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감아 주다.

by 발돋움

고등학생인 두 아들 녀석 덕분에 8시 전 이른 출근길을 나서곤 하는데 회사까지는 차로 길어야 15분 거리니 늘 다른 직원들보다는 먼저 사무실에 도착한다. 늘 가던 길을 따라 회차로를 돌고 있을 때 눈에 익은 SUV가 앞서 달리고 있었다. 회사 후배 차였다. 그 친구는 자재 수급 담당이라 8시가 출근시간이니 굼뜬 소형차를 앞질러 액셀을 밟아 내달리길래 그럴만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다란 생각을 최근 그 후배를 보며 또 했었다. 수영수업을 후배와 같은 반에서 하게 된 지 1년 정도 되었다. 후배를 가까이 지켜봐 온 지 20년 정도 되었고, 다른 사람보다 눈치가 빠른 편에 속하는 나는 후배의 미묘한 심리적 변화를 읽은 지 꾀 되었다. 같은 반에서 수영수업을 하는 A를 보는 눈빛이나 그와 대화하는 목소리의 톤, 고개는 다른 곳을 향하지만 몸이 바라보는 방향, 표정, 이따금 뭔가를 찾아다니는 시선.


언니 저도 몰랐는데 저랑 같은 아파트 같은 라인에 살고 있더라고요. 신기하죠?


후배의 얼굴은 남자가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정도를 접했을 때만큼이나 놀라움이 묻어 있었고, 다른 사람은 가지지 않은 아주 소중하고 비밀스러운 무언가를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38살, 숫기 없고, 진중하며, 말이 없던 A는 회식자리에서 친밀감이 올라가자 슬쩍 소개팅 좀 해줄 수 있냐는 부탁을 수영 회원 모두에게 해왔고, 다들 주위 사람들에게 조금씩 수소문하며 짝을 물색하고 있었다.


OO아 A얼굴 좀 얘한테 보여줘 바바. 괜찮게 나온 걸로. 스타일이 괜찮은지.


아직 결혼 전인 후배에게 A의 사진을 보여주라고 후배에게 권하자. 후배는 엉덩이를 달싹이고 뭉그적거리며 A는 얘 스타일이 아닐 것 같은 데를 중얼거리다 신중하게 고른 단체사진 하나를 결혼 전인 후배에게 보여줬다. 이 사람은 제스타일은 아니에요라는 대답에 나는 보았다. 안도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는 후배를. 후배가 신중하게 골랐던 A의 사진은 괜찮게 나온 사진이었을까? 가장 괜찮지 않은 사진이었을까? 후배에게는 아마도 결혼 전 후배에게 보여주기에 가장 괜찮은 사진이었겠지.


소나기 같은 거래. 사랑은.


얼마 전 같이 밥을 먹는 자리에서 지극히 감성적인 베프는 사랑을 그렇게 표현했다. 하고 싶다, 하기 싫다. 해야 한다. 해서는 안된다. 같은 판단과 이성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소나기가 와서 소나기를 맞는 거라고. 신랑이 있고, 자녀가 있고, 사회적인 분위기가 있고, 소도시에 부모님은 건너 건너 다 아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집성촌 같은 이곳에서 유부녀가 총각을 몰래 흠모한다. 그 소나기를 맞아 버렸다. 후배의 의지와 상관없이. 예전 같으면, 마음가면 다 따라가는 거라며 펄쩍 뛸 이 일에 나는 요즘 좀 초연해 졌다. 마음만으로 지탄의 대상 일 수는 없지 않을까?

나는 슬쩍 후배편으로 감정이 기운다. 회사 집 회사 집을 반복하며, 아이 키우고, 신랑 뒷바라지 하고, 사는 동안 낙이 없어 대부분 침울했던 후배가 그 마음만으로 가슴이 뛴다면, 연예인을 좋아하 듯. 그저 그 사람을 보며 기쁠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오히려 활력 일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계속 모른 척 할 예정이다. 나는 후배를 믿고, 상황을 이해하고, 우리는 모두 다 얼마만큼 모자라고, 또 얼마만큼 괜찮은 사람들 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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