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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희 Jul 14. 2023

헬스

트레이너 선생님은 내가 다리에 힘을 주지 못한다고 했다. 나는 적어도 지하철 좌석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을 의식하지도 않은 채 다리를 벌려놓는 인간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처음에는 대충 다리를 오므리는 척하다가도, 이내 힘을 빼고 자세를 풀어버리는 것들은 다리를 붙여 앉은 타인과는 다른 긴장과 압박 속에 살아가겠지. 덜 항의 받고 덜 눈치 받고 덜 무시당하는 일상을 보내겠지. 그러니 자기 검열의 의식 없이 옆 사람을 불쾌하게 만드는 거겠지. 하차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마다 그런 치들의 팔을 한껏 치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데. 맥이 빠졌다. 그때 선생님은 한 마디를 덧붙인다. 다리에 힘이 없으니까 무릎이 안으로 말려들어가는 거야. 실망은 좀 가셨지만, 대신 뜻밖의 사실을 또 알았다. 나는 무릎이 말려 들어갔구나. 


그 외에도 헬스장을 다니면서는 꽤 여러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어깨가 틀어져 있다는 사실, 가슴을 쫙 펴고 바르게 서질 못한다는 사실, 평상시에는 태연하게 굴었지만 헬스장에 와 있는 수많은 남자 회원들을 보며 적잖이 당황하는걸로 보아 나는 어지간히 내외하는 ‘유교걸’이라는 사실(이래서 여중, 여고는 없어져야 한다) 등. 반대로 긍정적인 의미에서 새롭게 의식하게 되는 것도 있다. 피곤이 조금 가시는 막연한 느낌, 밤에 무얼 먹지 않고 견디는 일이 생활을 꽤 단정하게 만드는 것 같다는 생각, 다음날 속이 더부룩하지 않고도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 


꼭 돈이 없어 봐서 생기는 단순한 생활과도 비슷하다. 택배기사에게 몇 시에 어디로 상품을 배송해달라고 짬을 내서 연락하지 않아도 되고, 약정만 끝나면 핸드폰을 최신 기종으로 바꿔야 한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어지럽지 않아도 되고, 예측 못한 다종다양의 소비 때문에 다음 월급일까지 통장 잔고가 0원이 되는 일도 의외로 별로 없는 생활. 반대로 급여를 받자마자 어디에 어떻게 쓰여야 할지 빠르게 요약되는 생활. 거기서 도무지 양보할 수 없는 것에 몰아서 지출을 할 때 정리되는 삶의 내력과 우선순위. 아닌 게 아니라 그런 데서 편의를 느낄 때도 종종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게 오래가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어쨌든 이 단순한 생활은 상황의 통제권이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니니까. 게다가 단순한 소비 패턴으로 인한 산뜻함은 이내 발생하는 각종 이자 납입일의 난립으로 사라지기 마련이다. 단순한 식단의 단정한 즐거움과는 다르게.     


내가 등록한 헬스 3개월 이용권은 PT 이용권이 아니다. 물론 이용권에는 헬스장에서 홍보한 매달 2회의 무료 세미 PT가 포함되어 있고 그에 혹하긴 했지만, 그래도 고작 운동기구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와 기본자세 잡는 정도나 배우길 바라는 수준이었다. 말 그대로 “참여에 의의를 두는” 거지. 처음에 러닝머신 전원 버튼도 못 눌렀을 정도로 운동치였던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았다. 내 세미 PT를 맡은 트레이너 선생님은 매번 그보다는 세심하게 운동 자세를 교정하고 식단과 생활 패턴을 점검해줬다. 분명 월 2회라고 알았는데 (홈페이지를 보니 월 3회로 되어 있다) 어째 만나는 횟수가 두세 번은 더 많았다. 고맙긴 했지만 그게 PT로 전환하라는 은근한 권유라면 꽤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마음이 없진 않지만 나는 신용회복위원회가 공인한 경제적 취약 계층이니까. 돈이 없다는 거절의 말은 입발린 소리가 아니었다. 날 위해서 한 품목에 십만 원 이상의 지출을 해본 경험은 헬스장 등록을 포함해 손에 꼽았다. 그러니 이 정도면 된 거 아닐까. 선생님의 PT 권유는 우리가 꽤 늦은 저녁 시간에 만났기 때문에 어째 다소 길게 느껴졌다. 지갑 사정을 고민해보는 척하면서, 그가 처음 만나고 얼마 안 있어 내게 말을 빨리 놓았음을 떠올렸다. 나이야 본인이 더 많긴 하지만, 이건 좀. 은근히 빈정이 상했다. 일단 생각은 해볼게요.


