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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나? 틀리나?

by 발돋움

아침마다 드립커피를 내린다.

매일 커피를 내리다 보니 아까운 것이 생겼다.

그것은 푹푹 줄어드는 원두도 아니요, 뜨거운 물을 조금씩 부어가며 내려야 하니 허비되는 시간도 아니었다.

바로 페이퍼.

그게 왜 아깝다 생각했을까에는 나름 이유가 있다. 커피 원두는 재활용할 수 없지만 이 녀석은 잘만하면 다시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는 환경운동가도 아니고, 사회정의를 실현해야만 속이 후련한 강박적 도덕주의자도 아니지만. 요즘 쓰레기를 버릴 때마다 죄책감과 걱정 비스무리가 늘 찾아든다.

우리 집에서조차 매일 쏟아져 나오는 이 쓰레기들이 다 어디로 가는 걸까? 집에서 버려지면 다른 어딘가엔 차곡차곡 쌓일 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서 인지 요 페이퍼가 예사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재사용을 위해 드립을 내리고 드리퍼에 남아 있는 페이퍼와 원두를 그냥 둔다. 나름 방향제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커피는 향기롭다.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깊고, 은은하면서 식품향이라 친근하다.

다음날 원두를 털어내기 위해 페이퍼를 드리퍼에서 떼어내려고 하니 요 녀석 가장자리가 붙어서 잘 떨어지지가 않는다. 살살 띄어내려다 북 찢어져 버린다.

실패

페이퍼가 드리퍼 가장자리에 들러붙지 않기 위해서는 띄워야 한다. 그렇다면... 페이퍼 끝을 살짝 접어 스테이플러로 집어본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누가 보면 대단한 환경운동 하는 줄.

원두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드리퍼에 밀착되지 않은 페이퍼는 뜨거운 물을 붓자 휘청이더니 커피가루를 페이퍼 밖으로 토해냈다.

뭐 하냐 나.


갑자기 전의를 상실했다. 그냥 하던 데로 해 너 하나 그런다고 막 환경이 달라지지 않아 마음속 뾰로통이 툴툴거렸다. 그러자, 툴툴이를 누를 둘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는 늘 방법을 찾아내시잖아요.'

목적지향적인 인간이 나란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너무 앞만 보고 달렸나... 아이에게 비춰진 내가 아등바등으로 비춰지진 않았을까 지레 겁이 났던 나는 반짝거리는 아이의 두눈을 보며 안심 할 수 있었다. 오히려, 뭐든 해내는 엄마에 대한 강한 믿음이 느껴졌달까.


그래, 다시.

종이를 조금만 집어 스테이플러를 집고, 드리퍼에 페이퍼를 꽂기 전 설압자를 양옆으로 끼운다.

덧니를 드러내고 별짓을 다한다며 웃고 있는 것만 같은 드리퍼 입에다 그만 웃으라며 뜨거운 물을 드리부었다. 넘치지도 들러붙지도 않게 커피는 잘 내려졌다.


결론적으로

페이퍼 하나를 아껴보겠다며 설압자 2개, 스테이플러 집기의 수고로움, 중간에 원두를 토해내 다시 드리부운 원두량까지 많은 손실이 따랐다.

어렸을때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손전등을 조립하는 과제 였는데, 허술한 도면대로 연결했더니 손전등에 불이들어오지 않아 이것저것 모두 연결해 가며 몇시간을 끙끙거린 후 조그만 전등에 불이 들어오게 만드는 나름의 기적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그 손전등은 꺼지지가 않았다. 베터리가 다 할때까지 계속 켜져만 있는 손전등.

손전등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나는 과제를 잘 수행한 걸까? 망친걸까?

나는 자원을 낭비한걸까? 아낀걸까?

어릴때 치열하게 고민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묻어두었던 숙제가 적힌 알림장이 오늘도 펼쳐졌다.


목표를 이루었지만, 한편으론 전혀 이뤄지지 않은 것 같은 이런 삶의 과제 앞에서 나는 이제 과정이라는 평가항목도 추가해 볼 생각이다.


나는 죽을때까지 성장할 것이고 인생의 수많은 선택은 성장과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하나도 틀린 것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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