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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희 Aug 23. 2023

엄마를 생각하는 하루

기사 아저씨가 엄마 이름 보고 딸이라고 안 그러디?


퇴근하고 나서 엄마 앞으로 온 택배가 있길래, 동생에게 물어보았다. 아니. 이번에는 안 그러던데. 우리 집에 배달온 적 있었나. 모르겠네.


배달 기사 선생님들이 엄마랑 내 이름을 종종 헷갈린다. 내가 신청한 카드를 엄마가 받으면 남희 씨, 서명 좀 부탁드릴게요, 라고 한다든가, 엄마가 시킨 물건을 엄마가 받아도 ‘따님한테 전달해주세요’라고 한다든가. 엄마는 엄마 나이에 비해 좀 젊고 세련된 느낌의 이름이고(고1 때 엄마랑 동명이인인 아이가 같은 반이었다) 나는 내 나이치고는 고풍스러운 이름이라서 그런 것 같다. 그렇게 나와 엄마의 이름은 자꾸 제자리를 벗어나 뱅글뱅글 돌고, 나는 내 이름을 계속 생각할 때마다 자꾸 엄마의 이름을 떠올리게 된다.      


내 이름에는 모계의 흔적만 남아있다. (굳이 따지자면 성씨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우리 부모님은 동성이본이라서 성씨도 아버지만의 자라고 하기는 힘들다.)     


엄마는 나에게 ‘희’라는 이름자를 물려주었다. 1년 뒤에 태어난 동생에게는 희 말고 다른 이름자 하나에 아버지의 이름자 하나를 더해주었지만, 첫째 아이에게는 그렇게 균형을 맞춰서 이름을 지어줄 여유가 없었던 모양이다. 사실, 아기 이름을 뭐로 지어야 할지 몰라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 단골 약국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을 가져온 것이니 엄마가 나에게 ‘희’를 물려준 건 순전히 우연이다. ‘희’가 뜻하는 한자도 조금 다르다. 엄마는 ‘기쁠 희’ 자를 쓰고 나는 ‘바랄 희’자를 쓴다. 그래서 나는 무려 ‘남쪽의 희망’이라는 어마어마한 뜻의 이름을 갖게 된 거지. (정말…. 그 당시에 약국 할아버지가 나에게 가졌던 기대란 뭐였을까?) 물론 뜻이 좀 부담스러우리만큼 크긴 했지만, 어려서부터 이름에 규모와 멋짐이 담긴 것이 좋았다. ‘남희’라는 이름이 주는 약간의 완고함 같은 것도. 그러니 엄마가 내 이름을 직접 지어주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은 좀 버려줬으면. 나는 너무 예쁘고 부드러운 이름 하고는 캐릭터가 안 맞기도 해서. 아무튼. 이름부터, 엄마는 엄마도 모르는 사이에 상황을 주도하고 있었다.      


여기서 핵심은 엄마도 엄마를 모른다는 것이다. 해서 자식들이라고 엄마를 알지 못하는 거겠지. 누구나 타인에게 알 수 없는 신비로 남기 마련이지만 나에게는 엄마가 웬만한 다른 타인들보다 더 알 수 없는 사람이다. 동생이 다이어리 한가운데에 곰인형 스티커를 붙여놓으니까, 곰돌이가 공중에 떠서 불안해 보인다고 말한 사람은 엄마밖에 없었다. “산이 나를 부른다!” 하고 뒷산으로 달려간 사람도 엄마밖에 없고, 우리가 이사 오기 전부터 이 근처에 살았다는 고양이들에게 ‘늘 밀리는 기분이 든다’고 고백한 사람도 엄마밖에 없다. 꽃잎이 포메라니안 털처럼 풍성하다고 겹벚꽃을 ‘포메라니안 벚꽃’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엄마 말고 찾을 수 있을까? 왠지 없을 것 같다. 동생하고는 말하면 얘가 뒷말을 뭐라고 받을지가 예상되는데 엄마는 잘 모르겠다. 엄마는 거의 늘 예상을 벗어난 대답을 하니까. 나는 엄마를 패턴으로 파악할 수 없다. 일반화하기가 어렵다.


