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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돋움 Oct 23. 2023

최선을 다하지 마세요.

건조기에서 빨래를 꺼낸다.

따뜻하게 건조된 빨래 한 뭉텅이를 바구니에 구겨 담고, 필터 먼지를 솔로 톨톨 털어낸 후 거실 한가운데 빨래를 쏟아붓는다. 흰 빨래만 골라 돌렸던 터라 수건, 속옷, 아이들 흰색 티셔츠가 거실에 소복이 쌓였다.

수건부터 탈탈 털어가며 각을 잡아 접어 놓고, 아이들 흰 티셔츠를 집어든다.


흰 티셔츠가 하얀 자태를 뽐내며 깨끗하게 세탁되었다.

흰 티셔츠가 요렇게 뽀얗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던가? 고르게 자란 푸른 잔디밭을 만들기 위해 시시각각 뿌리를 뻣어가는 잡초와 풀들을 매일 뽑아내고 적절하게 깎아 줘야 하듯이. 단순한 이 흰색티셔츠도 참 많은 노력이 필요로 한다.


우리 집애들이 유달리 조심성이 없는 건지, 다른 집도 다들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세탁하기 전 티셔츠를 확인하면 늘 하루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곤 한다. 

점심 급식을 먹으며 묻은 여기저기 음식물들, 오렌지 주스, 볼펜자국, 물감, 심지어 페인트까지.

한 번도 그냥 세탁기로 직행인 적인 없었던 티셔츠들은 하루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세탁 전 정밀 작업에 들어간다. 음식물은 주방세제, 볼펜자국은 물파스, 페인트 같은 기름진 녀석은 클렌징 오일을 뿌려 두었다가 양손으로 비벼 가며 열심히 문지른다. 그렇게 지우다 지우다 지워지지 않은 끈질긴 녀석들은 결국 락스에게 넘긴다. 락스 앞에선 웬만한 찌든 때 녀석도 결국은 항복하고 만다.


다시 뽀얗게 이뻐진 녀석을 세탁기에 넣고, 건조기를 돌려 내면 기분까지 개운해진다.

[이거 바바. 너 어제 급식 묻혀 온 거 엄마가 열심히 지워서 이렇게 깨끗해졌다~ 고맙지?]

[나는. 안 깨끗해도 되는데. 뭐 하러 열심히 지워?]


뽀송한 티셔츠를 들이대며 아이에게 맞장구 혹은 칭찬 비슷한 것을 원했던 것 같은데 금세 눈만 껌뻑거리며 버퍼링에 걸려 버렸다.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아이말이 맞는 것 같다. 

지금껏 아이는 뭐가 묻었다고 한 번도 티셔츠 얼룩을 지워달란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묻어있는 걸 못 견딘 내가 알아서 지운거지. 그래놓고, 나는 너를 위해 열심히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 노력해 왔다고 그러니 인정해 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자에게 염소가 열심히 염소가 좋아하는 풀을 물어다 준 격이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한 나다. 나를 구할 것은 세상에 나하나 밖에 없다는 절박함으로 살아왔다.

그래서, 주어진 모든 일에 매진했다. 아이 문제도 예외 일수는 없었다. 어려서부터 규칙적인 습관을 길러주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학습지를 풀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이기 위해 이유식부터 영양식까지 모두 아이들을 재워놓고 저녁에 손수 만들어 놓고 나서야 잠을 잤다. 그렇게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그 최선이 누구를 위한 최선인지, 내가 한 최선의 노력으로 아이들이 얼마나 숨이 막혔는지 지금에 와서야 깨닫는다. 


무조건적인 최선은 옳지 않다. 그리고, 때론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이 최선을 다한 것보다 좋은 결과를 내기도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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