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는 옷을 입어서는 안 되었다. 반짝이는 헤어핀도 안된다. 될 수 있다면 나에게서 나는 냄새도 모두 지워버리고 싶었다. 거기 머무르고 있으나 머무르고 있는지 아무도 모르는 존재. 그 누구의 시선에도 발견되지 않도록, 눈에 띄는 일이 없도록.
1995년 5월 낮 12시 40분.
어느 중학교 교실에서 하루 중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한 여자아이의 머릿속을 지배했던 생각이었다.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리고 교과서와 지시봉을 챙겨든 교사가 뒤통수를 보이기 무섭게 책상 옆에 걸어두었던 도시락 주머리는 챙겨드는 부산함. 걸상을 밀고 책상을 옮기는 바닥 긁히는 소리. 높고 낮음이 뒤섞인 40여 명의 웃음. 누군가를 부르는 호명. 그 이후로 짙게 밀려드는 음식냄새.
맨틀의 움직임. 거대한 지각 변동처럼 움직이는 책상과 걸상 사이에서 나는 혼자 섬처럼 고요했다.
책과 공책, 필통을 책상 서랍에 가지런히 정리하고 도시락을 꺼냈다. 납작한 은색 도시락. 도시락 바닥은 화산섬처럼 군데군데 솟아 있고, 집에 도착할 때쯤 말라붙은 밥풀을 띄어 내느라 문질러댄 쇠수세미 덕분에 긁힌 자국이 역 역한 오래된 밥그릇. 언제 나왔던 만화 주인공인지도 모를 캐릭터가 그마저도 반쯤 지워진 뚜껑 위에서 해석되지 않는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이 녀석을 보자 오만상이 구겨진다.
[나도 이쁜 도시락 사줘 애들 다 플라스틱 도시락 가지고 다닌다고!]
[멀쩡한 도시락을 뭐 하러! 또! 돈이 썩어 남아도냐?]
사춘기 소녀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헤아려 줄 만큼 여유 있는 삶을 살지 않았던 엄마이기에 새로운 도시락을 획득하기 위해선 현재 나의 상황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고, 내가 받는 심리적 압박감에 대해 조미료를 치고, 거기다 확실하게 눈물 한 방울 정도는 섞어야 될까 말까 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나는 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어차피 같이 먹을 사람도 없는데 이쁜 도시락 가져서 뭐 해. '
도시락이 이쁘면 공포가 로맨틱 코미디로 장르변경 되지 않으리란 것쯤은 나도 알고 있지만. 괜히 반쯤 날아간 캐릭터에 인상을 쓰며 심술을 부려 본다. 튀지 않으려 기는 썼던 나는 이제 다음 단계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빠른 손놀림을 할 차례다.
3분 만에 밥 먹기.
빨리 밥을 먹고 책상에서 일어나는 순간 나는 혼자 밥 먹는 사람이 아닌 게 된다. 마음 같아선 점심쯤 건너뛰고 싶지만. 정확히 울리는 배꼽시계는 어쩔 수 없이 차선책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빨리 먹으면 돼. 그럼 돼'
시선을 아래로 고정했다. 마음을 다잡고, 도시락 뚜껑을 열고, 반찬 뚜껑도 열었다. 숟가락을 들고 고봉밥 숟가락을 뜨려는 찰나.
[같이 먹자.]
하며 두 명의 아이가 내 책상 옆으로 책상 하나를 더 가져다 붙였다. 며칠째 혼자인 데다, 누구에게서 내쳐진 건지 빤한 교실 내 풍경을 알고 있었던 사려 깊은 친구 두 명이 도시락을 펼치자 교실 뒷문에서 사발면을 든 아이 하나도 달려왔다.
[내 자리도 내 자리도! 나 오늘 라면 국물 줄 테니까 밥 조금씩 내놔!]
갑자기 네 명의 무리 속에 내가 들어가 원래 넷이었던 것처럼 섞였다. 흰색 바깥에 있던 검정이 섞이면서 다크 그레이가 됐다. 반찬 하나하나가 섞여 비빔밥이 되고, 월남쌈이 되고, 양장피가 됐다. 나를 내내 괴롭히는 왕따 경험 속에서도 내 주위엔 늘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왕따를 주도했던 친구와 계모임도 하고, 내게 연락을 주저했던 친구도 연락이 닿아 친정에 올 때마다 나와 만나 술잔도 곧잘 기울이는 사이가 되었음에도 뇌에 아로새겨진 위기의식은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회원님 너무 빨라요. 급해 좀 천천히. 천천히. ]
수영강사님은 나를 보면 늘 양 손바닥을 아래로 보이게 놓고 눌렀다 올렸다를 반복한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고리에 미소를 반쯤 걸치고서.
나는 혼자이면 불안하고, 조급하고, 걱정되고, 두렵다. 아직도 왕따를 당하던 15살 여중생이 마음속에서 떠나질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애처로운 그 아이는 이제 조금씩 이별해야 한다.
오늘 드디어 식당에서 혼자 식사를 하게 될 기회가 찾아왔다. 같이 밥을 먹던 동료가 둘 다 휴가를 냈다.
혼자 식권을 빼들고 밥과 반찬을 담아 널찍한 테이블에 앉았다.
오늘의 목표는 최대한 천천히 먹자. 불안해하지 말고. 여유를 갖자.
숟가락 젓가락을 들고 식사를 했다. 샐러드, 어묵국, 야채튀김, 콩나물 무침. 처음 먹어보는 마제소바도 제법 맛이 괜찮다. 그렇게 한 3/2쯤 식사를 할 때쯤. 옆팀 차장님과 일행분들이 내 옆으로 와 착석했다.
[간호사님 왜 혼자 식사하세요? 밥 친구들은 다 어디 갔데?]
[네 오늘 두 분 다 휴가 셔서요]
[아~ 그러시구나. 근데 간호사 선생님 이번에 건강검진 있잖아요. 그거 회사로 와서 하는 거죠? 나는 정밀검진을 했는데 콜레스테롤이 높다더라고요. 술을 많이 먹어서 그렇겠죠 뭐. 과자도 많이 먹긴 했지만. 근데 그 수치가....]
마침표 없는 내 말 좀 들어봐 질문이 식판으로 수북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질문에 배가 터지기 전에 밥숟가락에 나머지 밥을 고봉으로 떠 한 입에 욱여넣었다.
천천히 혼자 밥 먹기는 다음에도 기회가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