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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희 Jul 14. 2023

향기

여름에 향수를 미친 듯이 찾아보다니, 답도 없지. 성년의 날은 5월 하순에 있는 기념일이면서 왜 향수를 선물하는 풍습이 있는 걸까. 5월은 이미 덥고 더운 날씨에는 웬만한 향이 다 거슬리는데 말이다. 기념일 앞뒤로 향수를 찾아본 흔적은 맞춤 광고로 반영돼서 여름 내내 추천으로 이어진다. 여름은 향수 비수기인데. 특히 내가 사랑하는 묵직한 장미향은.      


나이를 한 살 더 먹고서는 머스크향이 좋아졌다. 코튼향과 비누향은 여전히 비호감(빨래 냄새와 비누 냄새를 굳이 돈 주고 사고 싶지는 않은 마음). 예전에는 섬세하게 조향된 향수 대신 꽃 냄새가 진하게 나는 향수를 가장 좋아했는데, 요새는 탑, 미들, 베이스로 잘 나누어진, 조금은 시큼한 브랜드 향수를 맡는 걸 좋아한다. 올리브영에서도 파는 랑방이나 헉슬리 같은 향수들. 백화점 1층에서 나는 냄새들. 금세 한 가지 향으로 뭉뚱그려지지만, 사실 꽃과 과일을 거쳐서 도달하는 향기들은 정말 ‘문화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소설 같은 것 아닐까. 특정한 정서와 인상을 도출하기 위해서 여러 장소와 시간을 옮겨가는 이야기처럼. 향수도 굳이 최초에 감각한 것들에서 벗어나 다른 향기로, 다른 향기로 사람을 밀어보낸다. 내가 무엇을 느끼고 떠올리게 하려는지. 어떤 추억 또는 어떤 착상을.      


그런 생각을 하면서 향수를 조금 뿌리거나 핸드크림을 바르면 기분이 좋아지지만, 나는 사실 향은 좀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여긴다. 즉각적인 느낌을 주고 몸이나 공간의 분위기를 바꾸어주니 조금은 마술 같은 것이라고도 생각하지만, 반대로 그건 너무 ‘형이하적’이고 ‘감각적’이고 숙고와는 거리가 멀다. 언젠가 길거리의 걸인들에서, 지하철 열차 칸에 오른 노숙인들에게서 맡았던 지린내를 떠올리면, 필사적으로 냄새를 못 맡은 척 서 있던 나도 기억이 난다. 이 사람들 때문에 장소에 불쾌한 냄새가 난다는 코의 판단은, 도덕적인 결정에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다. ‘악취가 나는 사람은 출입할 수 없다’고 쓰인 공공도서관의 이용 규칙은 코의 판단을 따른 것이겠지만 윤리적으로는 마이너스다. 또 외국인들에게서 난다는 특유의 몸 냄새를 언급하는 순간 레이시즘에 빠지지 않기는 어렵다. 후각은 가장 빨리 둔화되는 감각이기도 하다. 후각의 판단이 맞다면 굳이 그렇게 빨리 무뎌질 필요가 있을까. 멍청한 감각과 멍청한 냄새.     


근데 막상 어떤 책에 따르면 가장 예민하고 영민한 감각이라고 하니, 나와 그의 생각 중 무엇이 맞는 것일지. 내가 읽은《코끝의 언어》에서는 인간은 다른 생물 종들 사이에서도 냄새를 분류하는데 가장 뛰어난 편이라고 한다. (인간 종도 뭐 하나는 다른 종들보다 나은 신체 능력이 있었던 거다.) 월등한 후각 능력을 위해 뇌도 노력한다. 뇌가 가장 많이 동원되는 감각이 후각이다. 감각을 수용하는 수용기도 시각에 비해 후각이 백 배는 더 많다. 이렇게 빠르고 세밀하게 냄새를 판단하는 것을 통해 인간은 천적 동물이나 위험한 화학 물질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빠르게 둔화되는 것도 같이 부각돼서 그렇지) 해서 빠르게 냄새를 잡아낼 수 있는 능력은 옛날부터 지성의 상징이었다고. 특히 악취와 좋은 향기는 선과 악에 대한 비유로, 그를 구분하는 후각은 도덕을 구분하는 영적 능력에 빗대어졌다고 한다. 후각은 적어도 중세 시절까지는 시각과 함께 수위를 다투는 감각으로 치켜세워졌지만, 인쇄기의 발명과 책의 보급으로 시각 문화가 극도로 발달하기 시작하자 급전직하하고 만다. 


거기에 덧붙여서 나는 근대 도시의 출현도 후각이 낮은 평가를 받게 된 이유가 아닐까 추측해본다. '비교적' 안전하고 위생적인 도시가 만들어지면서, 냄새로 위험을 신속히 알아챌 필요가 적어진 게 아닐까. 이제 도시의 위험이란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냄새도 풍기지 않으면서 온다. 그게 갑자기 달려드는 차량이 되었든, 멀쩡한 척 접근하는 사이코패스가 되었든, 무례와 차별을 저지르는 ‘선량한 보통 사람들’이 되었든. 뭐든 간에 그들을 냄새로 알아차릴 수 없다. 얼굴과 목소리로도. 감각을 하고서 반응과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사유일지니, 자기 생각이 어떤 결론을 내리는지 조금 기다려 주어야 한다. 모든 감각은 그걸 기다려주기 위해 물러서고 무뎌지는 게 아닐지. 후각의 둔화는 나름의 겸손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조금 덜 찝찝한 마음으로 냄새를 맡자고, 대강 나를 달랜다. 도시의 ‘자연’이란 인공적이고 비루하다고들 하지만, 도로명 주소에 ‘봉’이 들어가니 나도 나름대로 돌아갈 자연이 가까이 있다고 자부해 본다. 비가 와서 더 짙어지는 풀 냄새와 나무 냄새, 촘촘히 쌓여있는 흙냄새를 맡는 것에 질리는 사람이란 없겠지. 초록색도 안 좋아하고 등산도 안 좋아하고 여행을 갈 거면 동남아의 대자연보다는 ‘콘크리트 정글’인 뉴욕에 갈 거라고 장담하는 나도 계속 숨을 들이쉬니까. 거기에선 친근하다가도 계속 낯설어지는, 시큼하고 비릿하고 거대한 향기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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