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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희 Jan 17. 2024

탄원하는 여인들

 

  “탄원하는 여인들”은 아이스퀼로스와 에우리피데스 비극의 제목이지만, 어쩐지 먼저는 복음서에 나오는 여자들이 떠오른다. 남자들 간의 경쟁과 흉계 사이에, 예수의 활약과 십자가 처형 사이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여자들. 높은 목소리로 호소하는 여자들. 사진으로 치면 망막에 반사된 형형한 눈빛이거나 무거운 금니 같아서 자꾸 돌아보고 곱씹게 된다. 사실 그것이야말로 복음서 기자들의 의도일지도 모르는데, 그녀들의 탄원이 즉시에 모두 이루어진 것이야말로 예수가 신이라는 강력한 근거들 중 하나이기 때문일 테다. 인간은 탄원 앞에서 무능해지고, 무능하기 때문에 탄원인의 호소를, 상대에게 쏟는 간절한 마음을 그토록 오랫동안 착취하는 것이니까. 마치 상대가 간절하면 간절해질수록 자신에게 없는 능력이 생긴다는 듯이.      


상상력

  어쨌거나 여인들은 예수가 보통 인간이 아님을 알았다. 상대의 흠모할 것 없는 얼굴, 평범한 육신, 차림이 말해주는 가난함 속에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만큼 대단한 능력을 알아채는 것은 상상력의 문제다. 뭔들 상상력의 문제가 아닐까마는. 남편의 존재감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그들은 대부분 가난했을 것이라, 여기서의 상상력은 광고 카피가 주문처럼 외는 ‘상상력’과 다르게 특별하다. 상상력의 대적은 가난이니까. 육천원짜리 비엔나커피와 만원짜리 파스타를 사먹을 엄두도 못내는 것, 연극 티켓과 신경정신과 치료에 손사래치는 것, 다음 월급일이 돌아올 때까지 고장 난 보일러를 고칠 수 없다고 굳게 믿는 것, 물때 묻은 대야와 양동이, 유통기한이 지난 수분크림을 내버린 화장실을 상상할 수 없는 것, 누군가를 방문할 때 맞출 구색 앞에서 겁부터 나고, 차마 위문품 없이 누군가를 방문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 다달이 갚는 부채의 이자 얼마를 채워놓지 못한 채로 가족들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라 도저히 예상할 수 없는 것…… 가난은 그런 식으로 상상력을 절단한다. 그건 엄마가 겪었고, 겪고 있는 가난의 빛깔과 모양. 신영복 선생의 말마따나 자식은 부모가 아니라 시대를 닮는다지만 엄마가 보는 가난의 색유리 앞에서 내가 자유로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같은 경제 공동체니까. 경건하게 그 그림을 믿는 척 해주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어떤 상상력의 부재는 도저히 견딜 수 없다. 아버지는 지금도 술에 취하면, 무려 아식스 후드 티와 바지를 사줬는데도 감사하다는 연락 한 번 없는 사촌동생이 “괘씸해” 욕을 한다. 형편이 어려워 “친딸들에게도 그런 비싼 옷을 사준 적이 없다”며 아파하는 슬픈 마음은 앞으로도 영원히 딸들에게 비싼 옷을 사줄지 못할 거라는 달콤한 비통함으로 바뀐다. 내가 그라면 12개월 할부를 해서라도 30만원 가량의 후드 티와 바지를 딸들에게 사주어 죄책감을 없애버리겠지만, 그는 그 방법을 도저히 상상할 길이 없는 것이다. (어쩌면 그는 여성에게 30만원 짜리 옷 한 벌을 사주는 일을 은연중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 대학등록금을 지원해주는 것을, 결혼자금을 보태주는 것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인지 모르겠다. 그런 그가 집안 형편이 풀리면 독립해서 유유자적한 전원생활을 즐길 거라는 공상에 빠진 걸 볼 때, 이 상상의 불능 상태 역시 개인의 욕망과 그것의 자의적 편집에 불과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이 인위적인 구성물은 개인에게 한계를 부여하지만 개인은 그 한계 안에서 편안한 것이다. 우리 부모도 가난이라는 명분으로 자식들의 물질적·감정적 요구와 부모로서의 자잘한 역할들을 효과적으로 외면해왔기에, 예상 밖의 무엇을 예상하기보다, 차라리 끊임없이 다른 일을 찾는다. 예를 들면 과자 봉지까지 철저하게 분리수거를 하거나, 쓰레기 배출일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것 등의 이름도 빛도 없는 일들. 그 이름도 빛도 없는 일을 하며 묵묵히 일상을 산다. 그것도 모자라면 자식의 모든 요구를 돈에 대한 요구로 치부하며 자식을 몰아붙이거나. (어느 쪽이든 같잖은 현상 유지에 동원되는 선택지다.) 변명하자면 돈을 싫어한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으나, 내가 바라는 모든 것이 돈으로 귀결되진 않는다. 탄원하는 여인들이 소원한 것은 (자신 혹은 자녀의) 자유롭고 굳건한 몸과 마음과 생활이었다. 그건 지속되는 변화이자 성공적인 탈출기. 나도 같은 것을 바랄 뿐이다.      


