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 일찍 직원 아버지의 부고소식을 듣고 4시간 반거리에 있는 삼척 장례식장을 다녀왔다.
죽음은 늘 그렇든 갑작스럽고,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은 당황스럽다.
늘 같은 삶의 연장 선상에 있을 것만 같았던 아버지는 마당에 쓰러져 홀로 생을 마감했고, 그 끊어진 삶을 뒤로하고 시간에 떠밀려 앞으로 앞으로 내몰리는 가족들은 자꾸 뒤돌아봐진다.
그렇게 꽃을 좋아해 마당에 하나 가득 심어 놨는데 이제 그걸 누가 들여다보나.
몸이 안 좋으면 쉬면 되지 뭐라고 아침부터 벌통을 보러 간다고 다녀와. 가지 말라고 말릴걸.
하필 그때 마을회관에 볼일을 보러 갈건 또 뭐야. 가지 말걸.
지인들이 문상 와 절을 올릴 땐 눈시울을 붉혔다가 소주잔을 기울일 땐 이따금 밝아지는 표정의 자녀들과는 다르게 어머니는 근조화환이 늘어선 복도에서도, 일회용 그릇에 담긴 육개장과 수육 앞에서도, 문상객이 뜸한 시간 영정사진 앞에서도 눈물을 거두지 못하셨다.
배우자가 없는 나머지 삶.
그림자를 잃어버린 이후의 시간.
새 생명을 탄생시키고, 같이 키우고, 일거수일투족을 공유하는 같이 늙어가던 사람의 부재는 어떤 의미일까?
어머니의 공간에 아버지가 올곧이 채워주었던 공기의 부피만큼 뻥 뚫려버린 마음의 공간은 세 살이 돋을 때까지 한동안 눈물이 채울 것 같았다.
서서히. 세대는 교체되어 간다.
어르신들이 돌아가시고 새 생명이 태어난다.
집으로 돌아가는 고속도로 갓길에 로드킬 당한 고라니 주위로 까마귀들이 내려앉았다. 날아올랐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새 생명으로 언젠가 태어났던 고라니는 삶의 막을 내리고, 까마귀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자연스럽지만, 단호한 삶과 죽음의 연결고리. 죽음을 딛고 일어서는 새로운 생명들.
차창밖으로 무수히 스치는 나무와 새, 즐비한 건물들과 맞은편 헤드라이트를 밝히고 어딘가로 질주하는 차량을 바라보며. 삶과 죽음에 대해 곱씹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