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엔 한 달에 세 권까지 책을 정해서 읽은 후 간단한 시험을 보면 되는 독서통신 프로그램이 있다. 재작년부터 1년에 100권 읽기에 열을 올리기 시작하면서 한 달에 책을 세권이나 주는 프로그램은 나에게 안성맞춤이란 생각에 책 신청 첫날 열일 제처 두고 책먼저 골라 담기에 바빴다.
보통 책은 다음 달에 교육할 책을 전달 중순쯤 신청하고 마지막 주쯤에 도착해서 신청달 첫날부터 시험을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 열리곤 한다. 그런데 한정된 책 가짓수에 3년 전부터 한 달에 세 권씩 책을 신청해 댔으니 마음에 드는 소설책이나, 시집, 심리치료 관련 서적들은 거의 다 읽었고, 이젠 자기 계발서나 역사 관련 책들만 남아 이번에도 그럭저럭 괜찮다 싶은 책들을 골라 담았고 그 책이 4월 마지막 주에 도착했다.
두 권은 흥미있는 책이라 신청 후에 헐레벌떡 읽었는데 썩 내키지 않았던 역사책은 영 진도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성질 급한 나는 인터넷을 뒤져가며 테스트가 열리는 첫날 시험을 쳤는데. 헐... 55점..
70점이 넘어야 수료인데, 떡하니 55점 미수료...
알고 보니 이 책은 이제까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역사적인 사건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는 책이었다는 사실...
갑자기 좀 멍해졌다.
나 지금 뭐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나의 책 읽기의 목적부터 뒤돌아 봐야 할 시기이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게 책 읽기가 맞나?
아니지, 책장에 꽂히는 책이 더 많아지는 게 재미있었겠지. 책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만큼 나의 지식이나 언어 표현능력, 그것에 비례해 늘어나는 생각의 깊이 뭐 그딴 거라고 생각했던 거지. 읽었다고 표시할 수 있는 책의 숫자. 그 숫자에만 열을 올려 댔으니...
거기다. 뭐가 그리 급해서 첫날 시험을 해치우냐고.
한 달이 남아 있는데. 인터넷까지 뒤져가며 그 시험을 5월 1일에 치고 떡하니 미수료를 만드냐고.
이건 좀 생각을 깊이 있게 해야 할 문제였다. 단순히 미수료로 책값을 물어내야 한다는 부담감을 넘어선 어떤 불안감이 고개를 들었다.
미리미리에 대한 강박적 행동. 빨리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고정관념. 그 조급증은 언제부터 나를 야금야금 집어삼켰을까. 그러지 말자 그렇게 다짐을 했건만.
나는 열혈 엄마였다. 저녁에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아이들 저녁을 만들어 먹이고, 곧장 공부를 시켰다. 국어, 수학, 영어. 하루에 해야 할 양을 정해두고 아이가 아프든, 피곤하든, 내가 시간이 없든, 힘들든 예외 없이 진도를 나갔다. 학교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미리 공부를 시켜야 한다는 생각과 나를 희생해서 아이들의 미래가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긍심에 취해. 결국 아이들은 공부를 하지 않겠다 나가떨어졌고, 둘 중 한 아이는 틱이 시작됐다.
나의 이른 준비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나도 아니고 아이도 아니었다. 미래의 행복이라는 너무나도 허무하고, 허황된 신념에 도취되어 소중한 두 아이의 마음을 다치게 만드었음에도 나는 아직도 미리 뭔가를 해야 한다고 조바심을 냈다.
오늘따라 드립커피가 더 씁쓸하다.
다시한번 마음을 다잡아 본다.
천천히 내린 커피를 천천히 마시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