. 자동차가 정차하자마자 나는 할머니에게로 달려가 폭~ 안겼다.
“할머니, 진~짜 보고 싶었어요~”
“어이구 이 녀석 이 할미가 보고 싶었어요? 할미도 우리 호영이가 온다고 해서 호영이가 좋아하는 고구마 많이 캐놨어요~”
“어? 할머니 진짜 고구마 캐러 갔었어요?”
“그럼, 호영이가 온다는데 할미가 고구마를 빼먹겠냐?”
“할머니 그럼 고구마 캐면서 지렁이 본 적 있어요?”
“그럼~ 할미는 농약 같은 거 하나도 없이 농사지으니까 온 밭에 지렁이가 천 지지. 지렁이가 많이 있는 땅이 정말 농사짓기 좋은 땅이거든. 그런데 왜 갑자기 지렁이한테 관심이 생겼어? 보기만 해도 징그럽다고 싫어하더니?”
“히히, 지렁이가 얼마나 중요한데요, 할머니 나 이제 지렁이 엄~청 좋아요! 지렁이 이뻐해 줄 거야~ 할머니 우리 밭에 놀러 갈까요?”
“그래, 그러자”
푸른 나무와 비옥한 땅. 건강한 흙 위에서 자라는 싱싱한 채소들이 있기까지.
밭고랑 사이사이 여유롭게 누비는 청개구리와 토마토 잎과 고구마 줄기 사이를 멀리 뛰기 경주하는 메뚜기, 그리고 눈에 보이진 않지만 땅 속에서 묵묵히 지구 토양의 건강을 책임지고 일하고 있는 지렁이 친구까지. 모두가 각자의 역할에 최선을 다 할 때 비로소 다양한 악기가 만나 아름다운 선율의 교향곡이 완성돼 듯 풍요롭고 조화로운 자연의 결실을 맺는다는 것을 예전엔 미처 알지 못했다. 그럼 지구 건강을 지키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 있을까? 일회용품 안 쓰고, 가까운 거리는 걸어 다니고, 플라스틱 사용도 줄이고, 재활용품 분리수거도 잘하고 또...... 갑자기 해야 할 일이 너무너무 많아졌다.
이제야 나도 지구 건강 지킴이가 된 것 같아 어깨가 쭉 펴진다.
할머니와 다시 찾은 고구마 밭고랑 사이 지렁이 한 마리가 얼굴을 삐죽 내밀고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나는 지렁이에게 가만히 다가가 조용히 말을 걸어본다.
“너 토룡이지? 인사도 못하고 와서 미안해~ 앞으로 우리 함께 열심히 지구 건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 보자.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