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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희 Aug 26. 2023

참된 허무와 슬픔이

분명 엄마는 태어날 때부터 어른이 아니었을 텐데. 과연 아니었나? 


엄마와 엄마의 중학교 친구들은 수업시간에 푸시킨을 배우고 나서 그의 시에 흠뻑 빠져 살았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라고 시작하는 그 유명한 시에. 얼마나 성숙했으면 삶이 나를 속이더라도 슬퍼하지도 분노하지도 않겠다는 말에 열광할 수 있는 걸까. 아니면 그들의 삶이 당시부터 얼마나 고되었기에? 나는 그녀가 아니므로, 그녀의 유년을 내 나름의 어두웠던 유년으로 가늠해 볼 뿐이다. 십수 년이 지났지만, 그때도 지금도 나는 삶이 나를 속일 때 ‘슬퍼하거나 노하면서’ 견딜 수는 없는지 궁금해한다.      


나는 너무 씩씩하게 살아. 


내가 이렇게 말하면 친구는 네가 아직 어려서 그래, 라고 대답해 준다. 무엇을 시도할 수 있었던 시절이 지나갔다는 것에 대한 감각. 무언가가 만들어지면 쇠하기 마련이라는 이치에 대해 깨닫기. 여기서 오는 허무함과 슬픔은 남 얘기 같고 별로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분야다. 나는 허무함과 슬픔의 정서가 어느 정도는 과장되었다고 보는 편이다. 무언가를 시도하기에 적절한 시기는 딱히 없고 무언가가 쇠할 거라는 이유로 ‘낡았다’는 꼬리표를 너무 일찍 붙이지는 않는지 의심한다. 그렇다고 해도 정말 허무와 슬픔이 찾아오는 순간,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순간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예를 들면 6년 전에 노환으로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와 영영 헤어지지 않는 방법 같은 건 없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언젠가 지상을 떠난다. 그게 아니더라도 모종의 일로 나와 이별하게 된다. 자연스러운 헤어짐과 소멸을 애도하며 삶의 주기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한 이유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런 자연스러운 슬픔의 상황과는 거리가 먼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난다.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헤어짐과 죽음이 너무 많다. 살아가는 것이 훨씬 당연한데도 타인이나 사회의 무관심과 방조로 죽는 사람들, 그게 아니더라도 쫓겨나듯이 이곳을 떠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이런 일을 필연적인 슬픔처럼 여길 수 있을까? 그 비극들에서는 자연스러운 슬픔에서 찾아보기 힘든 분노가 섞여 있다. 비극을 겪지 않은 사람들이 듣기 싫다는 이유로 억누르려 드는 분노에 찬 비명소리가. 참된 허무와 슬픔이란 이 비명소리가 자기 원을 다 이뤄내고 나서야 고요한 새벽처럼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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