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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희 Jul 14. 2023

사이클을 타기라도 하는 양

오늘 하루 별일 없었지. 여기서 ‘별일’로 축약되는 시간을 조금씩 펼쳐본다. 일 분 일 초의 감정이 다른 내가 의존하는 습관들이 그 시간을 이룬다. 우선 아이스 커피. 커피는 믹스커피여야 되고 연달아 두 잔을 마시는 게 ‘루틴’이다. 그다음은 커피가 위장으로 내려갈 때까지 잠시 기다리기. 잠이 깼다 싶으면 제일 먼저 청소를 한다. 일단 몸을 움직여야 잠이 더 잘 깨는 데다 이미 몸에 익은 순서와 요령 때문에 웬만해선 잘 망치지 않는다. 침묵은 일하는 나를 여러 상념에 빠뜨릴 수도 있으니 사운드클라우드에 접속해 20분짜리 믹스테이프를 트는 것은 필수다.      


바닥에 널브러진 물건을 정리하고 식탁과 싱크대를 행주로 닦아내고 청소기를 돌린다. 쓰레기를 버리고 신발을 신발장에 넣어놓는다. 엄마가 세탁한 빨래를 건조하고 옷장에 넣어둔다. 어젯밤에 끓여놓은 보리차를 물통에 붓고 냉장고에. 그다음 널브러져 있는다. 그리고 언제 지쳤냐는 듯 간식을 사고 산책을 하고 바깥에 일이 있으면 얼른 다녀온다. 이때쯤이면 벌써 해가 조금씩 지기 시작하는데, 그림자가 길어지고 하늘이 붉게 물드는 센치한 시간대에 걸맞은 생각들이 떠오른다. 주로 과거의 기억이지. 그런 추억들이 나를 지배하기 전에 공책을 펼쳐서 오늘의 불만과 감사를 적는다. 불만은 그렇다 치더라도 감사라니. 너 같이 시니컬하고 건조한 사람이, 라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몇몇 지인들이 감사일기를 쓴다는 말을 들은 지만도 7, 8년은 넘어가는 것 같지만 재작년까지는 시큰둥했다. 우선 타고나기를 다혈질이라 화가 많아서 그렇기도 하고. 게다가 예전이나 지금이나 평등함을 원한다면서도 차별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 아닌가.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일할 때 하나 같이 고객 평가에서 만점을 받아야 하고 우수한 서비스를 마치고 나면 숨겨져야 한다. 덕분에 사무실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까지 몇 개 층을 다 치워야 하는 빡빡한 일정이 예사였던 엄마와 동료들. 늘 ‘매우 좋을’ 수 없어서 들어야 했던 피드백. 그런 세상에서 ‘오늘 맛있는 디저트를 먹을 수 있어서 감사해요.’라고 적어봤자 미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정신승리가 아닌가 싶었다. 세상이 좀 덜 구린 쪽으로 발전했다는 얘기들 들었어도 생각은 마찬가지였다. 단지 엄청나게 쌓이는 불만들을 무마하고 기분을 전환할만한 것들을 찾지 않으면 돌아버릴 것 같아서 억지로 감사할 일들도 쓰게 되었다. 사실 감사할 일들을 적는다고 늘 대단하게 기분이 바뀌지는 않았지만, 순간의 기쁨들을 예전보다는 더 곱씹게 되는 점은 좋았다.      


근데 공책을 반으로 나누어 오른편에는 불만인 일들을, 왼편에는 감사한 일들을 적고 있으면 그것들에 공통점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불만인 일들은 그것이 ‘당연하게 감내해야 할’ 불편이 아니어서 불만이 되고, 감사한 일들은 그것이 ‘당연하게 주어져야 할’ 조건이 아니라서 감사가 된다. 당연하지 않은 것을 구별해내는 감각. 감사로서 그것을 훈련할 수 있다고 한다면 문제 제기에서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내가 ‘깨끗하고 아름다운 장소에 출입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라고 인식하게 된다면, 깨끗하고 아름다운 장소를 만드는데 들어가는 노동을 떠올리고, 그 노동의 처우가 정당한지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감사는 세상의 기쁨을 더 깊게 누리도록 할 뿐만 아니라, 세상의 슬픔도 보게 해서 더 넓은 세계상을 갖는 데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노트를 쓰면서 벌어지는 감정 기복은 넘길만한 것처럼 느껴진다. 감사와 불만, 기쁨과 슬픔, 사이클을 타기라도 하는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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