역능 

  여인들은 상상할 수 있고, 상상할 수 있기에 능력을 지닌다. 복음서는 신자의 능동성과 역량을 강조한다. 예수는 자신이 메시아라는 말만큼이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는 말을 거듭한다. 그들은 최소한 그들 자신의 두 번째 의사 정도는 될 수 있다. 마태복음 9장 20절에 등장하는 혈루병 앓는 여인은 “제 마음에 [예수의]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고,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처방한다. 마태복음은 가나안인이라고도 하고, 마가복음에서는 수로보니게인이라고 하는 여성도 마찬가지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는 외침 속에는 무엇이 문제이며, 상대는 그 문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전부 담겨 있다. 순전한 믿음은 지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대결

  그러나 예수는 여인에게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다고 말한다. 자녀인 유대인들에게 은혜를 주기도 바쁘니, 개와 같은 이방인이 먼저 자비를 구하지 말라는 뜻이다. (여인의 말을 듣기에 앞서 제자들에게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는 마태복음 15장 24절이 이런 해석을 강화한다.) 여자는 예수의 야멸찬 거절에도 굴하지 않는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그녀는 거절을 거부한다. 은혜의 부스러기도 달라는 얘기일 수도 있고 아이들도 베푸는 친절을 조금도 보이지 않을 것이냐는, 공손한 항의일 수도 있다. 예수는 협상에서 여인의 우위를 인정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혹은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의 표현은 대동소이하다. 예수의 다른 기적에서처럼 여인은 집으로 돌아가서 환자가 다 나았음을 확인한다.


  수로보니게 여인과 예수와의 대화는 어쩌면 역사상 가장 강한 남녀 대결의 기록일지도 모른다. ‘대결’이라는 측면에서 그렇다. 남녀의 대결이라 일컬어진 것들 대부분은 크게는 세 가지 경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복서들을 링 안에 들어오게 만드는데도 실패하는 경우, 공평한 규칙대로 경기를 진행하지 못하는 경우, 어찌어찌 해서 그렇게 불공정해 보이지 않는 경기를 끝내고 나서 경기장을 빠져나간 뒤에 한 복서가 다른 복서를 무차별적으로 가해하는 경우. 그 경우들을 여성 억압이라는, 보다 적합한 말로 묶는 게 나을 것이다. 마태복음에 기술된 대로 당시 예수 곁에는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라고 청하는 제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와 수로보니게 여인의 만남 역시 그렇게 억압으로 타락한 대결, 경기로 승화되지 못하는 추문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어부를 비롯해) 강건한 육체 노동자 출신 남성인 제자들은 선생의 허락만 있었다면 그녀를 예수에게서 강제로 떼어놓아 링 밖에 던졌을 거니까. 하지만 예수는 제자들의 청을 무시하면서, 그녀의 말에 대꾸하면서 그녀를 링 안으로 초청한다. 여인과 예수는 링 안의 복서들처럼 공평하게 한 번씩 펀치를 날리고, 더 강하게 펀치를 날린 복서를 가려낸 뒤, 경기를 종료하고 퇴장한다. 퇴장하고 각자 갈 길을 간다. 그건 “수로보니게”라는 말만큼이나 생소한 광경이다. 승리의 당사자인 수로보니게 여인조차 상상 못했을지도.      

