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남희 Sep 11. 2023

알뜰한 당신

모래주머니 같은 노인네.


수틀리면 자식한테 손찌검 먼저 하려 들고, 그렇다고 조인트를 까면서 교육시킨 수하들을 대단히 출세시켜 주었다는 전설 속의 회장님(나는 이게 날조라고 생각한다) 같은 가부장 스타일도 아닌 주제에, 딸이 일터에서 화가 났던 이야기를 하면 가슴이 아파서 못 듣겠으니 좀 닥치라고 말하는 아버지가 있으면 절로 그런 말을 하게 된다.      


이 못되고 멍청한 노인네는 내 레이스를 망치려고 태어나지 않았을까....로 시작하는 수많은 저주의 문장들. 그러나 입 밖으로 내는 것들은 없다. 누구들과는 다르게. 자기 부모에 대해서 입으로 살해와 간음을 사주하는 것들치고 실제로 그만한 원인이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자기 부모한테서 대학 등록금, 학원비, 여행 경비, 용돈, 결혼 비용 등등을 뜯어낼 거 다 뜯어먹으면서 고생시키다가, 부모의 희생에 아주 가끔씩 죄책감에 도취하는 것으로 대가를 치르는, 그런 ‘알뜰한’ 인간들이나 패륜을 ‘놀이화’할 수 있을 뿐이다. 증오든 기쁨이든 그것에 함몰되어 있으면 유머가 될 수 없으니까. 그 새끼들의 알뜰함은 곱씹어도 잘 믿기지 않는다. 나는 그냥 살기 싫다, 정도만 생각하게 되던데.      


살기 싫다, 라든가 죽고 싶다, 라고 말하면 종교인들이나 비종교인들이나 경악하는 눈으로 사람을 쳐다본다.      


요즘 종교인들은 거의 비종교인이며 비종교인들 역시 어느 정도 종교인이다. 어느 쪽도 좋은 쪽으로 일관되지 않았다. 종교인들의 여러 세속적 타락상이야 잘 알려진 바고, 비종교인들은 종교와 종교인을 조롱하면서도 누군가가 자기 목숨을 끊으면 갑자기 어느 교단의 신자라도 되는 양 ‘신성하고 존엄한’ 생명을 운운하며 그 사람을 비난한다. 부모와의 ‘천륜’을 어겼다더니 가족과 친구들과의 약속과 ‘도리’를 어겼다더니 할 때 그 ‘천륜’과 ‘도리’는 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신적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은 적어도 신성하고 초월적인 기원에서 나오는 것들로 자기 입장을 옹호할 수는 없는 법이다. 본인의 목숨은 본인에게 귀결되며, 애당초 주변인, 그중에서도 가족과의 관계는 탄생부터가 합의로 이루어진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죽음으로서 파기한다 할지라도 부당하다 할 수 없다. 당장 나가서 한강에 뛰어들라는(뛰어들겠다는) 말이 아니다. 적어도 신 없는 세상에서 삶은 ‘필연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세속 세계에서 삶은 개연성만 갖추어져 있을 뿐이고 이건 비종교인, 무신론자들이 견뎌야 하는 자기 논리의 ‘십자가’다. 종교인들이 악의 문제에 대하여 (신정론과 같이) 신을 그릇되게 옹호하는 일을 멈추고 종교에 대한 비판을 받아들이면서 악을 없애는데 전념해야 하듯이. 비종교인들도 본인들이 신이 되어 타인에게 의무로서의 삶을 부과할 것이 아니라 그저 우연하게 만들어진 삶이라도 기쁨을 누리면서, 태어나니 좋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기여해야 책임이 있는 것이다. 예수가 말한 것처럼 모두가 각자의 멍에와 짐이 있다. 그리고 그 짐을 져야 자기 인생을 조금이나마 정돈할 수 있다. 자기 생각으로 정돈되지 않은 생활은 때에 따라 자기 입맛에 맞는 말과 행동으로 기워져 있는 누더기 옷처럼 초라하고 기괴하기까지 하다.      


누더기 옷은 ‘알뜰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극단의 결과물. 모두가 어렵다고 하는 코로나 시기는 (공공 영역의 몇몇 대규모 ‘실험’을 제외하고) 엄청난 긴축의 시기로 기억될 것이다. 그중의 몇 개는 불가피했다. 자신이 유일한 사장이자 직원으로 근무하는 자영업자들의 폐업과 같은 것들. 그렇지만 일부는 별로 불가피하지도 않아서(원래부터 있어왔던 것이 더 드러나서) 그 볼품없음과 괴상함에 놀라게 된다. 비용은 최저에 가깝게, 업무 강도는 최대에 가깝게, 아르바이트, 계약직, 전담 프리랜서(프리랜서면 프리랜서지 전담 프리랜서는 뭐람) 무기계약직 등으로 불리는 변태적이고 불투명하며 일시적인 고용의 형태, 그렇지만 직장 내 인간관계에서는 ‘영속적인’ 감정노동을 요구하는 ‘동양식’ 예의범절의 혼용 등등.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이 있기를. 그렇지만 저 마음의 ‘자린고비’들에게는 파산이 있을진저.      


(네이버 블로그에 같은 글이 올라와 있습니다. 그것도 제가 쓴 것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죄책감을 생각하는 하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