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를 검색해 가며 문서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던 오후시간. 책상 오른쪽에 마련해 둔 거치형 충전기에서 충전 중이던 휴대전화가 울렸다.
-엄마-
일주일이나 이주일에 한번. 엄마는 대수롭지 않은 일로, 혹은 간단한 부탁을 하러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아빠가 밥을 잘 못 먹으니 링거를 좀 놔야겠다. 텃밭에 너 좋아하는 로메인 상추가 많으니 퇴근할 때 뜯어가라. 아빠가 잘 먹는 우유나 엄마가 좋아하는 사탕을 인터넷으로 좀 사달라. 등등.
오늘도 휴대전화 화면에 뜬 -엄마-를 확인하고 그런 이야기들 중 하나이겠거니 하며 시선은 모니터로 고정한 체 무심히 통화버튼을 긁었다.
[어. 엄마]
[출근했나?]
[응.]
[육종이 암이냐?]
뜬금포 질문도 엄마 특징이긴 했다. 통화를 길게 이어가는 사람이 아니니, 대화내용의 처음은 질문으로 시작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오늘은 질환과 관련된 질문이니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얼른 휴대전화를 왼쪽 어깨와 귀사이에 끼우고 포털 사이트를 켜 검색을 시작했다. 이것은 내가 간호사가 된 이후로 시작된 습관이다.
나에게 의학적 질문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내가 간호사라는 이유로 의학과 관련된 모든 지식을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듯했다. 증상에 따른 병명, 수술명, 치료방법, 질환별 유명한 병원... 나는 그런 질문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내가 알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할 수만은 없었다. 나는 회사에서, 시댁과 친정 집안에서, 동네에서, 간호과 친구들을 제외한 친구들 중 유일한 의료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답답한 마음으로 나에게 질문을 하는 그들에게 나는 내가 가진 지식을 모두 활용해야 했고, 그 정보는 최대한 정확해야 했다.
[육종? 누가 육종인데?]
질문을 듣고 다시 엄마에게 질문을 던지며 포털 검색화면을 마우스로 빠르게 스크롤하며 눈으로 내용을 캐치하는 동안 나는 잠시 마음에 동요가 일었다. 혹시나 가족 중 누군가의 진단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족은 아니었다. 엄마와 오랫동안 같은 직장을 다녔던 사이가 좋지 않았던 동료였다. 직장을 그만둔 후 간간이 소식을 전해 듣고 있었는데 최근에 육종에 걸렸다는 소식을 접한 모양이었다.
[사람을 그렇게 못 할 일을 시키더니. 거봐라. 사람들한테 못된 짓 한 사람들은 다 그래 벌을 받는다.]
못된 짓의 기준이 내가 다른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준 것도 포함이 될까? 엄마가 못된 짓을 한 다른 이를 향해 쏟아내는 비난을 들으며 나는 그 비난의 방향이 엄마에게로 슬그머니 향하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면, 내가 엄마에게 받았던 스트레스는 나중에 엄마에게 어떤 식의 벌로 발현이 될까?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순간 떠오른 생각에 나는 고개를 흔들어 그 생각을 애써 흐트러트렸다. 엄마가 지목한 그 사람처럼 몸 어딘가 암덩어리가 솟아나 괴로워하다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엄마에게 대입하고 싶지는 않았다. 엄마가 나에게 준 스트레스는 그 정도로 벌을 받을 만한 일은 아니라고, 그 정도는 아니라고, 스스로 정의 내리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내가 생각하고 정의 내린 대로 모든 일이 일어나기라도 하는 듯.
[그러게, 사람들에게 못할 짓 하면 안 되지...]
나는 대충 엄마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며 전화를 끊었다.
사람들은 언젠가 다 죽는다. 이 불변의 현상을 불가능하게 하는 일은 상상과 소설 속에서나 가능하다.
그런 당연한 상황을 두고 사람들은 자기식대로의 해석을 덧붙여 그 속에서 위안을 얻는다.
죄를 많이 짓고, 사람들을 힘들게 한 사람들은 큰 병에 걸리고, 무참히 살해되며, 고통 속에서 비명횡사한다고.
누가 봐도 선하게 법 없이도 잘 살 것 같은 사람도 그들과 다르지 않게 세상을 떠난다. 그렇다면 그들의 죽음은 무엇으로 정의될까?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나쁜 짓이라도 저질렀다고 해야 설명이 되나?
나는 오늘 지극히 개인적이고,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다른 이의 죽음과 고통, 질병조차도 나와 연관 지어 기어이 위로를 얻어내고야 마는 잔혹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