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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희 Aug 19. 2023

글을 쓰기 전에 글을 쓰기

지난 일요일에 지하철 객실에서 껌을 샀다. 행상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주었다. 이례적으로 짧은 분량에 최루성의 수식어가 빠져 있어서 읽기가 편했다. 사업을 죽 했었다가 상황이 어려워져 행상을 하게 되었다고.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도가 그나마 감성적인 표현이었다. 이런 건조함이 퍽 좋았는데 나는 조금이라도 절절한 부분이 나오면 하루 종일 센티해지는,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단지를 받아도 읽지 않고 껌만 사고는 했다.) 만 원을 꺼내서 껌 몇 개를 받고 전단지를 돌려주면서 마지막 문장을 읽었다. “좋은 분들 감사합니다!” 집에 오는 길에 그 말을 속으로 거듭 중얼거렸다.  

    

어쩐지 일주일 내내 이 일을 글로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왜 이걸 써야 하지, 하는 생각도 함께. 


행상을 마주치기 전에 나는 아마 습관처럼 핸드폰으로 인스타그램에 들어갔거나 온라인 서점 홈페이지에 등록된 신간들을 구경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 둘 다 했겠지. 이딴 거 말고 책을 읽어야지,  결심만 하고 계속 들여다봤겠지. 아마 시공간의 음모가 아닐까. 유행하는 가성비 명소에 우르르 가서 찍은 양산형 인증샷들, 제목부터 목차까지 비슷한 책들과 역시 복사 붙여 넣기 한 것 같은 과장된 추천사들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다니. 그러다가 행상을 마주치고, 종이를 읽고, 껌을 샀겠지. 그가 전단지와 껌을 건넬 때의 적절한 세기와, 그의 절제된 전사와, “좋은 분들 감사합니다!”로 넘어갈 때의 알맞은 비약과, 실제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던 그의 음성. 모든 면에서 생활의 품위가 있었지. 사실 그는 판매 활동에 ‘도움’을 구한다는 점에서 (도움의 대가로 그의 ‘고급 껌’을 얻을 수 있기는 하지만) 일종의 연민을 요청하기도 한다. 하지만 흔히들 그런 사람이 불쌍함을 우스꽝스럽게 내보일 거라고 예상하기에 그의 품위는 좀 당황스럽다. 그는 사람들에게 약간의 연민과 돈을 구한다. 그 이상은 별로 바라지 않는다. 그는 돈을 받고 서비스를 제공하고 자기 갈 길을 간다. 사실 그는 별로 불쌍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대부분 연민을 바라는 사람은 격이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행상이 소환한 임상 경험을 검토한 결과다. (그러니 멍청하게 불쌍한 사람은 대개 차별을 위한 스테레오 타입 아닐까?) 또 다른 명제가 반례로서 결론을 증명한다. 연민을 증오하면서 동경이나 사랑을 바라는 사람들은 격이 없다.      


(동정을 거부하면서 동경이나 사랑을 받기 위해 뼈를 깎아가며 노력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제외하겠다) 예를 들면 SNS에 영혼까지 끌어모아 인증샷을 올리다가도 바로 다음 게시물에서 남의 가십이나 떠들어대는 인간들, 캐셔가 앉아서 계산하는 꼴도 못 보는 주제에 책으로 자기 인생을 미화하고 싶어 하는 인간들. 걔네는 본인들을 불쌍해하면 불같이 화를 내면서, 얼른 자신들을 선망과 애정의 눈으로 봐주길 바랄 것이다. 선망에 걸맞은 노력을 하지도 않았으면서. 멋지게 보일 때 감수해야 할 불편을 조금도 참지 못하면서. 멋지고 강하고 훌륭한 사람은 타인의 소문을 소비하고 그를 인격 모독하는 것에 낭비할 시간이 없는 데다, 책을 쓸 거면 게시판 혐오글 이상의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사상적이고 기술적인 노력을 더하겠지. 그들은 노력이 부족한 관계로 멋이 없다. 불쌍하지도 않고 그냥 엮이기가 싫다. 누군가의 지속적인 인정과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영혼이 얼마나 연약한지는 잘 알겠지만. 지속적인 인정과 사랑은 엄청나게 강도 높은 감정 노동이다. 자칫하다 사람을 탈진시킬 수도 있는. 타인이 그걸 별 이유 없이, 혹은 그들이 던져주는 알량한 사진이나 줄글 정도로 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얼마나 이기적인지. 타인의 존경을 받기 위해 피 터지게 수련하는 유명인들까지 들먹여야 하는 건가. 


내 생각엔, 연민을 구하는 사람들은 연민을 증오하며 애정을 갈구하는 사람들이 모르는 이런 점들을 알고 있기에 품격이 생긴다. 그는 강도 높은 호감과 애정을 바라지 않는다. 예의를 차리고 약간의 도움을 구하고 감사를 표한다. “좋은 분들 감사합니다!” 내가 이 감사를 받을 만한 사람인가. 나는 충분히 ‘좋은 분’인가. 나는 오늘도 ‘86세대’ 까는 ‘90년대생’ 저자인 걸 팔아먹기만 하면 불쏘시개든 뭐든 책이 나오는 걸 디스했지. 나는 ‘그딴 식으로는’ 책을 내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고 다짐했지. 좋은 사람이 될 거라고, 좋은 저자가 될 거라고 의지를 불태웠지. 그런데 나는 ‘좋은 분’인가. ‘좋은 분’이 될만한 싹수가 보이기는 하나. 우선 이걸 고민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그러니 글을 쓰기 전에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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