   17살 때 상상한 27살의 내 모습은 다른 의미에서 상상 밖의 것이었다. 아버지는 걸렛대를 던지려고 달려들고, 폭력을 피해 집 밖을 나와 잘 곳을 찾는 식의 모습을 떠올렸을리가. 동네 찜질방으로 가는 길에 얻어맞았던 몇 분 전을 생각하며 성을 내는 것도. 아무리 비관적인 사람이어도, 미래는 과거의 지루한 반복이 대부분이라 믿고 싶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아예 부정적으로 굴지도 못해서, 지금처럼 그 때도 보이는 어둠에 마음껏 비명 지르지도 못하고 스코어를 셌다. 어차피 경기가 되지 못하는 싸움인데도.


  말은 필요 없다. 내가 폭력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언어화시킬수록, 통증과 감정을 나타내는 적확한 단어를 많이 찾아낼수록, 또래 친구들과 몇몇을 뺀 나머지 지인들은 나에게 더 단호하게 패배를 선언한다. 내가 괘씸하게도 그들을 생생한 고통의 묘사에 가둬놓고 통증과 피로를 더했기 때문일까? 남의 고통을 샅샅이 보면서 몇 번은 즐거웠을지 모르지만, 대체적으로 그들은 나 때문에 괴로웠다. 거기에는 성별과 계급과 출신 지역과 종교 여부가 따로 없다. 나는 그들의 이상인 가족주의를 모독했고, 결국 호의는 아버지의 것이다. 어쩌면 사랑과 우호도 아버지의 것이지, 내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왔다. 내 것이 아닌 것들은 먹다 남은 음식처럼 굴러 떨어진다. 탄원도 항의도 옹호도 제거된 사랑의 모양으로. 하지만 볼품없는 음식이 성에 찰 리 없다. 나는 적선 받는 개라기 보단 저능한 탐식가에 가깝다. 부스러기의 출처가 신이 아니라면 더욱.


  결국 남는 길은 편식이다. 아버지의 것은 아버지의 것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와 연민이 없는 사람들에게 몸과 마음은 물론이고 약간의 돈과 시간과 감정노동을 들이는 일조차 사치라는 사실을 성급하게 알았다. 그게 나의 비연애시대를 만든 이유일지. 로맨스와 낭만은 없고 남은 건 여전한 가난과 간헐적인 폭력 등이지만 가장 깊숙한 마음, 가장 내밀한 감정을 탈취 당하진 않았다. 가진 것 없어도 별로 뺏기지 않은 생활은 다행스러운 걸까. 근데 여기서 더 많은 걸 바라면 안 되는 걸까. 탄원과 옹호를 적절하게 나눠주는 온전한 사랑, 낭만으로 빛나는 사랑을 사람에게 구하면 불경한가. 싸움을 대결로 바꾸는 일이야말로 가장 급한데 엉뚱한 곳에 신경을 쓴다고, 탄원하는 여인들은 말할지도 모른다. 우선은 누군가가 너를 치면 너 역시 그를 칠 수 있어야 하는 게 먼저라고. 경기장을 만드는 것, 그리고 너를 상대로 인정하는 손짓이야말로 구원이며, 그게 아니라면 그 어떤 손길도 다 사기라고. 위로는 타격을 피할 길이 없다고. 우선 타격을 막고 받아칠 수 있어야 무슨 감정이라도 느끼는 거라고.


*어제 부친에게 맞은 기념으로 올리는 글 (몇년 전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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