하지만 이틀이 지나고 다시 왔을 때, 그는 PT 건을 다시 물어보지 않았다. 이유가 뭐였을까? 이틀 차이여도 주가 넘어가서 잊어버렸을까? 아님 돈 없다고 버팅기는 회원한테 굳이 영업하느라 힘 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까? 하긴, 나 같아도. 가뜩이나 다들 아쉬운 소리 싫어하는 마당에. 어쨌거나 그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내가 운동을 못 따라가거나 심지어 실수로 그를 발로 조금 찼을 때조차도 평온했고, 인터넷 도시전설 속 트레이너와는 다르게 운동 강도가 매우 낮아서 몸무게가 더디 빠져도 격려했다. 생리통 때문에 오늘은 못 갈 것 같다는 문자를 보냈어도, 오랜만에 운동하러 와서 몸 컨디션을 얘기하느라 생리 얘기를 다시 꺼냈어도 “남자 앞에서 그런 얘길 뭐하러 하냐”고 장난식으로라도 타박을 주지 않았다. 따져보면 주에 1~4회 이상 보는 사람들 중에서 나를 그렇게 대한 사람은 오랜만이라서 꽤 놀랐다. 대개는 여름날처럼 온도 높은 친절의 시간이 지나면, 점성 있는 무례한 태도가 남을 뿐이지 않나. “살이 너무 쪘는데”나 “좀 웃어봐” 같은 말을 관심이랍시고 적선하고 나와 그의 친소를 확인하는 의식 말이다. 물론 그들 대부분은 그와 달리 나를 고객의 입장으로 대할 필요가 없었지만. 심지어 나는 내 소비가 누군가의 실적이 되는 순간에서조차 그런 식의 무례한 친분 확인 의식을 종종 겪었다. 내가 너무 예민하거나 우수 서비스 매장을 사전조사하지 않을 만큼 게으르거나 둘 중 하나겠지. 아무튼 너무 좋아하는 대신 별로 못 보는 친한 지인들, 성가시고 짜증나게 하는데 많이 봐야 하는 이름뿐인 지인들로 양분된 일상에, 간만에 소외됐던 제3의 영역이 재조명되기는 했다. 늘 마주쳐도 무감한, 그리고 어쩔 땐 약간 고마운 누군가. 


언젠가, 그런 사람들을 꽤 마주치며 지냈던 때를 상기한다. 서초구의 구립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근처 수제 버거집 사장님은 내가 단골이랍시고 와서 단품밖에 시켜 먹지 않아도 콜라를 주셨고 날이 추워지면 난방기와 전기난로를 내 쪽으로 애써 틀어주셨다. (아마 그땐 손님이 나밖에 없어서 그랬겠지만) 도서관 바로 옆 건물의 파리바게트 사장님도 몇 번 들렀다고 남는 빵을 알뜰하게 챙겨주셨다. 그 뒤 복학하고, 아마 같은 수업을 들었던, 나한테 호감이 있다는 남자를 마주쳐 그의 일방적인 연락을 차단할지말지 고민한 적 있었다. 그때 나는 사랑이고 호감이고 다 필요 없고, 인간에 대한 예의와 선선한 도움만으로도 사람은 자기 생활을 지탱하며 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도 그 결론을 곱씹으면 별다른 반박이 떠오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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