엄마는 또 여타의 트랙과도 맞지 않는다. 결혼 생활 동안 직장인도 하고 전업주부도 했던 엄마를 ‘열정적인 커리어우먼/워킹맘’, 혹은 ‘착실한 주부’로 나눌 수가 없다. 일단 이런 식의 분류가 얼마나 편협한지는 제쳐두더라도, 엄마는 다니던 직장에 큰 기대나 소명을 품은 적이 없고 주부, 아내, 엄마로서도 타인의 기준에 잘 부합하려 하지도 않았다. 회사 동료가 구리면 회사를 관뒀다. 오후 10시 넘어서 안방에 혼자 있는 엄마에게 말이라도 걸면 주부고 엄마여도 ‘퇴근’이 있어야 한다고 혼이 났다. 가사에 대한 평가를 거부했다. 3년 정도 친할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할머니가 엄마를 빤히 쳐다봐서 엄마가 “왜 쳐다보세요?”하고 물어봤던 적도 있다. 와, 나는 아무리 용감해도 시어머니한테 왜 쳐다보냐고는 못 물어볼 거 같아. 대단해, 라고 하니까 고개를 갸웃하던 엄마가 떠오른다. 너야말로 대체 그걸 왜 의식하는 거야? 너는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렇게 말하려다가 만 것 같은 표정.     


일이 더는 그 사람의 인격이나 개성을 오롯이 다 표현하지 않는다는 걸 다들 알게 된 시점에, 엄마라고 해서 커리어나 가정, 혹은 둘의 갈등으로만 완전히 파악되리라는 법은 없다. 여성, 그 이전에 모든 인간은 그 어떤 말들을 가져와서 설명해도 그들을 초과하는 부분이 있다. 나는 그걸 엄마에게 배웠다. 세상 모든 엄마들은 네가 세상에서 배운 대로 전형적이지 않단다.     


나는 이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렇다고 엄마랑 아주 화목하게 지냈다든가, 다툼 없이 지냈다든가 한 건 아니다. 엄마가 ‘유자식’의 고충에 대하여 흔히 하는 농담을 하면 나는 격하게 불쾌감을 표시했다. 부모가 선택해서 날 낳았는데 태어나서 고생시킨다고 미안해해야 되는 거야? 난 싫어. 부모에 대한 죄책감을 과장해서 내가 있어서 미안하네 어쩌네 말만 그럴듯하게 하고, 실제로는 희생하길 바라며 뜯어낼 거 다 뜯어내고 싶지 않았다. 도리에 맞지 않은 데다, 술자리에서 하는 주정 같이 흘러가는 자기 비하여도, 존재까지 운운하는 자기 비하는 자존심이 상하지 않나. 나는 엄마를 고생시키지 않는 딸이 되고 엄마도 그런 말을 안 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어. 우리는 대충 그렇게 휴전했다. 내가 체기가 있어서 외할머니 산소에 못 가겠다고 했을 때를 빼고는.      


나는 니가 정말 얄미워. 엄마는 진심으로 얄미워하면서 내게 말했고, 나는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엄마는 할머니한테 진심이니까. 할머니가 요양원에 계실 때는 주마다 가족들이 쓴 편지와 준비한 간식을 들고 찾아갔지. 전도사가 되고 싶어서 신학교도 갔던 엄마가 외할머니 장례 끝나고서는 할머니가 생전에 드시던 케이크를 사다가 한참을 손도 안 대고 놔둔다든가, 밤샘을 하려고 기를 쓰고 졸음을 참았지. 할머니가 천국에 갈 거라고 굳게 믿지만 사후 영혼이 한국식의 ‘유예’ 기간을 가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전전긍긍 노력하는 엄마의 모습이 따뜻하고 다정했던 기억. 그 기억이 좋아서 타박을 들어도 짜증이 나지 않았다.


*재업로드입니다. (그전에 올린 글 중에서도 재업로드한 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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