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시기 입사 동기는 승승장구 승진 가도를 달리고 있는 와중 끝없는 기간제, 기약 없는 특수업무직의 순환고리에 갇혀 절망속을 헤매고 있었던 그때, 나는 이 회사보다 더 좋은 곳으로 반드시 취업하고 만다며 머리띠를 졸라매고 눈에 불을 키고 공부했다. (한 10년 전인 듯) 그 시절, 임용고시를 준비하며 인터넷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자격증취득이나, 공무원 시험 준비를 도와주는 강의사이트는 처음이라 긴가민가 했지만 국어, 역사를 강의하는 교수님들의 강의 실력만큼은 실로 뛰어났다. 중요한 포인트를 잘 짚어 주는 것은 물론이고 지루해할 학생들을 위해 수업 중 막간의 농담이나 살아가면서 도움이 될만한 경험담을 이야기해 주신 부분은 아직도 가슴 깊이 남아 있다.
그중 국어 교수님이 실제로 겪었던 이야기를 써보려 한다.
지루하고 답답한 고등학교 3년을 보낸 학생들에게 대학은 자유와 여유의 상징이었다. 물론 지금은 1학년부터 자격증이나, 스펙 쌓기, 등록금 마련으로 고3보다 더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 오늘날 청년들의 현실이지만. 암튼, 그 무렵 교수님은 친구 A와 처음 겪는 대학생활을 맘껏 즐기기 위해 학점은 잘 나오고, 수업은 막 빼먹어도 별 간섭이 없는 교양수업으로 유명한 [작곡] 수업을 신청했단다.
수업은 신청했으나, 강의는 듣는 둥 마는 둥 했고, 중간고사도 레포트로 대충 치뤘으나, 피할 수 없는 기말고사가 찾아왔다.
한 학기 수업을 날로 먹은 교수님과 친구A는 편곡의 편자도 모르고 기말고사 시험지를 받아 들었다.
시험문제는 표본 가사와 악보를 제시하고 이 곡을 편곡하라였다.
당연한 시험문제였다. 작곡과이니. 작곡과 편곡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시험을 치르고 난 후 교수님과 친구 A는 당연히 이번학점이 F일 것이라 예상했다. 같이 수업을 빼먹고 놀러 다녔으니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성격표를 받아 든 두 사람의 평가는 갈렸다.
교수님은 B+, 친구 A는 F
궁금했다. 분명 같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 예상했는데, 성적이 잘 나온 교수님이나 F를 맞은 친구 A나
그래서, 둘은 지체 없이 작곡 교수님을 찾아갔다. 항의의 목적이 아니라 정말로 궁금해서.
작곡 교수님은 찾아온 제자의 앞에 둘의 시험지를 나란히 펼쳐 보여주셨다. F를 맞은 친구는 입에서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고, 국어교수님도 고개를 끄덕였다.
[작곡과 편곡관련해서 두 학생의 실력은 똑같이 F학점입니다. 그러나 모른다고 아무것도 적지 않고, 백지를 낸 사람과 아무것도 모르지만 열심히 원래 있던 음표를 그대로 옮겨 놓은 사람은 다릅니다. 이 학생에게선 앞으로의 가능성, 문제를 낸 사람에 대한 예의, 시험에 대한 성의가 느껴집니다. 학점아 갈린 이유를 이해하시겠어요?]
성의 있는 행동은 마음을 움직인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면 그것을 지켜보는 이도 그 마음을 느끼게 된다.
실력은 참 중요하다. 그것이 그 사람의 직업선택과, 앞으로 삶의 방향에서 호전적인 영향을 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객관적인 실력보다 주관적인 마음이 먼저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과는 오래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