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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희 Aug 31. 2023

글을 써서 일하는 하루

작가가 되어서 투잡을 하는 걸 생각해 본다. 지금도 인터뷰 의뢰를 받아 글을 쓰거나 에세이도 연재하고 있으니, 아마 달라질 게 없으려나. 그래도 이왕이면 투잡 하는 김에 어엿한 이름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전업이라는 옵션은 선택지에 아직 없다.      


주변 사람들은 야망을 가지라고 했다. 특히 선생들이 그랬다. 글이 돈 안 된다 생각하지 말고 유명한 작가들처럼 되라고. 근데 그게 쉽나. (이 ‘대투잡 시대’에 이 무슨 비현실적인 소리를.) 내가 글의 질과 상품성을 동시에 가져갈 수 있으면 벌써 유명 작가지, 몇 년째 지망생은 아니겠지. 아직은 격을 갖춘 글을 쓰는 게 먼저다. 그리고 결과와 성과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글 쓰는 판이라고 없을 리가 없다. 전업인 데다가 경제적 성과가 대단해도 멋없는 인간들이 있고 다른 일을 겸하면서도 훌륭한 걸 뽑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일과 글쓰기 사이의 긴장과 균형이 그의 작품을 내실 있게 만드는 것 같을 때도 있다. 적어도 글을 써서 작가 “선생님”이라 불리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런 성공지상주의 앞에서 안 그런 척, 완성도니 의미니 뭐니, 앞서서 따지고 가르쳐야 되지 않나. 실적 대신 뜬구름의 관념을 내밀기. 그게 지적 허영의 규칙 아닌가 싶고.      


더 재밌는 건 이 투잡에도 급이 나눠진다는 거다. 생계를 위한 두 번째 일이 첫 번째 일과 가까워야 한다는 것. 글 쓰는 게 본업이라면 부업 역시 작문 같은 것인 게 일류다. 아무개 작가와 함께 하는 글쓰기(책 쓰기, 소설 쓰기) 교실의 강사이거나, 작가 초청 강연이 주라면 일류 중의 일류다. 자신의 작가적 명성을 내세워하는 일인 데다, 다른 일들에 비하면 시간 대비 페이가 높다고 여겨져서다. (내가 인터뷰 건당 받는 금액을 생각하면 같은 작문 계열임에도 내 투잡이 일류가 아닌 이유가 선명해진다.) 글 쓰는 일에 경험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한때 믿어졌던 육체노동, 매장 서비스직 등은 다시 교묘하게 무시당한다. 육체노동은 지나친 미화 혹은 천대 속에서 왕복운동을 한다. 어떤 일이 일 그 자체로서 여겨지지 않는 거다. 얼마나 대단한 대상화인지.


그렇대도 택배를 나르고 택시에 손님을 싣고 시멘트를 옮기는 것과 글쓰기는 하나도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 달라지진 않는다. 소요되는 창의성도. 아마 디자인과 영업과 마케팅을 하는 것과도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해서 자아를 찾기 위해, 퇴사하고 작가가 됐다는 사람들 얘기를 듣고 있으면 의아해진다. 당연히 글쓰기랑 회사 일을 병행하기 어려워지면 둘 중 하나를 정리하는 게 자연스러워 보이고, 전자를 선택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또 글쓰기가 자아 찾기와 자기 치료에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정한 나를 위해 퇴사를 하고 작가가 됐다는 말이 자연스러워지는 건 아니다. 꼭 이런 사람들은 전직을 톱니바퀴의 부품 같이 돌아갔던 비참하고 소외된 노동으로 묘사하면서, 변화된 후의 삶을 구원이라도 받은 양 표현하곤 해서 의심을 자처한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글쓰기는 자아 찾기와 자기 치료에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 그러나 글 쓰는 일이 다른 직업에 비해 더 우월하게 자기실현의 수단이 되지는 않는다. 글 쓰는 일은 다른 일과 비슷하게 자기실현의 수단이 된다. 사람과 환경에 따라서는 다른 일보다도 못할 수 있다. 길거리에서 나물을 파는 할머니나, 네잎클로버를 파는 아저씨는 정리되고 완성된 자의식에서 을 쓰는 나와 몇몇 사람들을 압도할 수 있다.


퇴사를 하고 작가를 해서 만족한다면 그건 글 쓰는 일 자체가 자기실현 완성의 결정체여서가 아니라, 천상 작가 체질이거나 전직이 본인과 안 맞았거나 둘 중 하나다. 글쓰기가 심리 치료 요법이나 마음 수양의 방법으로 사용될 만큼 어떤 매력적인 지점이 있다는 건 인정하겠지만, 모든 사람이 심리 치료를 받거나 마음 수양을 위해서 글을 쓸 필요는 없다. 요약하자면 자기를 위한 글쓰기가 하나도 필요 없을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얘기다. 글쓰기는 종교가 아니다. 만인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지 않는다. 글쓰기의 고정관념이 품고 있는 신성함과 낭만이 뭐라고 속이든 간에, 글쓰기는 그저 노동일뿐이다. 꾸준해야 하고 진이 빠지며 자주 지루한, 평범한 일. 위대한 문인들은 자신의 글쓰기가 다른 일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기보다, 더 못하지 않을까를 고민했고 특정한 노동을 (그리고 그 노동의 종사자들을) 무시하는 사회의 기준을 글을 통해 뒤집었다. 그들이 내가 지망생이 된 이유였다.


그러니까 나는 별로 거룩할 것도 대단할 것도 없는 마음으로 자판을 두들기고 있다. 잠시 멈춘다. 거스러미를 뜯어내고 하품을 한다. 창문을 열고 화면을 노려본다. 조만간 책상도 정리할 것 같다. 이 안 나오니까 딴짓을 한다. 트럭 뒤편에 뭔가를 싣고, 예를 들면 벽돌이나 비료 포대를 싣고 운전하다가 차가 정체된 기사들이 이런 느낌일까. 지금 글을 쓰면서는 유명 목사의 설교를 듣고 있다.      


설교에서는 종교서적에서처럼, 너의 야망을 버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대도 내 글에서 야망이 사라지는 일은 없다. 적어도 작가가 투잡을 하는 걸 비웃는 애들을 짓눌러주고 싶다. 테드 창 정도는 되어야 할까. (그도 대표적인 ‘투잡러’니까.) 테드 창이 아니어도 무엇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내 남루한 형편과 성별과 나이와 종교 여부 기타 등등의 조건들에 대한 비웃음이, 투잡을 하는 내 능력에 대한 지적으로 매끈하게 연결된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왜 하필 글 쓰는 판에만 투잡 열풍이 비껴가는 걸까?) 화가 나서 단어는 떠오르지 않고, 스페이스바와 엔터키를 연달아 누르고 있으면 PC에 깔아놓은 메신저에서 알림음이 울린다.


별 것 아닌 메시지에 답변을 해주고 개별 창을 나가면 결혼정보업체의 광고가 하단에 있다. ‘나 정도면 누구를 만날 수 있을까?’ 옆에는 “91년생 교사”의 예쁜 얼굴이 함께 한다. 원래 이런 건지, 아니면 이 나라라서 이런 게 있는 건지. (시대적 상징성을 강조하는 “82년생 김지영”과 다르게) 어린 나이부터 권위를 내세우는 “nn년생+직함”을 보며 작가가 결혼정보회사에서 최하위 등급을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애초부터 글쓰기는 육체노동과 가치평가에서 전혀 차이 날 게 없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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